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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Apr 09. 2020

여행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요?

아테네

-프롤로그-


이 글은 내가 24살 올라갈 무렵 시작한 첫 여행부터 시작한다. 내가 올해 꼭 마흔이므로 무려 16년 전의 이야기다. 서른아홉의 중반을 넘어설 무렵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내 삶을 다시 한번 리셋해야겠다는 강박감. 그건 새로운 시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처음으로 이런 말풍선 하나가 둥둥 내 머리 위로 떠올랐다. 


'여행을 글로 정리해야겠다.'


나에게 '지나간 여행'을 정리한다는 건,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4학년 올라갈 무렵 난 어떻게든 세상을 한 번 보고 싶어 무작정 배낭 메고 먼 그리스, 터키, 이집트로 떠났다. 첫 배낭여행에서 자신감을 얻어왔지만 졸업하고 3년 간의 백수생활은 내 자존감을 끝 간 데 없이 추락하게 만들었다. 그때도, 아르바이트비 꼬깃꼬깃하게 모은 돈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취업해 어리바리한 4년의 신입사원 시절을 지나 대리, 차장 중간 직급을 거쳐 부장이 되었다. 그 사이 동생이 미국인과 결혼을 했고, 루마니아라는 먼 이국 땅에 나가 살았다. 외국인 며느리가 들어오며 집안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나는, 10년 넘게 소 목장을 하다 지금은 목수가 된 시골 청년을 만나 사랑을 했고 이런 표현은 진부하지만, 말 그대로 결혼에 '골인'했다. 16년 간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은 여행을 통해 성장했다. 동생이 해외에 살면서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동생 찾아 삼만리’를 찍으며 첫 가족여행을 했고, 남편을 만나고는 함께 다이빙 여행을 하며 성장해갔다. 그래서 이 글은 여행기이자, 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유년시절을 지난 한 사람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지의 기록. 


내가 16년 간 여행하고 성장하면서 가장 뜨겁게 느낀 것은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 취업하기 힘들었고, 사회생활도 힘들었고, 결혼도 힘들었다. 한 때는 모든 게 어려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검은 머리로 아시아에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나 유럽 어딘가에 가면 외모만 가지고도 이방인이 된다. 차별을 받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 가지고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여행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긍정적이 되었다. 모든 것은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일지 부정으로 받아들일지, 태도의 결정은 본인 인생에 아주 큰 변수다.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가진 모든 걸 사랑으로 받아들이자 인생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하여, 난 그 긴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고 한다. 16년 내 여행의 기록을.


                                                                                                                                                2020. 4. 7


디오니소스 극장

2004년 1월.


드디어 내 첫 배낭여행의 시작이다. 1년 넘게 여행 경비 벌고, 인터넷으로 정보 수집하고, 동대문에서 산 배낭에 짐을 차곡차곡 쌓아 카메라 싸는 것으로 내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 집에서 쓰던 필름 카메라 작은 것 하나와 동생이 막 사서 친구들에게 자랑처럼 들고 다녔던 디카까지 두 개를 챙겼다. 필름 카메라는 한 롤에 기껏해야 스무 장 남짓, 디카는 배터리가 빨리 닳아 반나절을 채 못 버티지만 어쩌랴.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 등으로는 40리터짜리 배낭 하나, 어깨엔 카메라와 필기도구, 지갑 등을 넣은 옆 가방을 메고 난 첫 행선지 터키 이스탄불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스탄불은 아테네로 가기 위한 환승지였다. 첫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이륙한 지 1시간도 안되어 창공을 나는 그 순간 문득, 정신이 차려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호기롭게 부모님께 잘 다녀오겠노라고 큰 소리 떵떵 치고 비행기 탔는데,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를 날아가고 있노라니 내가 무슨 미친 짓을 벌인 건가 싶다. 태어나서 이렇게 멀리,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떠난 적이 없다. 아는 사람 없는 낯선 곳에 간다는 게 그렇게 긴장되고 무서운 일인지 이전엔 차마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 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웬 낯선 여자애가 벌벌 떨고 있으니 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말을 건다. “혼자 여행가요?” 그 아저씨는 터키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난다). 생판 모르는 남인데도 같은 행선지를 간다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삼 궁금해졌다. 나는 왜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을까?


대학교 3학년이 지나고, 여느 대학생이 그랬듯 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망나니처럼 실컷 놀고 즐기던 1, 2학년에 비해 3학년의 무게는 조금 달랐다. ‘아, 정말 1년만 있으면 졸업이네. 뭐하지.’ 졸업이라는 무게, 취직을 해야 한다는 압박. 하지만 정작 나를 옥죄는 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신동들은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이니 피아노니 재능을 잘만 찾던데 난 왜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을까? 꾸역꾸역 해야 하는 수능 공부 3년 동안 하면서 겨우 대학교에 들어와서 즐긴 건 고작 2년. 결국엔 나도 다시 내 먹고살 길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겸 1년 휴학을 했다. 일종의 갭이어였다.


적성을 찾아보겠노라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긴 했지만 휴학 기간 동안 꾸준히 했던 건 영어회화 공부였다. 영어회화 학원은 3학년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었다. 사실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토익 점수에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학연수는 한국 사람들끼리 어울려 놀면서 영어는 하나도 늘지 않더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학자금 대느라 허리 휘어지는 부모님께 큰돈 때문에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면 적어도 학교 수업에 지각은 하지 않겠지, 란 꼼수도 있었다. 난 타고난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출석체크를 하기 위해 5시 50분에 일어나 10분 만에 세수하고 옷 챙겨 입고 6시에 나가 2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다. 매일 그렇게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1년 코스였지만 저녁에 늦게까지 놀거나 아침에 못 일어나 못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결국 1년에 코스를 다 끝내지 못했다. 휴학을 했을 때 하나의 목표는 끝내지 못한 영어회화를 코스를 수료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2년의 기간이 지나고 영어회화 코스를 마치자, 과연 내가 쓸만한 영어를 하고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휴학이 하반기로 지날 무렵, 내 영어를 시험해 볼 겸, 휴학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신타그마 광장


어디를 갈지 여러 나라의 여행기를 인터넷으로 보다 우연히 그리스 산토리니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산토리니의 풍경은 꼭 나에게 염원을 거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꼭 저곳에 가고 말리라. 난 저기에 간다.’ 주문처럼 외웠다. 그리고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휴학이 끝나기 전에 다녀와야 하니 1월이고, 겨울의 유럽은 해가 일찍 지니 북유럽보다는 남유럽으로 가자. 그래. 그리스, 터키, 이집트가 좋겠어. 지중해니까 따뜻하겠지. 여행비는 1년 동안 과외를 하며 번 돈으로 충당했다. 당시에 난 집에서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던 터라 과외비 받는 걸 생활비로 쓰기엔 너무 아까워 매달 30만 원씩 적금통장에 붓고 있었다. 휴학하고 1년 가까이 되자, 돈이 300만 원으로 불어났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정보를 수집하고, 론니플래닛 책과 배낭을 사고, 전화카드도 구매했다. 가난한 배낭여행자가 전화를 하려면 국제전화카드를 미리 충전해 가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해야 했다. 한 달 치 계획을 다 세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귀찮았다. 불안하니 아테네 숙소만 정해놓자 싶어 첫 2박 일정만 예약해놓고 나머지는 가서 부딪히기로 했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이었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항공사 측에선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는 내일 아침에 있으니 하룻밤은 항공사에서 제공한 호텔에서 자라고 했다. 경유하는 승객들이 호텔 가는 버스를 함께 기다렸다. 옆 자리에 앉았던 아저씨는 본인 짐을 챙기고도 내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건승을 빌어주었다. 30분가량이 지났을까. 버스라 부르기엔 민망한 봉고차 한 대가 오고, 우리를 이스탄불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호텔은 생각보다 운치 있었다. 우리나라 80년대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고풍스러운 호텔이었다. 긴장했던 탓인지 꿈도 안 꾸고 잤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며 발생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나에게 어떤 서류를 주고 사인을 하라 했다. 내용인즉슨, 미니바를 사용했으니 사용료를 내라는 것이었다. 사용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니 어깨를 으쓱하며 못 알아듣는 흉내를 낸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같은 반응. 그 모습에 분통이 터져 소리를 질렀다. “I didn`t use it!” 나의 첫 영어가 호텔에서 컴플레인을 하는 거라니… 호텔 냉장고는 문만 열어보고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여행 첫날부터 이런 사기를 당하니 속상했다. 몇 푼의 돈을 뜯으려던 호텔 직원들은 씩씩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는 그제야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알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얼굴이 상기되어 울상이 되어 있으니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한국말? 옆을 보니 어제 공항에서부터 봤던 잘생긴 서양 남자가 서 있다. 이 사람이 맞나 싶어 어리둥절 해 있자 다시 말을 건다. “한국에서 1년 넘게 강사 했었어.” 이름은 폴, 호주 사람이었다. 한국인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영국에 가는 길이란다. 내가 한국인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딱 보면 알아”라며 웃는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함께 보딩 시간을 기다리니 덕분에 호텔에서 기분 상했던 일이 사르르 풀어졌다. 해가 뜨고, 폴은 런던으로 나는 아테네로 향했다. 


나를 구제해 준 폴


내가 예약한 아테네의 호텔은 ‘낡았다’는 단어가 그대로 호텔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왜 이리 저렴한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쥐 가족이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 같은 5인용실은 침대라고 할 수도 없는 낡은 매트리스 다섯 개가 초라하게 놓여 있고 햇빛도 잘 들지 않았다. 난민 수용소 같았다.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숙소의 충격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체크인하면서 여권을 돌려받지 못한 게 생각났다. 아침에 터키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당장 달려가 여권을 달라고 하자 ‘deposit’ 되었다며 돌려주지 않았다. 즉, 체크아웃하고 돈을 받고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이런 행위를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엄연한 불법이었지만, 여행객들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한 호텔 측 나름의 요식행위였다. 이후 여행 동안 여권을 deposit 해놓는 건 일상적으로 일어나 나도 후엔 별 거리낌 없이 맡겨놓곤 했지만 떠나기 전 읽은 여러 여행후기에서 여행객들은 경고를 했었다. 여권을 호텔에서 맡아놓는 건 불법이니 꼭 찾으라고. 그 일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프런트에 있는 무표정한 여직원과 싸우기 시작했다. 커트 머리를 한 젊은 그리스 여성은 전화를 받으면서 뭐라 뭐라 하더니 나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사장인 것 같은 남자가 친절한 목소리로 뭐라 뭐라 설명을 하지만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무조건 달라고 했고, 남자는 알았다고 다시 프런트 직원을 바꿔 달라고 했다. 다시 긴 통화. 돌려줄 기미가 안보이길래 직원에게 “Passport, please”하니, 날 째려보며 여권을 건네준다. 아, 여행의 시작이 너무 험난하다. 험난해. 


2004 올림픽 준비로 한창인 파르테논 신전


숙소에 있기 싫어 무작정 나와 길을 걸었다. 오모니아에서 신타그마 광장까지, 다시 플라카에서 모나스티라키 골목으로 들어가니 그 유명한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어서 아크로폴리스 근처는 유적지를 재건하기 위한 공사판이었다. 관광지로 오니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보였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오는 한 가족이 보이는데 한국 사람들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눈물 나게 반가워 먼저 다가가 인사를 했다. 타지에서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마치 알았던 사람들 인양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근처에 무슨 유적이 있는지 정보 공유하고, 건승을 빌며 헤어졌다. 헤어지니 다시 혼자라는 게 실감 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옆에 웬 그리스 아저씨가 날 째려보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내 착각이지 싶었는데 몇 번을 눈 마주치니 날 보는 게 확실했다. 무슨 더러운 것을 본 마냥 찡그린 얼굴이 영 기분이 나빴다. ‘이게 인종차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잘못이 아니고, 그 사람이 교양이 없는 것이니 무시했다. 

어딜가나 많은 떠돌이 개들

여행은 원래 이렇게 힘든 걸까? 하루 동안 호텔에서 사기당하고, 싸우고, 인종차별의 시선까지 받으니 온갖 설움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외로웠다. 2년 동안 열심히 한 영어도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고, 산토리니를 가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왜 그렇게 ‘떠나고’ 싶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막상 떠나보니, 집이 너무 그리웠다. 처음으로 꿈에 가족이 나왔다. 아침에 울면서 눈을 떠 수용소 같은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 마치 내가 군대에 끌려온 것 같다. 군대 가면 이런 기분일까? 이 거지 같은 곳에 몇 년을 꼼짝없이 내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기분이 이럴까? 사실 친구들이 군대 가고 가끔 휴가 나와서 만날 때도 "으이그 이 또라이들아"라며 무시했는데, 내가 잘못한 벌을 받나 보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마냥 한 달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내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이를 악물고 거리로 나와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악착같이 잘 버텨보자. 까짓 거, 한 달이야 금방 가겠지. 마음 굳게 먹고 난 내 길을 가는 거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들…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날 때마다 엽서를 쓰기로 했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엽서를 쓰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있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해가 뜨자 눈부신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햇빛이 무척 따사로왔는데도 손이 시려 장갑을 꼈다. 바위 위로 올라가니 구름 사이로 넓게 깔린 아테네 시내가 다 보였다. 저 멀리 바다도 보인다. 파노라마처럼 넓게 트인 풍경을 보고 나니 마음도 한 결 편안해졌다. 첫날 예방주사를 톡톡히 맞으니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내 여정,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 여정,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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