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그 동아리 기모임도 안 갈 거야.
이제 그 오빠 볼 필요 없으니까."
“그 사람이 연락 오면 어쩔 건데”
“절대 연락 올리가 없으니까.”
그냥 그 사람은 내가 자존감이 낮았을 때, 불꽃처럼 화학반응이 일어난 거야. 동경에 대한 생각과 함께.
그는 내가 편하기만 한 게 아니라고 했다.
“넌 나 어떻게 생각해?”
“편해”
“너는 내가 그냥 편해? 나도 네가 편하긴 한데.. 사람들은 누구나 널 편하게 여길 것 같긴 해. 근데 난 마냥 편하진 않아.” “나는 내가 안 좋아하면 안 사귀는데”
‘나는 안 좋아해도 사귈 수 있는데. 사귀면서 알아가는 거잖아. 썸은 알아가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과정이고’
“인류애랑은 다르잖아.”
“… 그지”
아무 말 없이 한 정거장 정도를 더 걸었다.
그동안 날 스쳐간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다시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이미 저만치 떠내려간 조각배들. 세월이라는 물살 앞에 넋을 놓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많은 것들이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후였다. 붙잡기에는 늦어버린 것이다. 놓아버릴 때는 모른다. 그것을 놓아버리면 그것들은 넓은 바다로 흘러가버려 다른 것들과 뒤섞여 버린다는 것을. 한 때 내 안에 있었던 것은 다른 농도에 희석되어 생경한 것이 되어버리고, 두 발을 담근 물살은 이미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는 것이다.
공백기가 있었다. 입을 꾹 닫은 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머금었던 벽난로 안에는 미처 식지 못한 열들이 있다. 다시 타오르리라 실낱같이 연약한 희망을 가지고 나무조각 몇 개를 던져보기도 하고 애먼 부지깽이로 쑤셔보기도 했다.
이사 온 지 이틀째 집 앞에서 내 번호를 물어본 사람은 날 한 번만 보고서, 이번 주말에 뭐하는지, 누구랑 가는지, 어디 가는지를 속속들이 캐내는 바람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 뭘 그런 걸 묻냐고 했다. 그러니 바로 다음날 그는 나를 다시 아무것도 없는 기본 프로필로 바꿔놓았다. 굳이 차단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기에 숨김처리만 했다. '이번 주말에 뭐 하기는요. 다른 남자랑 노는구나 하면 되죠.' 때로는 모른 채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교에 나와 로스쿨을 다니고 있는 남자는 소개팅 후 s대 구경을 시켜주었다. 지대가 높은 곳의 옥상에서 그는 나에게 원래 이 앞 건물이 없었을 때, 자신이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만 해도 여기서 여의도 불꽃 축제가 보였다고 했다. 두 번째 만남에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묻길래,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손을 잡지 않는다고 했다. 혼자 성급해 보여서 재미가 없어져 그다음 만남을 잡으려는 그에게 바쁘다고 했다. 그래도 그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 나름대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명문대 라는 것은 고등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해서, 고등학생 때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절히 바라던 나의 10년 전의 순수함과 미지의 것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뒤섞여 나에게 또한 오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인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 사이의 간격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인지 확신할 수 없는 오랜만의 감정이.
바에서 만난 사람은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만남 때 그다음 연휴에 같이 근교 여행을 가자고 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당일치기는 안될 것 같은데, 라고 하니, 자기가 연락해 보겠다고 하더니, 지금 손님이 없어서 6명에서 같이 쓰는 방 하나에 둘이서 자던지 2인 1실인 여자방, 남자방을 하나씩 잡고 2인 가격을 내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전자가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부담스러우면 그냥 다른 곳에 가도 된다고 했다. 이렇게 빨리 알아보는 그가 웃겼다. 그냥 뭔가 그 상황이 웃겼다. 저 남자가 웃긴 걸까. 아니다. 이렇게 남자가 있을 곳이라는 곳은 다 찾아다니며 남자를 만나는데 하나같이 나사가 풀린 것 같은 사람만 만나는 나 자신이 웃긴 건가. 나의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삶이 한동안 계속된 데에는 그 때 읽었던 쿤데라의 마지막 책의 영향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클럽에서 만난 남자는 월요일 연락 때 목요일에 만나기로 하고 시간은 언제가 좋냐는 물음에 사라지지 않는 1이라는 암묵적 거절을 하고는 목요일 밤 10시에 지금 나올 수 있냐고 카톡이 왔다. '미리 말해주지. 지금 막 씻고 나왔는데. 다음 기회에' 라고 보냈다. 물론 그 이후 연락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들을 다 거르고 다니, 선우였다. 그도 혼자였고, 나도 혼자였다. 합정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바로 옆에서 별생각 없이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졌다. 낯선 곳에 홀로 터전을 잡으면 카페에서 옆 사람이 내가 읽은 소설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는 척을 하게 된다. “다자이 오사무 좋아하세요? 상수에 인간실격이라는 바 있는데, 아세요?” 그렇게 막 점심이 지날 때쯤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괜찮아 보이는 일식집에 캐치테이블로 웨이팅을 걸어놓았다. 매장의 크기와 허기의 정도를 고려하였을 때 7번째 정도는 기다릴 만했다. 합정 산책을 하고, 저녁을 먹고 합정 구석구석을 산책했다.
“아까 저기 싸우는 커플 있었어요.”
“편의점에서 팝콘 하나 사서 다시 갈까요”
“저번에 저 혼자 카페 갔을 때 옆에 엄청 심하게 싸우는 커플 있었어요.”
“그럴 때 들어야 하는데”
“바로 노이즈 캔슬링 끄고, 반대쪽 이어폰 뺐죠”
꼭 그여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계속 만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다른 남자들과 다른 유일한 점은, 딱히 헤어져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점이 하나도 없다. 그냥 내 일상을 흐트러지게 만들지도 않으며, 모든 일상이 예측이 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친구들은 3차에 가도 다음 날 피곤하다고 2차가 끝나고 11시 20분쯤에 들어온다.
'왜 더 놀지ㅋㅋ'
'내일 피곤할까 봐 ㅎㅎ'
이미 흘러간 것들은 다시 붙잡을 수 없으니, 지금 내 앞에 손을 내미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흘러가야 하는 걸까. 눈에 띄는 배는 아니지만 가라앉거나 구멍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너 혼자 갈 수 있는 거 알아. 그래도 같이 가면 덜 지루하지 않을까.”
“애 낳는 거는 여자 쪽 의견에 무게를 좀 더 둬야 한다고 생각해.”
“추석에 해외여행 가는 거 좋은데? 우리 집은 초등학생 이후로 제사 같은 거 안 지냈어.”
지하철에서 그가 나를 안을 때는 영화 해운대에서 딸을 잃고 싶지 않은 아빠가 딸을 안을 때의 감정이 느껴진다.
“아아- 지층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야.”
“지층?”
“초등학생 때 고무찰흙으로 지층 모형 만들 때 꽉 누르잖아 알지?”
“와 한 번에 이해됐어. 역시 선생님 하려면 이런 표현을 잘해야 하는구나. “
만질 수 없고 보지도 못하는 마그마 속으로 녹아버린 과거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실재하고 있는 화산 모형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과거를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화산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짧은 순간을 위해 내 앞에 놓인 것들을 모두 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원히 폼페이에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재가 되어 버린 곳은 떠나야하는 법. 요즘엔 힐을 잘 신지 않는다. 땅과 최대한 가까이서 두 발로 단단히 균형을 잡으며 살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친다.
“우리 같이 탄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어떡해?”
“그럼 내가 반대편 노를 저으면 되지.”
“구멍이 나면?”
“메우면 되지. 방법이 있을 거야. 항상 그랬듯.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는 거, 너도 알잖아 이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