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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현 Sep 25. 2020

오늘의 표현: ‘Blame Game’ 원망 게임

<오늘의 표현: 원망 게임 (이런 게임도 있나;;)>




지금도 영 철딱서니가 없지만 지금 보다 더 했던

나름의 과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미워하고 원망하던 대상은

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주변인들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최악이야’, ‘저 사람은 자기밖에 몰라’,

 ‘저 사람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등등 여러 가지 비난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오는 회의에 빠져있던 저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때문에’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습관은

결국 제 자신을 과거에 가둬버렸습니다.

동시에 자기중심적 몰입은

매번 오만함과 고통을 만들어냈습니다.


제 자신만의 생각 속에 갇혀

현실의 전개를 부인하다 보니

앞으로 나가지 못했으니까요.


동시에 ‘그 일 때문에,

혹은 저 사람 때문에’

‘고로 나는 잘될 수가 없어!’라는 믿음이

내면에 자라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해결되거나 혹은

저 사람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상황이 변하지 않을 거야’ 하고

삶을 정체시켜 놓은 장본인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왠지 공감이 되나요?


 ‘남 탓’을 하다 보면 ‘내 탓’ 이 아니라는

일시적인 마음의 안도감이 있겠지만

매번 힘든 문제 앞에서

또다시 과거의 원망으로 유턴하게 된다는

 어마 무시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를 듣는데

 유독 한 구절이 정신을 번뜩 들게 하더군요.

그 구절은 ‘The only way out is through’라는

가사였습니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과정을 거치는 것뿐’.


듣기만 해도 소름이 쫙 끼치는,

미련해 보이기 짝이 없는 이 표현은

꽤나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렀습니다.

온 우주가 제게 납득시키려고 작정을 했는지

어느 날 책을 읽는데

 ‘The only way out is In, In and deep”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

안으로 깊숙이’

라고

적혀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런 철거머리 같은 두 표현은

그 후 내내 제 마음과 머릿속에 들러붙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재생되었습니다.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과정을 거치는 것뿐이야~ 오~ 그보다 더 심한 것이 기다리고 있지~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안으로~ 더 깊게~’



저는 기쁨은 최대한으로 누리길 원하며

고통은 가능한 한 회피하고픈 전형적인 쫄보입니다. 늘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도 있어서 사소한 고통 앞에서도 호들갑을 떠는

엄살쟁이입니다.


고통과 문제 안으로 깊숙이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도

동시에 발동된 호기심 덕분에

문제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제게 있어서 대부분의 문제의

시발점은 ‘원망’이었기에

 ‘원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정돈이 안된 난장판에

퀴퀴한 냄새까지 진동하는

마음 한 켠에는

나를 향한 원망, 남을 향한 원망,

그로 인해 정리되지 못한

온갖 이해관계들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듯

하나하나 들춰봤습니다.

총체적 난국이라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몰랐지만

내심 내려오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려오기가 무서워 방치되었던 공간은

어느새 정리정돈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번에 깨끗해지지 않았지만

퀴퀴하고 지저분한 방에 환기가 되고

쓰레기들이 수거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정리를 하면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경우 원망은 상대의 처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망의 뒷면에는

상대를 뼛속까지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함,

잘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함께 작용합니다.


타인이 처한 상황과 생존은

우리에게는 피부로는 와 닿지 않는

소위 ‘남의 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상대를 참 ‘쉽게’ 판단하고

 ‘쉽게’ 이야기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제가 미워하고 원망했던 그들도 어쩌면

‘지금의 어쩔 수 없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안으로 깊게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 보니

원망 게임 속에 몰입 중인 타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Blame Game 속에 몸과 마음이 축 나고 있네요.

안타깝습니다.



안으로 깊게 (In and Deep) 들어가 본 사람은

Blame Game으로 누군가가 초청할 때마다

쉽게 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시 보류한 채

자신의 마음의 작용을 지켜봅니다.



친구는 깨어진 관계 앞에 상대를 원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가 얼마나 아끼고 챙겨줬는데” 하는

서운함이 깃든 원망이 가득하네요.


그렇다면 한번 되돌아볼 것이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정 상대를 위했던 것인지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관계가 주는 조건과

그에 따른 마음의 변화를

좇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진짜 상대를 사랑했을까.

상대를 향해 만들어낸

이미지와 환상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참고로 사람 자체가 아닌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한 모든 관계는 원망을 낳습니다.




 친구는 내심 도와줄 것을 기대했던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지 않아 원망합니다.


많은 경우 마음만은 굴뚝같으나

구체적으로 개입해서

모든 것을 해결해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아닌 인간인 겁니다.


나름 순수한 열정으로

백지수표 같은 말을 내뱉어 놓고는

돌아서서 본인 앞가림도 힘든가 봅니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타일러 줬습니다.


오히려 친구에게는 상대의 도움이 배제된

지금의 고통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나비가 날아오르려면 고치 속에 갇혀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스스로 몸통에서 나오는 액체를 이용해

작은 틈을 헤치고 나와야

자유로이 훨훨 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안쓰러워 사람이 인위로 꺼내 주면

나비는 고치에서 툭! 하고 떨어집니다.

몸통이 퉁퉁 부어오르고

날개가 쪼그라들어 평생 제 구실을 못하고 삽니다.



친구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고

원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 알지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거나

당장 쫓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애당초

정답을 던져 준다고 해서

순순히 이행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겠지요.


사명감이라는 것이 대단한 만큼

지나치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상대를 바꿔 놓겠다는 사명이 투철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현실적 사정에 눈이 가리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진정 내편으로

만들어야 마땅한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당장 내 말 안 듣는다고 안 죽습니다.

지나 보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그 시간이 유익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주변 사람들이 경청을 잘 안 해주나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딱히 듣기는 싫은 말,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기분이 드는 말,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훈계로 가득한 말,

돌아서서 생각하게 만드는

은밀한 경멸의 표현들은 그 누구도 반기지 않습니다.

평소 어떤 식의 화법으로 대화하는지

 한번쯤은 돌아볼 일입니다.




친구는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해

부모님을 원망합니다.


최근 미디어에서 ‘금수저’, ‘흙수저’ 류의 신조어로

부모의 명성과 재력을 업은 이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은 금수저도

 실력과 깜냥이 안되면 유지가 안됩니다.

단순히 물려받은 ‘자산’만 의지하는 금수저는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대세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자신의 세대에서 모든 부귀영화는 소진되고

 그 이후 세대로는

큰 고통을 당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요즘은 특히나 고학력, 고스펙의 엘리트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비빌 언덕에 익숙한 사람들보다 스스로 일궈낸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역량을 넓혀 나갈 때

더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이 약속했던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기존의 관념들이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란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호들갑을 떨고 목숨 걸었던 일들도 알고 보면

딱히 그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영어에 “Never say never”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빨리 인정하고.

좋은 것만 취하며

Blame Game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해가 뜨고 지는 것과

밀물과 썰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요소를 통제하며

나에게 만족감을 안겨 줄 사람과 상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을 향한 Blame Game을

종료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진정한 자유는 복잡한 곳에서 누리는 겁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릴 때

내방이 한없이 아늑한 공간이 되듯이 말입니다.


원망 거리, 골칫거리, 온갖 잡다한 문제들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건의 전천후를 보는 시야를 확보하고

Blame Game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삶의 질이 이전보다 훨씬 더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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