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을 느낀다. 나란 존재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나의 지난날들이 그 의미가 무색해지고 지금 이 순간이 매트릭스의 네오가 느끼던 허무함과 공허함의 연속인 듯한 날들.
그런 날은 하늘의 색이 어슴푸레한 붉은색에서 연파란색이 되고 검은색으로 바뀌는 모든 찰나마저도 잔인하고 의미 없이 느껴지고 내 시신경에 맺힌 상들은 그저 한낱 내 뇌의 화학작용에 지나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나라는 존재의 자그마함을 인정하기조차 버거워 그저 시선을 허공에 떨구고 머릿속을 비우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을 되새기는 찰나마저 나에겐 너무나 잔인하다.
그런 날은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슬픔도 기쁨도 허벅지에 스치는 책상 모서리의 아픔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누구에게도 아프다 말할 수조차 없다. 이런 날은 가슴이 메인다. 나이가 먹고 세월을 산 것이 무색하다 싶을 만큼 모든 상황에 초연하지 못한 내가 너무나 밉고 괴롭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저 삼켜낼 수밖에 없다. 내가 머무는 이 깨끗하고 작은 사무실에 모든 천장의 등들이 소등되기만을 기다리는 이 순간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내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그 작고도 큰 야망은 나의 척수뒤로 숨어버리고 나는 그저 32인치 두 모니터와 노트북 디스플레이 앞에 앉아 서울시내를 바라보는 천몇 만군중의 1인이 된다. 오늘 저녁은 직장인근의 중국집이었다.
어느 누가 감추기 힘든 것은 가난, 사랑, 재채기라고 했던가. 나는 아무리 꽁꽁 붕대로 싸매려 했지만 나의 서글픔은 스멀스멀 나의 눈매 끝과 손끝 사이로 흘러갔나 보다. 툭치면 으르렁 화가 쏟기고 동시에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릴 듯한 미묘한 감정이 하루를 지배할 정도가 되자 직장 동료들은 그만 무게감을 느껴라 저녁을 권했다. 먹는다는 행위는 가끔 놀랍다. 기네스북에는 382일 단식한 사람이 등재되어 있다. 이처럼 사람은 자그마치 1년을 단식을 하고도(물론 그 사람은 기존에 높은 체지방률을 기록하던 사람이었지만) 살아있지만, 누군가 음식을 나눈다는 행위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밥 한번 먹자', '밥 먹었어?', '점심 잘 챙겨 먹어', '저녁 먹었어?' 이 공허하고 투박한 말들은 그런 말로라도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고 안부를 묻고 싶은 다정함이 묻어나 있다.
생애 가장 살을 급격하게 빨리 뺀 시절이 있다면 하루를 사과 3개, 고구마 3개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아침, 점심, 저녁을 각각 사과, 고구마 1개씩으로 버텼고 누군가 밥이라고 먹을래 묻는 날이면 그 계획이 허물어질까 고민했다. 얼마나 치기 어리고 어리석은 시절인가. 나는 그 다정함이 얼마나 귀한 줄도 모르고 나의 체지방율과 그 마음을 저울질했다. 나는 어떤 면에서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을 흘러 보내고 나는 다시 야금야금 맛 좋은 음식들을 먹고 그 시간을 즐기며 체지방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오늘 같은 날에는 그저 '네, 가시죠'라는 말로 응대하게 된다. 시신경에 맺히는 수많은 식당들이 무의미하고 그저 '네'를 반복하며 들어간 중국집에서 다시 한번 '네'를 반복하게 메뉴를 주문하게 된다. 그렇게 선택된 저녁메뉴는 깐풍기와 진로이다. 직장 동료들이 나름대로 나의 고충을 추측하며 건네는 말들을 듣노라면 여러 생각이 스쳐간다. 나의 연약함을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나의 불완전함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없는 순간들의 서글픔을 무어라 표현할까. 그 마음마저 이들에게 부담일 것 같아 어수룩한 이유들로 에둘러 표현하는 표현들이 이들에게 또 다른 무례함은 아닌가, 나라는 인간에 대한 가면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스치고 나면 소주는 반 병, 한 병을 비우게 된다. 10대 시절 나의 20대와 30대를 그리며 상상하던 모습들이 있다. 놀랍도록 다른 현재 모습에 회의감보단 겸허함을 느끼지만 가끔은 그런 마음이 든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나의 마음은 왜 이토록 여전히 연약하고 서투른 것일까. 강인하고 능수능란한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만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은 하염없이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비운 오늘의 깐풍기와 진로는 달달하고 씁쓸하며 든든했다. 초등학교 도덕책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힘든 순간을 태엽시계처럼 감아버린 한 아이가 어느 순간 노파가 되어 시간을 속절없이 보내버림을 후회하고 그 순간 잠에 깨어 매 순간을 쉽든 어렵든 소중히 보낼 것을 다짐하는 이야기.
가끔 그 짧은 소설을 떠올린다. 지금이 아무리 마음 아프고 씁쓸하더라고 이 순간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 16.5도 알코올 농도 진로를 고스란히 혀끝에서 목구멍 깊은 곳까지 느끼며 삼키고,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나는 더 씁쓸한 이야기도 담을 만한 조금 더 넓은 종지가 되어 있진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날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느끼며 길을 걷는다. 이 또한 괜찮을 것이다. 괜찮다. 앞 날은 모르지만 이 순간마저 괜찮다. 힘을 내어도 힘을 내지 못해도 괜찮다. 그렇게 하루, 이틀보내고 평정심을 찾으면, 깐풍기보다 더 달달한 날들도 올 것이고 소주 한 잔보다 더 씁쓸한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며 웃음으로 흘려보낼 날도 올 것이다. 괜찮다. 그렇게 오늘을 달래며 오늘의 어둠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