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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Apr 03. 2024

제목: 미상

휘갈겨 쓰인 글

체감될 정도로 날이 따뜻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도 그리 차갑지 않은 공기가 스쳐간다. 아침바람이 이 정도면 긴 팔을 입고 나갔다가 한낮에는 살짝 덥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혹시 몰라 긴 팔 외투를 챙겨나가선 사무실에서도 외투를 입었다 벗었다 한다. 벌써 4월이다. 올해가 왔다는 것도 적응되지 않은 찰나에 벌써 1사 분기가 지나버렸으니, 2024라는 단어가 익숙해질 즈음에는 또 한 번 연말을 보내야 할 판이다.


내가 익숙지 않다고 해서 시간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또다시 이사를 해야 할 시점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직장마저 이직준비를 하게 되었다.

무엇하나 수월하게 넘어가는 과정이 없었다. 이사를 하는 날에도 짐을 빼지 않겠다는 기존 세입자(정확히는 기존 세입자의 어머니)때문에 나의 작고 소중한 살림세간들이 오피스텔 복도를 한가득 메운 채로 몇 시간을 방치되어 있어야 했다. 와중에 오가는 고성과 욕설에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게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온갖 푸닥거리는 다 치르고서야 짐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중개인에게서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미 어느 컨테이너로 짐들을 옮겨놓아야 하나, 어디 비즈니스호텔이라도 잡아야 하나 검색창만 몇 번이고 들락날락거린 나의 마음은 복도에 내 놓인 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한밤중에야 짐정리를 시작하는 데 어쩐지 마음이 울컥해서 그저 누구라도 마음껏 미워하고 싶었다.

이직하는 과정도 지난하기 짝이 없었다. 착착 절차들이 진행되어 지인에게 돌려들은 바에 의하면 형식적인 절차일뿐인 다름없는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러고서 감감무소식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긴 했다만 속시원이 이번엔 잘 안되게 되었다 퇴짜라도 빨리 맞았으면 다른 곳으로 이직을 준비하면서 주변 정리를 했겠건만,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마음만 싱숭생숭한 채 몇 주가 그냥 지나버렸다.

와중에 하고 있는 회사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알량한 포부를 품고 진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들에서도 온전히 역량을 내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과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하루에도 몇 번을 지나치고 그러다 잠시 이를 잊을만한 일이 생기면 한참을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들다 잠시 수면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푸아'하고 다시금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수면밖으로 나왔던 찰나마저 죄책감이 들어 수면밑으로 더 깊게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똑딱똑딱 초침이 지나고 분침이 지나고 시침이 지나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 지금 이 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사를 하고 집에 큰 조명을 들여놓았다. 온 집을 밝히고 있기에 부족하지만 창백하고 정 없는 형광등을 켜둔 것보다 영 마음이 좋았다. 집에 있던 작은 조명과 새 세간인 큰 조명을 켜고 나니 집안 조금 더 많은 곳을 따뜻한 전구색으로 덮을 수 있었고 딱 고만큼 마음 한구석이 밝혀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목숨 걸고 치열하게 해라, 열심히 살아라 채찍질하는 말만 하던 어느 분의 말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데, 나도 내 딴에는 멈추지 않고 걷고 뛰고 돌부리에 넘어질라다 다시 균형을 잡으며 꺼져가는 기운도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디 하나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을 원망할 틈도 없었다. 그럴라치면 다리에 힘이 풀려 가던 길도 못 가게 되니 마음이 아프면 아픈데로 참으며 걷고 기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마음을 누르며 걸어야 했다. 이 복잡한 현실과 알지 못할 미래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는다는 건 또 다른 사치였다. 이러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면 그때는 그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리 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다 보니 온화하고 여유 있는 모습의 나를 그리며 동경하며 살게 되었다.

나는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누군가에게 받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쨍하니 튀진 않아도 언제 봐도 피로감이 없는 편안한 색을 가진 사람이 되리라. 아직은 그림속 나인 것 같다.

여전히 일상은 일을 해내기 바쁘고, 차분하고, 고독하고, 긍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즐겁고, 우울하고, 넘어질 듯 다시 일어나는 나날의 연속이다. 내가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나 또한 느끼며 그저 나의 할 일들을 해나가는 것뿐이다. 아직은 온 길보다 가야 할 길이 멀고 갖춰야 할 것이 많으니 속도가 떨어지지 않게 유의하며 발걸음의 몇 발치 앞을 보며 가야 한다.


오늘은 글의 제목과 소제목을 정하기 너무 어려웠다.

그저 그런 날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주절주절 속내를 터놓고 싶은 흐리고 따뜻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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