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나와 마음에게 안녕을
요 몇 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감정 기복을 바이탈 머신으로 볼 수 있다면 진동폭이 작았다가 커졌다가 반복하며 한없이 떨렸다가 뚜-하고 정지해버린 심박처럼 보였다가 정신없었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오전 9시 30분경, 회사 탕비실에서 네스프레소 머신에서 라테 마키아토 버튼을 꾸욱 누르고 따뜻한 우유 거품이 흘러나오는 것을 바라볼 땐 마음이 평온했다가 오후가 되니 마음이 한없이 요동치다 곤두박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종일 우울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나빠졌다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롤러코스터를 타다 곤두박질치는 것보다 땅굴에 머리를 집어넣고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게 나은 것일까.
자율적으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우리 회사는 금요일이 되면 특히나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 그 조용한 사무실에서 아침부터 나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보면 오후 3-4시쯤 잠깐 몸과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요즘은 특별한 일만 없다면 몸이 무거워지면 그대로, 다시 가벼워지면 그대로 몸의 무게를 느낀다.
물기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면 억지로 몸을 흔들어 깨우지 않고 잠시 쉬고, 몸이 가벼워지면 산책을 가든 헬스장을 가서 한껏 달리고 평소 쓰지 않던 기구들도 깔짝거려 본다.
일상에 큰 문제는 없다. 가족들도 평안하고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새 직장에서도 조금씩 적응해간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간간히 서글프다.
딱히 술, 담배가 고프지도 않고 좋은 날을 골라 여행 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다.
누군가는 무탈하고 불행한 일이 없다면 그것이 행복이라 했고 그게 공감 가는 시기가 분명 있었다.
허나 요새의 나는 그것에서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미주알고주알 오늘 있었던 사사로운 일과와 근원적 불안과 근래의 우울함을 여과 없이 말하고 싶지만 어쩐지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선 최소 두 톤은 올라간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러기 힘든 자리에서는 반대로 시선이 내려앉고 말은 입안에서 옴짝달싹 앞니를 톡톡 건드리기만 한다. 어떤 이와의 대화에선 '사람이 참으로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을 들어 입안에 있던 말이 스르르 녹아 위장으로 넘어간다.
아이패드에서 무심코 갤러리 앱을 열어 스크롤을 주룩주룩 올려다보았다. 언제 어떻게 연동시켰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가끔 기억에도 없는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과거의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이 사진마저 없었다면 한평생 기억해내지 못할 추억과 감정과 당시의 내가 담겨있다.
내 머릿속의 메모리는 용량이 턱없이 작고 그마저도 점점 성능이 다 해가는 것 같다.
매일 쌓이는 새로운 기억보다 더 많은 기억을 잃고 사는 건 아닐까 흠칫 무섭기까지 하다.
그러다 2017년 한 사진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는 나를 조금은 멀찍이 걷게 두고서 친구가 뒤돌아 보라 해서 찍어준 사진이었다.
그 덕에 사진에 내 전신과 그날 입은 옷과 표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슴팍보다 아래로 내려온 긴 머리와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가장 좋아했던 은색의 긴 귀걸이에 지금까지도 신고 다니는 워커 구두를 신은 내가 뒤돌아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옛날이지만 사진을 보면 그때 내 기분이 다시 살아난다. 2017년 2월 26일 오전 9시 26분 골목길을 걷고 있던 미스트는 굉장히 피곤했지만 그 순간 진심으로 즐거웠다. 행선지를 향하다 들어선 인적 드문 골목에서 생경한 Scene을 탐험(이라 쓰고 길 잃음이라 말한다)하다 급작스레 사진사를 청해줬던 친구와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사진 한 장 남겨보자며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던 자신이 웃겼다.
여하튼 그 사진이 좋은 건 내가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무려 5년 전이니 더 어리기도 했지만 민증상 나이와 내가 말하는 '예쁨'은 다르다. 진심으로 웃고 있는 내가 보기 좋았다. 그 순간 그 자리 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상황이 웃겨 투명하게 웃고 있던 내가 생각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쓰고 보니 나르시시스트들이나 쓸 법한 말 같지만 각자 그런 사진이나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조금 내가 괜찮아 보이는 날, 뒤돌아보니 내가 이런 때도 있었구나 왜 그때는 그리 좋았다는 걸 몰랐을까 싶은 시기.
외모로만 나의 아름다움을 점수 매긴다면 인생은 회한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세상은 그 비참한 길로 인간몰이를 멈추지 않는다. 그저 피부에 탄력이 조금 더 좋고, 화장이 잘 받고, 옷빨과 머릿빨이 잘 받아서 멋있어 보이는 것 말고 다른 정의의 아름다움을 조금 더 맹렬히 추구해야 한다.
내가 나여서 기특하고 나라는 인물이 투명하게 비쳐 보여 예뻐 보이는 섬광 같은 순간을 자주 찾고, 맞이해야 한다.
한참을 그 사진을 보고 나니 감정의 바이탈 머신이 조금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사회와 남들이 생각하는 미의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내가 바라본 나는 예뻤고 지금도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칭찬으로라도 예쁘다 못생겼다 입 밖으로 내기 조심스러운 요즘, 글로 한 번 나 예쁘다 소리를 뻔뻔하게 해 봤다.
2022년 6월 3일 오후 11:50분의 미스트는 조금 더 안정적이고 나를 예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의 글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