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쓰는 습관이 있었다.
몇몇 남자애들은 관심을 가질 만한 외모였다. 2호선에서는 스쳐 지나갈 얼굴이고, 6호선에서는 한 번쯤 돌아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것은 올해 3월 초 보드게임 모임이었다. 그녀는 원래 이런 모임을 잘 나오지는 않지만 요즘 너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같아 왔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사람들과 함께 인스타 아이디를 교환했고, 스토리를 많이 올리는 그녀로 인해 한 번도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녀에 대해 많이 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알게 된 지 한 달 조금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나에게 그때 보드게임에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며 둘이 만날 수 있냐며 메시지가 왔다.
나는 마침 약속이 없었고 실제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어떨까 싶어 수락했고, 그녀는 수원에, 나는 안양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멀지도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차가 있었고 그녀는 차가 없었기에 내가 수원으로 가겠다고 했고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보드게임에서 처음 봤을 때나 인스타그램에서 보던 그녀보다 조금 더 수수한 차림이었다. 아니 인스타그램에서의 그녀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녀는 아예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쌍둥이 동생이 대신 나온 걸까 하는 상상을 잠시 했지만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고, 나는 갓 일자리를 구해 적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는 잘 흘러갔고, 서로 음악을 공유하고 들었고 각자의 과거 연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보다 1살 어렸고, 연애는 별로 안 해봤다고 했다. 나 또한 고등학생 때 2년 만난 여자친구와 성인이 된 후 2번 정도 연애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녀는 쉬는 날엔 주로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고 나는 글을 보여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지금 보다 더 친해지면”이라는 말을 하며 수줍어했다.
딱히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거나 싫은 구석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확 끌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었다면 편안했다. 그녀 앞에서는 뭐든 술술 말하게 되는 게 있었다.
그 만남 이후 우리는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고 활발하게 올라오던 그녀의 인스타그램도 뜸해졌다. 가끔 그녀가 떠오를 때면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기도 했고 수원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녀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뀐 늦가을의 어느 늦은 밤이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더니 내일 만날 수 있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취업을 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심 반갑기도 했다.
그날 아침의 땅은 어젯밤 내린 비로 젖어있었다. 흙과 풀이 섞여 특유의 향을 자아냈다. 그녀는 저번에 내가 수원으로 왔으니 이번엔 자기가 안양으로 가겠다고 했고, 우리는 안양에 있는 내가 잘 아는 카페에서 오후 4시에 보기로 했다.
그녀는 먼저 와 있었다.
카페 창가 자리, 비에 젖은 거리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손을 들었는데, 그 손짓이 이상하게도 지난번보다 작게 느껴졌다.
머리는 묶지 않았고, 화장은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던 또렷한 눈매 대신, 오늘은 눈 아래가 조금 어두워 보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연약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웃음이 입꼬리에서만 머물렀다.
나는 괜히 괜찮은 척 더 밝게 인사를 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을 때, 잠시 공백이 흘렀다.
지난번에는 그렇게 술술 말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창밖을 봤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차들이 지나가며 물을 튀겼다.
“음… 그냥요. 계절이 두 번 바뀌었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잘 지냈다는 말 대신, 계절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취업은 아직이라고 했다.
대신 글을 더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왜 아무도 안 보게 둬요?”
내가 묻자 그녀는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보여주면… 없어질 것 같아서요.”
그 말이 이해되는 것도 같고,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을까 봐 조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문득 그날 보드게임 모임에서의 그녀를 떠올렸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조금 떠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얼굴.
인스타그램에서는 늘 중심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어딘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느낌.
“그래서… 왜 갑자기 연락했어요?”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냥…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났어요.”
그 말은 고백처럼 들리기엔 너무 조용했고, 변명처럼 들리기엔 너무 솔직했다.
카페 안은 따뜻했지만, 바깥의 공기 냄새가 자꾸 떠올랐다.
젖은 흙냄새.
풀 냄새.
어제와 오늘 사이에 어딘가 멈춰 있는 듯한 공기.
그녀는 내 근황을 묻고, 회사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말했다.
“그날은 제가 조금 더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말을 더 하고 싶었다는 건, 나에게 더 묻고 싶었다는 건지,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는 건지.
나는 이상하게도, 오늘 이 만남이 가벼운 재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결정되거나, 혹은 끝나거나.
그녀는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이거 그때 보고 싶다고 한 거. 시간 날 때 읽어줄래요?”
그녀는 나에게 한 권의 책을 남기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곧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거의 마시지 않은 차가운 페퍼민트티를 바라봤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책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두고 어제 사온 냉장고에 있는 샌드위치 반 개를 먹었다. 출근하기 전, 퇴근한 후 그 책은 항상 내 방 침대 옆 탁자에 놓여있었고, 읽을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고 첫눈이 내려도 왠지 그 책을 읽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일어난 느낌이 들었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은 여전히 조용했다. 스토리는 올라오지 않았고, 프로필 사진도 바뀌지 않았다.
책은 얇지도 두껍지도 않았다.
표지는 아무 무늬도 없었고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만든 것처럼.
나는 몇 번이나 책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출근 전, 셔츠 단추를 잠그다 말고 펼쳐볼까 생각했고,
퇴근 후, 불을 끄기 직전까지 손에 올려두고 있다가 덮어두기도 했다.
읽는 순간, 무언가가 정해질 것 같았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걸 아는 게 두려웠다.
첫눈이 내리던 날, 창밖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눈에 흡수된 것처럼 작아졌다.
나는 괜히 방 안을 정리하다가 결국 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보드게임 모임에서 처음 만난 날.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조금 다른 내가 있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게 내 앞에서는 말을 많이 했다. 내가 묻지 않아도 자기 얘기를 했다. 나를 믿어서라기보다, 나를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나는 그녀를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잃어도 괜찮은 사람.
그 차이가, 묘하게 가슴을 눌렀다.
‘오늘은 내가 먼저 연락했다. 이유를 묻길래 계속 생각났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거기서 손을 멈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사람.
나는 그저 우연히 남아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간 밖에서, 조용히 멈춰 있던 사람.
마지막 장은 비어 있었다.
아무 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걸 읽는 날이 우리가 끝나는 날이면 좋겠어요.
그럼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상상으로 쓰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책을 덮었다.
끝났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시작된 것 같았다.
나는 이제야 그녀를 읽기 시작했으니까.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읽었어요.’
그녀는 다음 해 봄이 오도록 답장이 없었다.
다시 들어가 보니 인스타계정도 삭제되어 있었다. 그녀와 연락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 후 나는 소개를 받아 누군가를 만났고, 계절이 한 번 더 바뀌기 전에 결혼을 했다.
결혼기념일, 아내와 함께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 오늘, 전날 내린 비로 젖은 땅의 냄새가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집에 와서 그녀가 준 책을 찾아봤다. 분명 원래 살던 집에서 가져왔던 것 같은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여전히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비가 온 다음 날 아침이면 괜히 창문을 열어본다. 젖은 흙냄새가 올라오면, 잠깐 숨을 멈춘다. 그녀를 떠올리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녀가 있었던 시간이 진짜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녀가 책을 건넨 날, 이미 끝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상상 속에서 먼저 살아봤고,
나는 현실에서 그녀를 한 번도 붙잡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끝까지 읽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읽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었다면, 그녀는 아직도 어디선가 다음 장을 쓰고 있었을 테니까.
길을 걷다 문득 수원이라는 지명이 들리면
나는 잠깐 고개를 든다. 가끔 지하철을 탈 때 그녀가 산다는 역을 지날 때면 괜히 사람들 얼굴을 한 번씩 본다.
음악 취향이라면 아내보다 그 여자애와 더 잘 맞았다. 외모도 수원 여자애가 좀 더 내 취향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와 결혼했고 처음 만난 날부터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아내와 결혼한 것을 한 번도 의심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었다.
아내와 그 여자애의 차이는 무엇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비오는 날이 아니면, 그때와 같은 향을 맡는 날이 아니면 그녀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갑자기 사라진 그녀의 노트처럼 내게 조금 남아있는 이 기억도 곧 사라질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 눈 앞에 있고 나를 잡고 있는 손은 아내의 손이다. 이제 내게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