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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옆집여동생 Jan 31. 2018

조용히 당신만을 위해, 캄테크

[IT인문학] #2 캄테크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신기술이 뉴스를 가득 메우는 요즘, IT 서비스 기획자로서 누구보다 새로운 기술들을 많이 알아야 하지만 가끔씩은 이 요란함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 종일 울려대는 SNS 알림 소리와, 증명서 하나라도 뽑으려면 받아야 하는 수많은 인증절차, 점심시간을 가득 채운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관련 이야기들. 인간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탄생한 많은 기술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 바로 ‘캄테크’다. 


캄테크는 조용하다는 의미의 calm과 기술을 뜻하는 technology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조용하게 있다가 사용자가 꼭 필요할 때 부담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 기술을 뜻한다. 주로 센서나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해 수집된 사용자의 특정 행동이나 상황을 기반으로, 적절한 시점에 제품을 제어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의 서비스를 말한다. 캄테크라는 단어를 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캄테크가 적용된 제품과 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해가 진 후 집에 돌아오면 자동으로 켜지는 현관등이나,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데 할인 쿠폰이 있을 때만 앱에서 알려주는 것도 캄테크의 일종이다. 전등이 켜지거나 앱에서 알림을 보내는 건 별다른 기술이 아니지만, 평소엔 잠잠하다가 꼭 필요할 때만 살짝 알려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조용한, 하지만 사려 깊은”


신촌에 있는 한 쌀국수집에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 가게는 조금 특이하게도 손님들에게 ‘조용히’ 식당을 이용할 것을 공지문을 통해 대놓고 부탁하는 집이었는데, 처음엔 무슨 컨셉인지 갸웃했으나 식당을 나올 때쯤엔 충분히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메뉴 자판기에서 원하는 음식을 선택해서 결제하고 가게에 들어가 영수증을 직원분에게 건넨다. 자리에 앉아서 앞쪽 선반을 열어보면 젓가락과 소스 그릇이 있고, 위쪽 선반을 올려다보면 필요한 소스와 휴지, 머리끈이 있다. 국물 요리를 먹을 때 긴 머리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국물이 모자라서 살짝 그릇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 가운데 조리대에서 지켜보고 있던 셰프가 조용히 국물을 더 채워준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며, 정신없는 신촌 한가운데서 오롯이 점심 한 끼를 차분히 만끽할 수 있는 곳. (식당 홍보는 절대 아니다) 요란하지 않아도 잘 대접받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사실 캄테크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조용한 것을 넘어서,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을 때 빼고는 존재 조차 까먹을 정도로 삶의 전면에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모토로 한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늘 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우리 조상들에게도 아주 매력적인 주제였던 것 같다. 민화로 전해 내려오는 우렁각시 이야기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고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총각에게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우연히 데리고 간 우렁이 한 마리가 각시로 변해서 몰래 따뜻한 밥도 차려놓고, 집도 깨끗이 청소해 놓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이 민화의 엔딩은 부당한 관원의 간섭으로 슬프게 끝났지만,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거나 지칠 때, 조용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해주는 우렁각시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오래된 우렁각시”


떠올려 보니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대학에 가면서 자취를 시작하고, 또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보니 집 안에서 내가 직접 해야 할 일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 전에는 집에 가면 항상 밥솥에 밥이 가득했고, 어제 입었던 땀 흘린 티셔츠는 깨끗이 빨아져 서랍에 정리되어 있었다. 공과금을 직접 낼 필요도 없었고, 학교 가기 전에는 라디오를 틀어서 깨워주고 주말에는 좀 더 푹 잘 수 있게 방 문을 닫아주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런 일들이 가능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자신의 헌신을 별 것 아닌 듯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크게 갖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참 철이 없는 딸이었다.


IoT 서비스 기획을 할 때 가끔, 단순히 편리한 기능이 무엇일까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서비스라는 생각을 하면, 좀 더 따뜻한 발상이 가능해진다. 누군가를 아침에 깨울 때, 단순히 휴대폰 알림이나 TV를 켜는 등의 기능적인 접근에서 한 발 나아가, 어떤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면 힘든 아침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한 번에 깨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을 더 고민하게 된다. 캄테크도 그런 차원에서 발생된 개념이 아닐까?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꼭 필요할 때만 얼굴을 드러내는, 요란하지 않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마움이 느껴지는 그런 기술 말이다.




캄테크는 아주 어렵거나 특별한 기술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배려가 참 고마운, 온기가 느껴지는 기술이다. 늘 존재감을 과시하진 않더라도,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가 당신에게도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는가. 남은 한 해도 당신의 조용한 배려가 주위를 좀 더 훈훈하게 만드는, 감사한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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