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채끝살 너는 짜장라면 쟤는 너구리-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사람 때문에 짜증 나는
너를 위한 처방
<채끝살 짜파구리 삼위일체>
Uniformity
/유니포-미티/
무조건적인 획일성
Unity
/유-니티/
본연의 모습으로 자발적인 합을 이루는 것
진정한 채끝살 짜파구리는
자기 본연의 맛에 충실하기에 아름답습니다.
면발이 어설프게 고기 맛을 내려 덤비지 않고
고기 또한 면발처럼 여리고 가느다랗게 보이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Unity에 근간을 둔 다양성 (Diversity)은
특히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지역과 사회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인종, 나이, 성별, 종교에 상관없이
남들과 서로 다른 관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적극적으로 배웁니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문제에 입체적으로 접근하고
다른 차원의 해결책을 내놓지요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의 운영체계가 다른 것처럼
개개인의 삶의 운영체계도 각자 다릅니다.
그렇기에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지요.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자신의 모양과 색깔을 변형하면 본연의 아름다움이 퇴색됩니다.
내면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상대를 향해 나와 같기를 요구합니다.
주로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선호하지요
‘우리’ 속에 파묻혀 있는 ‘나’는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름을 종종 틀림이라 규정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저는 미국인들과 쉽게 동화하기 위해
힐러리 Hillary라는 영어 이름을 택했습니다.
제 본명인 ‘유명현’은 한국인조차 발음하기가
어렵습니다.
매번 외국인에게 틀린 발음을 고쳐 주며
통성명하는 것이 꽤나 번거로웠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나를 ‘현’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 이름이 더 아름답다고 하면서 말이죠.
본연의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기에 시야를
더 멀리 확보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합니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타인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개척해 나가는 강한 독립성과 자발성과
추진력을 갖습니다.
집단이 가진 강제성과 배타적인 우월감은
폭력이라 정의 내리고 가담하지 않거나
필요시 거칠게 저항하지요.
본인의 우월한 지위를 믿고 정신적, 감정적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그대로 하루아침에
지위를 잃기도 합니다.
물리적 폭력과 같은 선상에서 보기 때문이죠.
안전제일로 살고자 타협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로 여깁니다.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막상 살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게 아닐 때가 더 많다는 것
다들 겪어 보셨으리라 짐작합니다.
한국에 와서는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이질적인 정서와 개별적인 의사결정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제가 없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에 대해 ‘독특하다’라는 평으로 얼버무려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눈 밖에 나서 은근한 미움을 받을 때도
있고 심한 경우 면전에 모욕이 퍼부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개별적 자아로 존재하고
있다는 방증이라 생각합니다.
면발 속에 용해되지 않은 채끝살,
고유한 ‘유명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꿀 Tip!
<의외로 가족 문제가 힘든 이유>
살다 보면
가족 구성원만큼 이기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혈연관계라는 명목 하에 남들은 상상도 못 하는
서로의 밑바닥을 서슴없이 보이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지요.
이기심, 배신, 탐욕 등 부정적인 삶의 요소들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1차 집단입니다.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특수 집단입니다.
3자에게 호평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 작정하고
선심을 쓰면 되죠.
하지만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와 가족에게는
인정받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공을 들여야 할 사람은 먼 곳에 있지 않아요. 나의 가족과 매일 혹은 매주 만나는 나의
최측근들입니다.
하지만 주로 이들이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앗아갑니다.
일상의 만성 피로를 유발하는 장본인들이지요.
사사롭지만 성가신 것들이 미완성 인격에서 나온
단순한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든 온전히 나에게 맞춰지면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내 몸에 꼭 맞는 맞춤옷과 내 동선을
고려한 맞춤형 가구가 편하긴 하지만
사람의 문제는 다르답니다.
내 필요에 맞게 상대를 길들이려 하기보다
각자 타고난 성향과 역량의 고유함을
인정해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만약 피해를 끼치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면
외부 의도 움을 요청할 수 있지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골라 쓰는 것이야.”라는 드라마 명대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르고 고른 반려자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버려야 하는지
고쳐 써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는 때가 옵니다.
사람이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단순히 나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 짓지 못하고
나에게 최적화한 누군가가 되어주길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자기중심적 야망을 관계 속에서도 마구 휘두르는 격이죠.
상대를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판단하고 일방적으로 나와 동일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오만함과 철저한 이기심일 뿐입니다.
프랑스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의
명대사를 기억합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해….”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단입니다.
나의 논리와 이해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도
묵묵하게서 있는 것.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
반품하듯
상대를 내팽개치지 않는 것.
미움과 연민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도
애틋함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상처가 앙심이 되어 응징을 하다가도
마음을 고쳐먹는 것.
절대 ‘나’ 일 수 없는 상대의 한계를 알고
측은지심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사의 문제는 다양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일관됩니다.
진정한 관계란
나를 투영한 상대를 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와 같을 수 없는’
버거운 상대에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채끝살 짜파구리
삼위일체의
완전 조합이
빛을 발합니다..
세상이 다채롭고 아름다운 이유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
<나로 태어나 줘서 고마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