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이 1년 살아보기>
어느 날 친구는
“명현아, 나 코로나 끝나면
영국에서 1년 살아보기 해 볼 거야!” 하더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옴마, 나 영어 못하는데 어쩌지,
가서 적응 못하면 어쩌지,
코로나가 빨리 안 끝나면 어쩌지….” 등등
두려움에 쩔은 멘트들이 그 후로도
한참 계속됐습니다.
저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친구야, 먼저 두려움 없이 1년 살아보는 건 어때?”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 것 치고는
찌질한 면모가 참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려움’이 아닐까요.
이 지구 상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중력의 법칙처럼
두려움이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 값입니다.
안전한 엄마 뱃속에서 알 수 없는 세계로
나오기기가 두려워
태어날 때부터 쩌렁쩌렁한 울음으로
생을 시작하니까요.
유독 나만 쫄보라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단순히 겁을 먹거나,
“나 두려워”라 고백하는 차원을 너머
의외로 다양한 모양과 색깔로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예를 들어 드릴게요.
주위에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고
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증명되지 않은 내용들,
아재 개그 자학개그 등등 을 총망라한
묻지 마 화법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웃음기 없는 대화의 공백이 왠지 두렵습니다.
이제 좀 자려고 하면 온갖 잡생각이 나고
자꾸만 얼마 전 흑역사가 떠올라서
이불 킥을 하느라 잠을 설칩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말한 것에
필요 이상의 공신력을 주면서 다수가 말하는
‘카더라’를 믿습니다.
자신의 확신은 왠지 틀렸을까 봐
두렵습니다.
물건을 쌓아 두기만 하고 절대 못 버리는 사람은
옛 것에 대한 향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갑자기 변한 삶의 자리 때문에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진로를 바꾼 A양은 영 불안해 보입니다.
'내 인생도 괜찮지?'라고 물으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이전의 삶이 허송세월이었을까 봐
두렵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괜히 할 일을 만들고,
걱정거리를 만드는 게 습관인 사람이 있습니다.
분주하다고 해서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지만
일상의 내용물을 빼곡히 채우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L군은 여행을 가도 한 장소에 머무르며
차분히 음미할 줄 모르고 다음 스케줄을 생각하며
자리를 마무리하기에 바쁩니다.
여행과 경험의 최대치를 뽑아내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윽박지르거나
자기희생 적인 행동을 특기 삼아
그것으로 자식을 휘어잡는 부모가 있습니다.
자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광신도들은 교주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신이 벌을 내릴까 봐
두렵습니다.
눈치보기 아첨하기 그리고 알아서 줄 서기는
조직 생활의 주된 내용물입니다.
괜히 누군가의 눈 밖에 나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적극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으면
적개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왠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독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때 그 사람,
유독 내게 상처를 줬던 그때 그 인간은 실상
두려웠습니다.
누군가가 짜증 나게 구나요?
당신을 모함하나요?
괜히 시비를 거나요?
두려운가 봅니다..
당신은 조그만 것에 연연해 하나요?
일희일비 하나요?
두려우시군요.
의외로 삶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의 해결되지 못한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대충 좋은 말로 쓰인 심리학 책이나 강의는
약발이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죠.
답이 없는 고유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매번 상황이 우리를 휘감기 시작할 때면
동시에 내재된 두려움도 함께 고개를 치켜듭니다.
명목상은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띄지만
실상은 당사자들의 두려움들이 상충되어
서로 먼저 알아달라고
그리고 먼저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겁니다.
두려움은 우리 내면에 보이지 않게 상주하며
시도 때도 없이 ‘악감정’의 탈을 쓰고
주변인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두려움의 게이지가 높은 사람이 삶의 질이 낮을 확률이 높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두려움의 반대말인
“용기”, “자신감” 류의 추상명사 뒤에 숨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침착하게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 하는 사람이
진정한 용기와 자신감 있는 사람 이란 것을
잘 모릅니다..
강아지 산책 코스로 유명한
해변가 근처에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운동 삼아 친한 동생과 매일 산책을 나갔습니다.
알고 보니 동생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동물을 유독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목줄을 풀지 않는 매너를 지키는
견주들을 믿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매번 유독 겁에 질려하는 동생에게
강아지들이 살벌하게 짖어댔던 기억이 있습니다.
워낙에 동물을 좋아해서
‘아이 예뻐라~’하며 들이대는 저에게는
세상 유순한 강아지였지만
식겁을 하고 도망가려는 동생에게는
묶여있는 목줄이 무색하리만큼
매섭게 짖으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동생이 내뿜는 공포 에너지를 강아지들이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에게는
딱히 두려움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상에 대한 왜곡된 메시지가 날아올 때마다
의도적으로 거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공 들여 작성된 이메일도
보낸 출처가 모호하면
가차 없이 스팸 처리를 하듯이 말입니다.
매번 영양가 없는 이메일들을 일일이 열어
컴퓨터를 바이러스로 잠식시키는
우를 범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 무언가가 두려우신가요?
조용히 흘려보내 보세요.
그래도 자꾸만 두렵다면
떠내려 가고 있는 두려움을 오히려 자신이
다시 초청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누리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매일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하나씩 하라’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를 넘어서
‘두려워하는 일을 하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정신일까요?
다들 한 번쯤은 물에 빠져 보신 경험 있으신가요?
저도 어린 시절 물에 빠져본 경험이 있답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고 한참을 허우적대다가
물이 가슴까지 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민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수영선수 못지않은 수영 솜씨를 뽐냅니다. 수심 2M가 넘는 물속에도 잘만 뛰어드니까요.
두려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의 실체가 딱 걸리는 순간
만만한 존재가 됩니다.
매번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하고
비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테면 <00에 대한 두려움>,
< @@에 대한 두려움> 이렇게
하나하나
두려움에 명찰을 달아주며 친구 삼으면
이들은 나를 괴롭히는 폭군에서
정체를 들켜버린 힘없는 존재로 바뀝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은 매번 실제적인 현실에
눈을 가려 헛다리를 짚게 만듭니다.
‘슬럼프’, ‘힐링’ 이런 저 주파수 용 멘탈 용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슬럼프는 궁극적으로 도약하기 위해
잠시 움츠리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침체가 오래갈 것 같다’는 두려움을
붙잡는 순간 그 믿음은 장기간 현실이 됩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끄집어내 ‘내면에 있는 꾀병’이라 이름 붙인 이상화 선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세요.
"저는 슬럼프가 자기 내면에 있는 꾀병인 것 같아요. 마음속 어딘가 하기 싫은 구석이 있는데,
슬럼프라고 핑계 대면서 계속 안 하는 거죠.
저는 반대로 계속 도전했어요.
끊임없이. 혼자 야간 운동을 한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다음 경기에서 성적이 또 안 좋아요.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또 달렸어요.
또 안 좋아요.
그런데 아주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는 게 보여요.
아주 미세하게.
그런 변화는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 미세한 작은 발전을 토대로 달렸어요.
계속..."
힐링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한 동생은 매주 “힐링해야 한다”며 놀러 다닙니다.
그런데 힐링도 때에 따라 정도껏 해야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힐링만 하고 다닙니다.
곤란합니다.
힐링이란 자칫 너무 자주 사용하면
적절한 게으름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애매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알고 보니 동생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없습니다.
현실이 두렵기만 합니다.
저는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 등등
레전드급 기업들부터 이제 막 시작하려는
세계 각국의 창업 꿈나무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그들과 한 공간에 숨 쉬면서도
“나도 저 사람들처럼 훌륭한 창업가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하~안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고 있다고
피해의식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제 안에 있는 막연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늘 위태로웠던 유학생활과
좌절을 맛봤던 기억들이 똘똘 뭉쳐서
‘나는 못해’라는 신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남의 잘남’은 곧 ‘나의 못남’이었습니다.
저들이 멋지게 사는 만큼 왠지 나는
절대 못할 것만 같은..
막역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재산이 조 단위잖아..”
“저 사람은 하버드를 중퇴하고도
막대한 투자를 받았잖아…”
“저 사람은 스탠포드 출신 박사잖아….”
“그에 비해 나는 그냥 노동자야..
난 못할 것 같아.
옆에서 저런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내 부모도 아닌 내 친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말입니다.
너무하지 않나요?
매번 나의 못남과 무능함을
자신에게 납득시키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내 안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대단한 스펙과 배경을 운운할 때마다
그것이 주는 경외감과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불안과 좌절이 함께 반응했으니까요.
지금은 오히려 공격적으로 공부하며
창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한 나름의 쾌감은
또 다른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이것도 극복하고 싶고 저것도 극복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됩니다.
...
괜히 쓸데없는데 진을 빼고 살았다는 것을…
목줄 묶인 강아지가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구더기가 날 잡아먹을까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알게 된다”,
“세월이 지나야 안다” 류의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비슷한 류의 경험치를 더 쌓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해석입니다.
하루아침에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끝나는 게임이 아닌,
혹은 타고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훈련과 노력입니다.
비슷한 경험치를 쌓는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좋습니다.
두려움과 그것을 다루는 과정이 종합해서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성장을 맛보실 수 있으니까요.
평소에 제가 봐왔던 두려움의 횡포로부터 자유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1. 상대의 적극적인 호의가 없어도
“저 사람은 내가 싫은가 봐” 하며
호들갑 떨지 않는다.
2. “Here, I am (나 여기 있어)” 보다는
“There, you are (너, 거기 있구나)” 하는
대인배다.
3.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지 않고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4. 다 해결하고 다 이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5. 웬만하면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6. 억지 부리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
7. 감정의 근원을 넘나들기에 사소한 일들이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8. 남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은 뒷전이라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9.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따지는데
목숨 걸지 않는다.
10. 물질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관대하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제가 좋아하는 <창세기>의 스토리 중 하나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땅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두려움에 등 떠밀려 혼비백산하며
이리저리 계산하기보다
두려움을 마다하고 여유 있게 대처했네요.
여러분은 무엇이 두렵나요?
어떤 반응을 하고 있나요?
앞으로 1년은 두려움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볼까요?
그 후 여생은 관성의 법칙대로 하고요^^
“두려움은 현실을 가장한 거짓일 뿐입니다.”
-유대교 랍비 Rabbi Joseph Gelb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