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명해지는 순간
제이는 인생을 남자에 맞추는 방식으로만 살아왔다. 고등학생쯤 그녀 주변의 동급생들은 하나둘씩 삶의 노선을 정해야 했는데, 제이에게 삶의 노선이란 사랑의 방향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정연우가 유학을 간다면 그녀도 유학을 갔을 것이다. 그녀가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오로지 정연우가 서울을 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제이의 성향으로는 만약 뉴욕 거리를 걷다가 만난 눈이 맞은 남자가 월스트레이트의 트레이더라면 제이는 경제학 공부를 할 것이고 그와 데이트를 하다가 갑자기 일러스트레이터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녀는 화가의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를 터였다. 이렇듯 제이의 자아는 한 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순수한 여자를 좋아한다면 제이는 순수하게 살 것이고, 그 반대라면 제이는 온갖 퇴폐적인 소설과 영화에 탐닉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그녀에게 모호한 용어였지만 그녀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 자신이 어떤 남자에게 끌리고 있고, 그렇지 않은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고등학교 강당에서 진로교사가 생활기록부 직업희망란을 일관되게 쓰라고 했을 때부터 제이의 연극은 시작되었다.
그녀의 희망은 초등교사(를 하면서 안 잘리고 놀고먹고 하는 것이었다. 방학 때 여행 다니고 다녀와서는 여행에세이를 쓰고 잘생긴 남자랑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를 닮은 예쁜 딸이나 잘생긴 남자를 낳는 것.)
그녀는 사랑 앞에서 자아가 없다. 글을 쓰는 동안만은, 잠시 자신을 되찾는다. 그 요동치는 마음을 풀어놓을 곳이 필요한 것이다.
소설가가 되어 평생 자신을 알리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이는 자신의 직업의 이미지가 오히려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