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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연 Aug 23. 2024

너희 모두의 이름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짜로 운명이 존재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해온 남자친구 같은 이가 여럿 있다. 부모님의 소개로 바닥을 기어다닐 때 그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아무래도 많은 걸 할 수 없다 보니 항상 그들이 가진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전해 듣곤 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응시하는 애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기 얘기를 마음껏 하는 애들만큼 꾸미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조용하고 소극적인 애들일수록 더욱 화려했고 오버 사이즈 스웨터에 와이드한 바지, 메탈릭 소재의 디자인까지 그 시절 멋쟁이들은 다 두르고 다닐법한 멋있는 옷을 걸쳤다. 그런 애들은 눈으로 들어오는 비주얼이 직관적이었고 굳이 엄마를 거치지 않아도 되어 편리했다. 내 마음대로 상상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 얼마나 자주 붙어있었는지 말문이 트이지도 않았을 무렵 벌써 누가 누군지 구별이 가능했고 엄마가 ‘000 찾아봐~’했을땐 서투른 옹알이로 ‘응’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그들을 기가 막히게 구별해냈다. 엄마는 내가 이때 천재인 줄 알았단다. 내가 점점 커가면서 나에게 안녕을 고하는 이도 있었고, 동시에 새로 들어오는 이도 있었다. 물론 나를 거친 후 동생과 함께하면서 우리 집에 끝까지 남아있는 이들도 있었다. 거기다 ‘정보회사’ 같은 곳에서 마음에 드는 이를 직접 골라 우리 집까지 데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데려온 이들은 2주가 지나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줘야 했다.


   그들은 항상 나보다 더 성숙했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성인 남성의 통과의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애도 있었고, 유대인이 달았던 노란 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나의 눈물샘에서 눈물이 흐르길 기대하는 이도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그들을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했다. 개중에는 항상 패셔너블하게 입고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기거나 자극적인 말을 해대어 나와 동생의 시선을 끄는 이들도 있었는데, 부모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들은 일요일에만 만나게 하셨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나는 누구라도 잠시 멈춰 설 만큼 옷을 멋지게 입은 이들보다는 정갈하게 차려입고 자기가 가진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나가는 이들을 더 좋아했다.


  중학교 때의 우리는 제일 뜨거웠고, 강렬했다. 나는 아직도 그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 제일 친했던 친구도 자기만의 ‘그들’을 사랑했고, 나도 내 ‘그들’을 사랑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들’을 빌려주었고, 서로의 ‘그들’에게서 많은 걸 배워갔다. 그리고 나는 친구의 ‘그들’ 취향에 그만 물들어버렸다. 지금까지도 그 샛노랗게 선명한 취향에 물든 자국은 빠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아직도 정보회사에서 그들을 고를 때면 늘 친구의 취향으로 그들을 고르곤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랑에는 권태기가 있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나는 모든 학업에 근본으로 불리는 시험의 이름을 가진 이와 바람을 피우게 된다. 나는 새롭게 생긴 그 이가 죽을만큼 싫어도 무조건 고등학생이 끝날 때까지 그 이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보니 원래 있던 ‘그들’과는 당연히 교류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일부러 그들을 자로 잰 듯, 딱딱하게 사무적으로 대했다. 생기부에 필요한 애들만 불러 지식을 듣고 휙 내팽겨치는, 그야말로 감정적 교류라고는 1도 없는 교류를 했다. 내 미래를 위해 새로운 그 이에게 헌신했으나, 내가 그린 아름다운 미래는 거대한 먹구름에 가린 듯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가위로 싹둑 잘린 듯한 현실에 나는 갑자기 너희가 생각이 났다. 아무런 길도 찾을 수 없었기에 너희가 가지고 있던 지식을 더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3의 어느 지점에서 금단현상이라도 온 듯  미친 듯이 너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미친 듯이 너희가 품어온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들은 당장 새로운 그 이에게 헌신하지 못하겠냐고 나를 나무랐지만, 나는 새로운 그 이에 대해서는 그만 잊어버리고 싶었다. 어찌보면 도피성이지만, 나는 너희를 찾았다.


   새로운 그 이와의 관계가 모두 끝나고, 나도 그 이도 서로 질릴대로 질렸을 무렵, 나는 고3때 잠깐 너희를 찾았을 뿐 또 스마트폰에 정신이 뺏겨버렸다. 지하철 타고 갈 때 만이라도 너희의 이야기를 들어야지, 하고 화면 속의 너희를 보려고 하면 금방 또 나무토막처럼 짧은 집중력으로 SNS아이콘을 누르곤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1년이 지나갔고 나는 내가 멍청해짐을 느낀다. 게임슬롯을 당기듯 유튜브를 끊임없이 새로고침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같았다. 어렸을 때 그렇게 글 잘 쓴다고 칭찬받고 상 받고 했었는데, 왠지 지금의 내 모습을 과거의 나에게 소개해보라 하면 망설이다가 등 뒤로 숨길 것만 같았다. 나는 너희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나는 다시 한 발짝 다가가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데, 너희는 내가 언제 너희에게 등을 졌냐는 듯 한 번 씩 웃곤 손을 내밀었다.


  너희와 다시 친해진 이후에는 정보회사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렇게 꼬박꼬박 가서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그 이’,‘내가 좋아하는 조물주가 만든 그 이’를 생각하면, 어느 순간 마법처럼 그 이를 만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그 이를 데려와 내 눈 앞에 앉힐때도 있었고, 조용히 앉아있는 그 이를 서가를 구경하다 우연히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낸 ‘그 이’는 아직까지 실패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짜로 운명이 존재하나?’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들이 알려주는, 별가루를 가득 뿌린 듯한 문장에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한껏 채워 넣은 문장은 한 번만 읽을 수 없다. 읽고 또 읽고, 그 반복을 즐기며 가슴과 머리가 찡해지는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팅커벨의 요정 가루가 내 몸에 묻은 듯, 하늘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다. 이러한 느낌을 강렬하게 준 이가 있으면, 나는 바로 우리 집에 그 이를 데려온다. 물론 직접 사서 데려온다. 너희는 모두가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같다. 너희 모두의 이름은 ‘책’이다. 앞으로 너희를 내 인생에서 떼놓는 일은 없을 것이고, 외롭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고요히, 내 곁을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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