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a spoiler.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들리고, 화면은 흰 타일들로 가득하다. 별것 없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화면의 반복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바로 일본 영화 8번 출구였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린 니노가 화면에 잡히는 순간, 그에게 익숙한 세대에게는 현실감이 잠시 사라지지만 일본문화가 그렇게 대중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출중한 영화였다. 나는 원작이 되는 게임의 스토리나 감독이나 배우의 인터뷰를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은 그저 루프를 반복하는 호러영화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영화를 보고 나의 해석점을 찾느라고 흥미진진했다.
혹시 보지 않으셨다면, 잠시 돌아가셔도 좋다. 많은 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호러이자 오락영화이기는 하지만, 오래간만에 매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영화이다. 과연 감독이 심어놓은 이스터에그인 것인지 맥거핀인지 아니면 단순히 원작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 시작할 때 카메라는 1인칭 시점을 향한다. 조금 어지럽고 정신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직접 보는 느낌이라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작 초반,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에게 어떤 남자가 소리친다. 엄마면 조용히 시키라고 말이다. 여기서 이질감을 느꼈는데, 우리나라였다면 불편함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거나 이어폰을 끼거나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주변의 누군가가 반드시 대신 싸워주는 흥미진진한 싸움 구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원치 않는 1열 직관.) 여기서는 일본의 개인주의적인 문화와 우리나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자리 잡긴 했지만, 아직 저 정도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 후 지하철에서 내린 니노는 8번 출구를 찾아 탈출하게 되는 루프에 갇히게 되는데, 여기서 신기한 점은 타임루프가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은 루프를 반복하면 시간은 동결되고 오버되거나 리셋되면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루프는 시간은 흐르고, 루프만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또한 루프 속에서는 수많은 변칙들이 존재한다. 즉,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변칙점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다면, 영원히 탈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끝나겠지만, 어쩌면 노인이 되어서도 루프 안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를 통과하는 주제는 책임감과 회피하는 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 소재로 아이를 사용한 것 같은데 아마도 작고 약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부모의 책임감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겼기에 선택한 소재가 아닐까 싶긴 하다.
아무래도 아이와 책임감에 연결이 되어 있다 보니 낙태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는데 나의 생각은 이렇다.
니노는 실제 루프에 갇힌 것이 아니라 그 루프는 니노의 머릿속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클래식한 타임루프처럼 시간마저 같은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과 오버랩이 되는 것을 보면 니노가 진짜로 루프에 갇혔던 아니면 그저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들을 루프에 갇힌 것처럼 표현했던 상관없이 감독의 표현 방법은 참신했다.
나에게 이영화가 주장하는 바는 확실했다.
낙태. 부모의 책임감. 아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책임감. 단순 유희가 아닌 관계로의 책임감.
처음에 니노가 갇히게 된 것도 헤어진 전여자친구가 임신했음을 알리면서 어떻게 할까 하고 묻는데 아이아빠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전화기가 떨어지고, (의도한 바가 아니더라도 보통은 떨어졌다고 말하고 다시 들을 만 하지만, 듣지 않음으로 회피함) 우선 일하러 가서 시간을 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덤덤하게 말하면서 여자는 조용히 결정했다고 한다. (낙태를 의미하는 듯했다.)
니노가 처음에 한 곳을 계속 벗어나지 못하자 당황하다가 처음으로 루프임을 인지하게 되는 첫 장면에 피가 잔뜩 흐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낙태를 의미한다.
계속 성공하던 루프 속에서 이상현상으로 인한 전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고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순간 루프는 다시 초기화된다. (너무 당연하지만 뜻하는 바가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다음 루프에서 조명이 어두컴컴하게 노랗게 변하며, 니노는 초기화된 루프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그 장면에서는 절망감과 괴로움, 허무함, 허탈함,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는 주요 등장인물 포함 총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지하철 속 사람들은 논외로 하자.) 주인공인 니노와 NPC 2,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 전 여자친구이다.
남자 NPC의 사정이 중간에 나오는데, 원래는 플레이어였던 모양이다. 그 사람 역시 루프 속에서 탈출하려다가 실패했던 사람이었다.
니노가 비명을 지른 후, 어린 남자아이가 등장하는데, 처음부터 등장했던 남자 NPC 때문에 니노는 어린 남자아이 역시 변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루프가 존재한다면 사실 이 아이가 루프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인지 악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이와 함께 한 루프에서 갑자기 정전이 되는데, 카메라는 다시 1인칭 시점이 되어 아이를 비춘다. 그런데 그렇게 암흑처럼 컴컴한데 아이가 겁을 먹지 않는다. 그러면서 실험쥐라고 보기에는 매우 기괴한 발가벗은 쥐들이 나오는데 그 쥐들에게는 눈, 코, 입, 귀 같은 부분이 달려있다. 사실 인체 실험 쥐의 경우 많은 인체 부위를 달고 있지만, 장기라던가 이런 부분을 주로 더 실험하지 이목구비를 실험하는 것은 극소수라고 생각하기에 이 장면연출은 기괴하면서도 무섭다.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낙태가 생각났다. (실제 낙태수술은 자궁 안에서 태아를 조각내어 꺼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낙태를 할 때 태아가 자궁 안에서 살기 위해 피해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흉측한 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태아가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있는 것은 원래 엄마의 자궁 안은 캄캄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후 니노와의 이야기 속에서 아이는 버려졌다, 스스로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부모의 보살핌 아래 있지 못했단 것이다.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당사자를 제외하면 오로지 아이만이 변수인 것이다. 거기다 아이는 계속해서 니노나 NPC가 된 남자까지 어른을 구하려고 한다. 중간에 걷는 남자로 등장한 남자 NPC 역시 아들을 보러 간다고 한다. (이혼했거나 아니면 혼외자등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 지지 못하고 있을 상황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자 NPC인 여고생 역시 낙태를 받은 적이 있거나 임신 중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계속 말을 하지 않다가 니노가 자신을 구해주니까 그때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 결국 루프 속에서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게 입을 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둘이 7회 차에 도달했을 때 온갖 쓰레기와 함께 구정물이 두 사람을 덮치는데 니노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살린다. 그때 일부 환영처럼 보이는 영상이 있는데 이건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많이 다를 것 같으니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 후 살아남은 아이는 먼저 8회 차를 마무리하고 떠나고 바로 니노가 8회 차를 돌파함으로써 루프를 탈출한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여자친구에게 가는 길에 첫 장면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니노가 행동하는 듯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끝 장면으로 인해 사람들은 열린 결말이라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건 닫힌 결말이다. 니노는 루프를 결국 빠져나왔고 행동함으로써 완전히 벗어났다. 만약에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렇게 태연하게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마치 인셉션의 증거였던 팽이처럼.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루프라는 것이 마치 연옥처럼 죽어가는 생명들의 억울함이 자신을 살려달라고 외치는 건가 싶었고 마무리할 때는 되려 부모가 된 자들의 머릿속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실제 루프가 있던 아니던 상관없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겠다.
영화 초반에 얼마나 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기회가 되고 마음에 들었다면 2번 정도 보는 것도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저렇게 찾아온다면 무서워서 누가 아기 낳겠나 싶긴 하다는 결말을 남긴,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