#14. 헬싱키 반나절 여행

퇴색할지 언정,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by missnow

헬싱키 반나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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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을 먹은 후 캐리어를 호텔에 맡겨 두고 간단한 짐을 꾸려 헬싱키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5년 전 헬싱키에 왔을 때는 관광객이 많았었는데, 평일 오전이고 관광 시즌이 아니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여전히 특색 있고 매력적인 헬싱키 시내 상점들을 구경하다 지난번 여행 왔을 때 맛있게 먹었던 연어 수프와 바게트, 화이트 와인이 생각나서 올드 마켓 홀에 갔다.

북적북적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영업을 하는 가게보다 문을 닫은 가게가 더 많았다.

외관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지만, ‘활기’와 함께 내 기억 속 핀란드 맛집은 사라진 듯해 아쉬웠다.

올드 마켓 홀을 나와 잠시 쉬기 위해 카페 카펠리에 들어갔다. 카페 안은 여유 있게 브런치를 즐기거나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듬성듬성 채워져 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의 시간은 밖에서보다 두 배 정도는 느긋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 느긋함에 취해 잠깐 쉬면서 커피만 한 잔 하고 나오겠다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생각보다 꽤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헬싱키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반나절밖에 없어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는데...

여유를 부리는 건 내가 이 시간에 계속 머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말이다.


퇴색할지언정,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지난번에 왔을 때 문이 닫혀 있어 창밖에서만 구경해야 했던 빈티지 숍 FRIDA MARINA는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창밖에서 흘깃 봤을 때도 예쁜 아이템들이 많은 가게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예쁜 물건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 주인의 안목이 느껴지는, 하나하나 개성 넘치면서도 잘 관리된 옷들과 소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빈티지 숍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템 자체의 유니크함도 있지만, 지금 유행하는 옷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과거의 향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거 유행했던 디자인과 소재, 패턴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잔해들.

다시 재현할 수 없고, 재현한다 한들 그때와 같지 않을 당시의 시간이 고스란히 박제돼 있는 물건들을 보면 묘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빈티지 숍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 어울리는 건 또 별개의 영역이라 이번에도 손이 아닌 눈에만 상품을 담아 나왔다.


FRIDA MARINA을 나온 후 지난번 헬싱키 여행 때 좋은 기억을 만들어줬던 빈티지 숍 Kinnunem도 이 근처라 마지막으로 Kinnunem에 가보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 위치를 저장해 두었던 터라 지도를 따라갔는데, 표시된 위치에 가도 Kinnunem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길을 못 찾는 건지, 아니면 가게가 없어졌거나 이전을 한 건지 예전 위치에서는 사라진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와 초조해지기 시작했는데, 기껏 여기까지 와서 못 보고 가는 게 아쉬워 일대를 몇 번 더 왔다 갔다 하며 가게를 찾아봤다.

그러다 구글에 나온 가게 사진의 건물 벽이 노란색인 것을 확인하고, 주소지가 아닌 그 일대의 노란색 벽 건물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Kinnunem을 발견했다.

내 기억과 달리 가게 외관은 조금 바뀐 것 같았으나 가게 상호는 그대로였다. 가게 안에 들어가 보려 했으나 가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오늘 영업을 하지 않거나, 영업시간 전에 내가 온 것 같았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없어진 게 아니면 됐다는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항에 가기 위해 다시 트램을 타고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그 가게가 없어졌을까 봐 아쉬워했던 걸까. 몇 번이나 갔다고...
꽤 취향에 맞는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이기도 했지만, 그 가게 분위기와 그날 주인과 나눈 이야기가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핀란드 헬싱키 하면 떠오르는 가장 좋은 추억 중 하나로 Kinnunem을 발견하고 가게 주인과 나눈 대화가 떠오를 정도로...

그 가게 자체가 특별하다기보다, 그 가게에 내가 일방적으로 남기고 간 내 기억의 일부, 흔히 추억이라고 말하는 그 기억의 한 장면이 소중했던 거겠지.

핀란드에서 오로라를 제대로 보진 못했어도 그 가게와의 우연한 조우로 나는 내가 겨울 여행을 다니는 목적을 새삼 깨달았고, 내게는 일상에서의 오로라를 맞닥뜨렸던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을 품고 있는 그 장소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차라리 변하고 퇴색되는 것이 낫다. 아예 사라져 버리면 그 공간에 깃들어있는 나의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어쩌면 사람은 추억이 된 기억으로 삶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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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마침표


반나절 헬싱키 여행을 마치고 맡겨두었던 캐리어를 찾아 공항으로 갔다. 헬싱키는 지난번보다 한산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헬싱키를 여행했다는 느낌보다는 이 도시의 평일 일상을 잠시 들여다본 느낌이 더 강했다.

5년 전에 왔을 때는 연말의 휴일이었고 처음 와본 곳이었기에 좀 더 여행지의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기, 어떤 상태에 여행을 왔느냐에 따라 그 장소도 달리 보이는 것 같다.
지금의 헬싱키는 내게 여행지라기보다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떠나온 그곳의 일상이 더 자주 상기되는...

다음에 핀란드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좀 더 핀란드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에 가보고 싶다. 아일랜드를 여행했듯이 차를 타고 핀란드의 고요한 숲이나 호수에도 가보고 싶다.

왜인지 또다시 이곳에 오게 될 것 같아 이번에도 관람차는 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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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하게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탑승 게이트에 무사히 도착했다. Cafe Koivikko에서 5년 전 이곳을 떠날 때와 같이 핀란드 맥주 Lapin Kulta를 마셨다.

공항 게이트 안 카페는 무언가 시작된다는 설렘과 모든 걸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 시작과 마지막을 보내는 순간을 나는 여행지를 관광하는 것 못지않게 좋아한다.

모든 수속을 마무리하고 탑승 게이트 앞에서 마시는 맥주는 내게 여행의 마침표와 같다.

이번 여행의 모든 시간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끝이 났고, 나는 그곳의 ‘나’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