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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May 29. 2023

[단편] 이 날짜의 추억을 돌아보세요

 상상합니다. 이토록 어그러진 욕망을.

'이 날짜의 추억을 돌아보세요'.

Y가 눈을 떠보니 OneDrive 알람이 떠있다.

평소 같으면 오른쪽으로 넘겨 지워버릴 알람이지만 무심결에 클릭해 버렸다.

그렇게 확인한 이 날짜의 추억은 '힘들진 않아?'라고 메시지가 온 휴대폰 배경화면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근 5-6년 전에 저장된 사진이라 의도적으로 캡처한 것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알람을 확인하려던 중에 화면 캡처 단축키가 눌려 저장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연락을 받았던 걸까 Y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메시지를 보냈던 P가 스쳤다.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여러 생각이 스쳤다.


왜 하필 오늘이야.


전날 Y의 하루는 악질이었다. 오전부터 날이 제대로 꼬였다. 당장 모레부터 시작되는 연휴 전에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있건만, 담당자는 업무 메시지에 답장이 없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뭐 하는 거냐 메신저로 한마디 하려는 것을 진정하고 관계자들을 모조리 메일 참조로 집어넣어 메일을 쓰고 정리했다.

진정하자 마음먹고 점심쯔음 나왔더니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묵직한 공기 탓에 한껏 말아놓은 머리칼이 무거워졌다.

한 번 들르리다 벼르던 카페에서 시켜본 커피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맛있는 저녁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을 위해 미리 사 둔 꼬까옷을 입고 출근했다.

그런데 약속시간 1시간 30분 전에 약속이 파토났다. 기존 일정을 조정해 겨우 짬을 내 만든 약속이었는데, 더군다나 이유가 오늘 자동차를 쓸 수 없어서라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차라리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지.

다시 업무모드로 돌아와 오늘을 위해 미뤄놨던 일을 당겨했지만 효율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있다 집에 오는 길을 걷는 데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취객과 어깨를 부딪혔다. 몸에서 풍기는 알코올 냄새만으로도 순간 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만취한 상태여서 종종걸음으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고 얼굴을 보는 데 기분이 영 아니다. 오랜만에 집어 올린 속눈썹이 아까울 지경이다. 이를 앙 다물고 자리에 누우니 천장에 매달린 시스템 에어컨이 머리맡으로 당장 떨어질 것만 같다. 아니 천장, 이 윗 층의 천장들이 우르르 건드려진 도미노마냥 연쇄적으로 떨어져 Y를 깔아뭉갤 것만 같다.


차라리 잠으로 도피하자 마음먹고 자고 일어난 것이 오늘이었다.

5-6년 전 오늘 날짜가 오늘이었다면 힘들어 죽겠으니 와줄 수 있느냐 징징거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Y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요즘은 안전상의 이유로 건물 옥상을 폐쇄시켜 놓는 경우도 있다만, 이 집 옥상은 개방된 공간이었다. 이 집을 처음 소개받을 때 부동산 중개인은 이 공간이 아주 큰 메리트인 양 괜찮다는 Y를 굳이 옥상으로 이끌고 가 옥상 난간에 Y를 세워 보였다.

건너 건물에는 담배 피우러 올라온 직장인들이 한껏 찌푸린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일부는 전자담배를, 일부는 연초를 피워대고 있었다. 허리춤정도에 오는 난간에 기대있자니 Y는 폴짝 건너뛰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Y에겐 몇 가지 괴이한 욕망이랄지가 있었다.


그중 몇 가지만 꼽자면

아주 잘 정리되어 있는 크리스탈잔, 식기, 커트러리 디스플레이를 보면 와르르 옆으로 밀어뜨리고 싶다거나,

밤길 한적한 도로가 있으면 그 한가운데에 서있고 싶다거나,

어깨를 스칠 정도의 길고 풍성한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지나가면 그 안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어 뒤로 당기고 싶었고,

Y의 취향인 여자가 지나가면 그 여자를 울리고 싶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실제로 행한 적도, 그럴 계획도 없었다.

다만 이런 말을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공유하고 키득거리고 나면 그로써 해소가 되었다.


힘들지 않냐 메시지로 안부를 물었던 P는 그중 하나였다.

Y가 비사회적 상상들을 말하면 P는 굉장히 황당한 표정으로 잠깐 Y를 응시하다 헛웃음을 터뜨렸으나

결코 그 생각을 비난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간혹 조금 더 괴팍한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그런 상상은 자기에게만 털어놓는 게 좋겠다고 Y에게 당부하였다.


Y는 더 이상 자신의 정신 나간 욕망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다이어리에 조금씩 휘갈기며 자위를 할 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도 자기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시 방 안 침대로 돌아와 누운 Y는

순간 숨이 막혀 잠옷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다시 한번 사진 속 메시지를 보고 휴대폰을 끌어안았다.

잠들고 싶었다.

꿈에서라도 마음 아프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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