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던 시절은 지났지만

여전히 소중한 지금을 위하여

by 옆집여동생

언젠가 ‘나혼자 산다’에서 기안84가 복학왕 연재를 마무리하는 이유에 대해, 가장 뜨거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20대의 우기명을 그리기에는 이미 차가워져버린 자신이 역부족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나에게도 그 시절은 무용담처럼 기억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모여 앉아 캔맥주 한 잔에 우린 나중에 도대체 뭐가 될까, 매번 똑같은 얘기에도 마냥 즐거웠던 신촌 자취방
장대비 내리던 여름, 어렵게 구한 공개방송 티켓을 손에 꼭 쥐고 떨리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던 여의도역 3번 출구
3차에 걸친 면접 끝에 이제 됐다고, 거의 다 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 도착한 문자 하나에 온 세상이 무너졌던 어느 하루
새해부터 외롭다고 모여서 마포대교 위를 걸으며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를 목놓아 부르던, 그렇게 춥지만은 않았던 겨울밤



뭐든 정해진 것 없어서 기쁘고, 슬프고, 또 뜨거웠던 그 시절은 이제 굳이 떠올려 볼 때나 재생되는 해상도 낮은 영상처럼 마음 한 구석에 쌓여져 있다.


지금도 내 삶에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선택과 포기를 거쳐 이제 어느 정도는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함께 어디에 사는 사람'이라는 큰 테두리가 잡혔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는 나의 지금에 대해 나름대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나간 시절의 나에게 느끼는 질투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침에 세상 가장 밑바닥이었다가도 오후에 가슴 터지도록 행복할 수 있었던, 그렇게 펄떡이듯 살아있는 감정들은 모든 생활이 루틴의 영역으로 들어온 요즘엔 좀처럼 느끼기가 어렵다. 선택지가 무한대인 삶에서 느끼는 폭풍 같은 감정을 이미 한쪽 길로 접어든 삶에서의 소소한 희노애락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람은 참 가지지 못한 것을 항상 갈망하는 존재가 확실하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 꿈꾸던 나는 바로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까. 안정적인 직장에서 오는 소속감, 서로를 믿어주는 배우자로 인한 안정감, 때때로 취미를 즐기며 아주 풍족하지는 않아도 나름의 여유를 누리는 일상. 근데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마치 누구에게 진 것 같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걸까.


어쩌면 모든 것을 같은 저울에 놓고 비교하려는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성향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나때만 해도 키 순서대로 앉은 학생들의 성적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또한 순서대로 공개되어 있었다. 나는 내 짝꿍이 우리 반에서 키가 x번째로 크고 뒤에서 x등인 친구인지는 알았지만, 장사에 소질이 있어서 사업가로 대성할 줄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를 그냥 그대로 잠시 바라본다.


그때보다 활기차지 않은 내가 아닌, 차분함도 누릴 줄 알게 된 나를.


그때보다 즐겁지 않은 내가 아닌, 여러 모양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 나를.


그때보다 예쁘지 않은 내가 아닌, 웃는 표정이 더 자연스러워진 나를.



모든 시절에는 이유가 있다. 조금은 단조로워진 지금의 삶도 아마 뜨거움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지나간 계절의 반짝임처럼 잘 드러나진 않는다 하더라도 천천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발견해 나가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모르는 내일에 밤새 설레고 상처 투성이어도 조금씩 더 단단해졌던, 어쩌면 지금의 나를 꿈꾸며 살았을 그때의 나에게, 샘날 정도로 그 시절을 잘 살아줘서 참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