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오지 않을 감정

드문 밤

by 연하

봄이 되어 제이가 새로 찾은 모임은 동성로에 위치한 독서모임이었다. 책을 한 권 읽고,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 모임을 4개월 참가한 후, 책이 질리기 시작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시간 책을 읽고 한 시간 정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후엔 형광등이 꺼지고 은은한 조명을 아래에 둔 뒤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연애로 흘러갔다.


스무 살쯤 되는 긴 머리를 하고 일본풍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말했다. “그는 나의 가장 아픈 면을 건드려요. 너 같은 애 사랑해 주는 사람 나밖에 없을 거야. 같은 말을 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섹시하게 느껴져요. 그러면 나는 그에게 더 의지하게 돼요.”

“잘생겼나요?”

“잘생기고 돈도 많아요. 그처럼 멋있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이 나타날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역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는 사랑만 한 게 없군. 제이는 생각했다.


*


같은 테이블의 검은색 스파게티 나시에 쇼트팬츠를 입은 28살 언니가 말했다.

“받아들이게 된달까. 27세 클럽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그때 되면 받아들이게 돼요. 자신이 타고난 모든 것을. 그때까지만 살면 돼요. 아무리 죽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27까지만 버텨라.”


12시가 되자 30대 여자 몇 명이 집에 가야 한다며 일어났다. “새벽 3시까지 웃고 떠들고, 그렇게 보내도 괜찮은 시간이 이십 대인 거야. 저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해서 일어날게요.”


제이는 어차피 집도 가깝고, 내일도 그다음 날도 할 일도 없어서 밤을 새든 일찍 가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대화가 조금은 그녀의 흥미를 돋우는 구석이 있었기에 조금 더 앉아있기로 했다.


그때 스파게티 나시 언니의 폰 배경화면이 켜졌다. 화면에는 한 외국인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남자친구예요?”

“아니요”

“그러면 누구예요?”

그녀는 작년 여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나폴리에서 만난 영국인 남자라고 했다.


"원나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 생각하지 않는데 저는 별로 안 하고 싶어요.”

“그렇게 좋으면 그냥 사귀면 되지 않을까요, 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하......”

그녀가 제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상황들이 있어요. 아직 제이씨가 겪어보지 못한. 현실적으로 사귀는 것이 불가능한 사이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육체적인 탐닉을 참는 삶, 너무 아까워요. 그날 감정은 그날이 지나가면 다신 오지 않을 감정이라고요. 그런 삶. 개인적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은 어떻든 상관없지만 내 삶에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네요. 나야 원래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그녀는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안 한다고 했다. 그녀는. 소설로 해야 할 말들이 그런 것들로 자꾸 새어나가는 기분이니까. 그리고 쉽게 잊히죠. 내가 아무리 중요한 말을 해도 사람들은 쉽게 잊을 뿐이에요. 오히려 오래 기억되려면 가끔씩 없어져야 해요.


"외로움 많이 느끼세요?"

"예전에?"


"외로움을 그대로 느껴봐요." 그녀는 제이에게 말했다. 그녀는 여름에서 가을이 오려고 하는 선선할 때 소설을 쓰기 시작해 겨울 내내 소설 하나를 완성한다고 했다.


"그렇게 겨울을 견디는 거야 난."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리기를 일주일 동안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 결국은 아무것도 기다리게 되지 않는 그것.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지만 인스타그램을 삭제하고 한 없이 개인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런 것들.

누군가는 나를 기억해 주겠지, 하는 것들.

그러다가 결국은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백지를 무대로 할 말을 하는 거야. 자유롭게. 그리고 할 말이 정돈이 되면, 그것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주는 거야. 그럼 더 이상 고독이 고독이 아니게 되지.

결국 날 위해 쓰는 거야. 미래, 긴 밤을 보내게 될 너를 위한 소설을 쓰는 거지.

북유럽 소설들이 왜 그렇게 잔잔하게 별 일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긴 줄 아니? 오랜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야. 노르웨이 사람들은 긴 겨울 동안 소설을 읽어.

긴 겨울 동안 읽을 소설이 필요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

오랫동안 마음속에 사무치고 간간이 기억이 날 소설.

나의 문장들이 네 속을 떠돌면 좋을 것 같아서. 민들레 홀씨처럼.

그래서 네가 날 잊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여행도 많이 다녀봐."

"언니는 여행 많이 가보셨어요?"

"꽤 자주."

"친구랑 같이 가세요?"

"친구랑 갈 때도 있는데, 보통 혼자 가.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사실 그건 나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나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하는 거야."

그녀는 콜미바이유어네임을 좋아하는데 가끔씩 티모시 샬라메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고 했다.

"감정들을 기록해 놓으려고 소설을 쓰죠. 난 배우가 아니니까."


“언니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야 해요.” 제이는 진심이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재미있는 일과 대화를 생각해 봤자 그건 현실이 아니다. 제이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저는 언니가 진심으로 걱정돼요. 언니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아요.”

“나도 가끔은 생각해.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 운동도 더 많이 하고 사람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세상에는 소설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 있어.”


*


그녀와의 대화가 끝난 후 제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밤의 거리로 나왔다.

만난 날짜로는 두 번째 날, 시간으로 치면 7시간째쯤, 그가 한 고백을 수락했다. 연애를 하면 그에 대한 감정이 변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랑을 찾을 기회는 막혀버리고 제약만 많아진 상황.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무언가에 휩쓸려 살아가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이는 카톡을 열어봤다. 오후 5시의 카톡을 끝으로 새벽 2 시인 지금까지 그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무슨 일 있어?”였고, 두 통의 부재중전화가 와있었다. 제이는 카톡으로

- 너무 늦게 봤네. 이제 모임 끝났어.라고 보냈다. 그는 바로 전화가 왔고 제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밤의 거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에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좋은 사람 만나겠지. 넌 좋은 사람이니까.’라고 했다. 제이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자신은 좋은 사람을 만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사실이었다. 착한 여자는 없다. 본인을 잘 모르는 여자만 있을 뿐. 제이는 자신에게 남아있을 무수히 많은 데이트를 상상하며 잠에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제이는 동네 도서관으로 걸어가 소설을 잔뜩 빌려왔다. 대부분 하얀색 니트 남자가 추천해 준 소설들이었다. 그녀는 하얀색 니트 남자가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도서관에 가서 소설을 빌려왔다. 책은 이렇게나 많은데 역시 제이의 관심을 끄는 소설은 한정적이었다. 우선 제이는 바느질, 뜨개질에 관심이 없었다. 요리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목공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언어는 영어를 하나 하기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하나의 언어를 파는 시간 동안 잠이나 더 자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었고, 역사는 가끔 관심이 있어 유튜브나 다큐멘터리를 보긴 하지만 지금 이 시기는 아니었다. 심리학과 철학은 고등학생 때 많이 파서 이제 더는 보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과학은 어릴 때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는 분야 중 하나였다.


*


그녀는 어른이 되면 바에 가봐야겠단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그다음 날이었나, 우연히 한 바에서 남자들 만났다. 그는 11살 연상으로, 우리는 대화가 꽤 잘 통했다. 영화도, 책도 모두 깊이가 있었고, 그는 나라를 여행하며 춤을 추면서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체육복에 그림을 그쳐준 정연우와 왠지 겹쳐 보였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취향이 비슷해. 제이는 자신의 이상형의 원형을 재현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는 영화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래전에 한 달 밤을 울게 할 만큼 매우 강렬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 잊고 지워버리게 한 기억을 상기시키기 때문일 거야.


"음 제가 예술가 타입은 좀 싫어해서요"

"왜요"

"뭐랄까.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나를 좀 챙겨줬으면, 하는 게 있거든."


나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를 안고 싶었지만 이것이 외로움에서 오는 것인지, 그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가까이 있었지만, 서로를 안으려면 안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어쩌면 서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어색함도 없었다.


제이는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사랑의 열병을 앓기 쉬운 이탈리아의 화창한 여름날로 간다면 내 앞에 있는 그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계절은 이른 봄이고 나는 두꺼운 옷들로 나를 온 힘을 다해 방어하고 있는 걸요. 우리는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당신은 일주일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나를 유혹하려고 하고 있죠. 이건 어딘가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거든요. 일단 여행을 다녀와서 생각해 볼게요.


제이는 일주일 후 바로 도쿄로 떠났다. 그곳으로 떠난 이유는 간단했다. 온천을 가고 싶었다. 제이는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짐 정리를 하고 바로 다음날 도쿄 근교인 하코네로 이동했다. 일본에서는 수건을 머리에 이고 온천욕을 한다는 블로거의 말을 듣고 수건을 한 장 챙겨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사람들은 머리에 이고 온천을 하고 있었다. 한 번 해볼까 했지만, 머리 위에 무엇을 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모자를 쓰는 것조차 싫어하는 제이는 그만두었다.


하코네에서 온천욕을 하며 그와 자는 상상을 했다. 나는 지금 분명 외롭다. 그렇기에 그와 자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한 번 자면 끝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그냥 같이 자서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것이다. 이렇게 혼자 여행을 하는 것과 그와 같이 여행을 하는 것, 혼자 숙소에서 자는 것과 그와 같이 자는 것.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것이다. 아니,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나는 물론 그와 잘 수 있었다.

제이는 자신이 분위기만 이끈다면 더 이상 혼자 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초입이라는 점,

그 사실이 왜인지 그 판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자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온천을 마치고 누워있는 곳이 있어 자고 있었다. 불이 켜져 있지만 잤다.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그녀가 좋아한다는 Futile devices를 들으며 자고 있는데 직원이 깨웠다.

"저기.. 이제 마지막 셔틀버스 시간이에요." 제이는 실수로 락커 열쇠를 들고 나와버렸다. 자취방에는 그 하코네 온천에서 가져온 열쇠를 아사히 다 마신 맥주캔에 걸어두었다.


*

제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선선해지면 글을 쓰기 위해 앉을 시간이 난다. 여름에는 앉아있을 수가 없다. 무수한 가능성들. 푸른 잎이 유혹한다. 그것은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기에. 우리는 또 한 번의 무수한 여름을 맞이하겠지만. 이 여름은 특별할 테니까.


프라하에 가지 않고도 프라하의 야경을 떠올리고, 내가 상상한 프라하의 야경을 상상해 쓰고 싶어요. 먼저 상상한 후 그 분위기와 이미지를 내 안에 가득 넣어두고 싶어요.


여행을 끝내고 오랜만에 자취방에 들어오자 27살의 언니가 생각이 났다. 제이는 그 해 가을 한동안 원나잇 할 사람을 찾으러 다녔다. 클럽에 하루 종일 앉아있었다. 말보로 레드를 한 갑 사서 불을 붙였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 약간 멋진 걸. 나야 원래 중독 같은 거 빠지지 않는 법이니. 한 번으로 암 같은 걸 걸린다는 건 너무 과장된 교육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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