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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3. 2022

네가 가는 길이 옳다

길리 섬의 아침식사 친구

 “안녕하세요~”

 백발의 긴 머리를 자유롭게 풀어헤친 수잔이 한국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남편과 난 해변가 식당에서 이제 막 아침식사를 주문하려던 참이었다. 리조트의 식당은 작았지만 자유로운 곳이었다. 바닷가 바로 앞 해변가에 요리하는 작은 공간과 테이블 몇 개를 놓은 게 다였다. 식사하던 사람은 언제든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잔은 이제 막 모래사장에서 식당 쪽으로 걸어오던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남편과 나도 한국어로 화답했다. 수잔은 자연스레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다. 

 “아침 식사 했어요? 우리 막 주문하려던 참이에요.”

 “아뇨. 저도 같이 주문하죠.”

 며칠을 만나 친숙해진 리조트 직원에게 각자의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수잔이 물었다. 

 “어제 다이빙은 어땠어요?”

 “아주 좋았어요. 거북이가 귀엽던데요. 아침 일찍 일어났나봐요 수잔.”

 “네. 산책하고 있었어요. 해변에 쓰레기 좀 줍고요.”

 해변을 산책하며 쓰레기를 줍는 사람. 수잔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뒤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롬복섬이 있었다. 이제 막 롬복섬 위로 떠오른 태양이 환하게 세상을 비추었다. 바다를 등 뒤로 앉은 수잔이 환하게 웃었다. 난 밝은 그녀의 미소를 보며 함께 웃었다. 


 우리가 수잔을 만난 것은 길리 아이르 섬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아침식사를 위해 바닷가 식당에 자리 잡은 남편과 나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어설픈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안뇽하세요~”

 어깨까지 늘어뜨린 흰 머리가 찰랑거렸다. 인자한 미소를 띈 서양 여자였다. 발리에서 패스트 보트를 타고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길리에서 한국어를 듣게 될 줄이야. 남편과 난 낯선이의 한국어 인사에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그것이 수잔과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수잔을 만났다. 비슷한 시각에 아침식사를 하는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식당에서 만나면 자연스레 함께 앉아 이야기를 했다. 수잔은 한국에서 몇 년 산 적이 있다고 했다. 익숙한 언어가 들려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고 했다. 수잔은 마치 몇 년을 봤던 사람을 대하듯 따뜻한 눈빛으로 우릴 바라봤다. 매일 보는 리조트 직원은 우리가 만나면 자연스레 테이블의 찻잔과 식기를 옮겨주었다. 

 수잔은 캐나다 사람으로 중년의 나이였고 부모님과 여행 중이었다. 수잔의 부모님도 수잔처럼 머리가 희끗했지만 정정하고 깔끔한 노부부였다. 수잔의 아버지는 덩치가 있는 조용한 신사였고, 어머니는 체구는 작았지만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우리 숙소 바로 옆에 머물고 있어서 가끔 수영장을 바라보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 노부부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다이빙을 하거나 물놀이를 하고 돌아오면 숙소 밖에 앉아 있다 눈인사를 하며 경쾌하게 물었다. 

 “안녕! 오늘은 어땠어요?”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니 데이트 가야겠네요?”

 수잔은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 혼자 식사를 하러 나왔고, 우리가 있으면 합석을 했다. 수잔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여행을 좋아했고, 발리를 사랑했다. 난 매일 아침 수잔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수잔의 사고방식과 살아온 여정은 내가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잔은 본래도 차분한 성격이었을 테지만 여러 경험과 명상, 수련 등으로 더욱 여유로운 사람이 된 듯했다. 수잔은 우붓에 있다 길리로 넘어왔다고 했다. 

 “우붓 좋나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우붓에 당연히 여행을 다녀온 거라 생각한 나는 큰 의미 없이 물었다. 그러나 수잔은 놀라운 이야길 꺼냈다. 

 “우붓에서 친구를 후원하고 있어요.”

 수잔이 예의 그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원? 아프리카 기아 아동이나 난민처럼 가난한 사람을 후원한다는 걸까? 궁금한 표정을 지으니 수잔이 뭘 궁금해한다는 지 알겠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발리를 좋아해서 거의 매년 왔어요. 그래서 이곳에 친구가 많아요. 어느 날 우붓에 있는 친구에게 ‘넌 뭘 하고 싶어?’라고 물어봤더니 커다란 제비집을 짓는 게 소원이라고 하더군요. 네. 맞아요. 제비가 와서 살 수 있는 제비집이요. 하지만 돈이 없어서 짓지 못한대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내가 후원해줄게.’ 그래서 그 친구가 제비집 짓는데 도움을 줬어요. 지금은 그곳에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어요. 궁금하면 검색해봐요. 나올거에요.”

 “와! 저 우붓에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 여행은 일정이 안 맞아서 못 갔어요. 그런데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듣네요!”

 수잔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카르마지요.”

  수잔의 친화력과 선한 영향력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중년의 여성으로 보이는 수잔이 이런 놀라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난 감탄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마음이 가서 한 행동이었다. ‘스왈로우 게스트 하우스(제비집)’라는 이름의 이곳은 정말로 멋진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에 살았다던 수잔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수잔,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난 캐나다에서 어부였어요. 매일 물고기를 잡고 다듬는 일을 했죠. 당시에 부모님이 외국 학생들을 집에 묵게 해주는 홈스테이를 하셨었는데 한국 학생이 우리 집에 머물었어요. 그가 나에게 지나가듯 말해줬죠. 한국에 영어 공부가 유행이니 한국에 가서 영어 선생을 하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회를 봤고, 한국 지방의 한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죠. 한 7~8년 한국에 살았어요. 여행도 많이 다녔고요. 한국에서는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지금처럼 그 때에도 발리를 좋아해서 한국에 있을 때 많이 왔다 갔다 했었어요. 친구들도 많았고요. 몇 년을 그렇게 다녔는데…… 어느 날 발리에 폭탄 테러가 났어요. 그 때 관광왔던 호주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몇 년 간 서양 사람들이 발리를 많이 가지 않게 되었죠. 난 여전히 왔다 갔다 했고, 발리에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지켜봤어요. 나중에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수잔, 제발 이 물건들을 좀 사주지 않을래? 우리 아이들이 굶고 있는데 이 물건은 먹을 수가 없어…….’ 발리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관광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었어요.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팔면서요. 그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물건은 먹을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그 때부터 내가 그 친구들의 물건을 사줬어요. 그리고 그걸 캐나다에 다시 파는 사업을 시작했죠. 한국에 있으면서 일을 했고, 사업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한국을 떠나게 되었어요. 사업은 아주 잘 되었죠.”

 수잔의 이야기엔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캐나다에서 어부였던 사람이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다시 사업가가 된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남편과 난 홀린 듯 수잔의 삶을 경청했다. 수잔의 삶을 들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내가 주변에서 항상 들어왔던 건 ‘시장을 잘 보고 이직해야한다.’, ‘어디가 요새 연봉을 많이 주고 잘 나가더라.’ 같은 식의 말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지켜보고, 기회를 보면서 일을 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수잔처럼 선의에서 시작해 사업을 시작하고, 그 길로 인생이 흘러갔다는 사람은 이전엔 들어보지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다. 세상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가슴이 떨리는 쪽으로 인생의 길을 전환하는 것.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닌 심장의 울림을 들으며 삶의 진로를 택하는 것은 살면서 깊게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수잔의 삶의 방식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래 다닌 회사를 휴직하기로 결정했을 때, 난 삶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온 내게 갑자기 24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잉여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니 좋기도 하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이 되기도 했다. 이미 세 번의 승진 제안을 받은 후였다. 이성적으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내 진로에 큰 도움이 될 터였지만, 가슴으론 이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흔을 앞두고 있었고,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라는 걸 내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 때 수잔의 인생이 생각났다. 이성이 아닌 가슴이 떨리는 길을 선택한 사람. 내게도 그런 선택이 필요한 시기였다. 휴직 날짜가 다가온 어느 날, 퇴근하며 집앞 골목길을 들어선 순간이었다. 가슴에 아주 작은 불씨가 동동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글을 써보는 건 어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난 데이터 분석을 하는 사람이었고 글이란 걸 쓴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그 불씨가 말걸었던 순간의 느낌은 계속 내게 남았다. 그걸 무시하면 안될 것 같았다. 불씨가 큰 용기를 내어 나에게 말을 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잉여가 될 뻔한 내 삶에 할 일이 생겼다. 난 휴직한 첫날부터 아침 7시에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썼다.

 모두가 멀쩡히 하던 일을 그만두고 퇴사할 필요는 없다. 내 인생을 찾겠다며 훌쩍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좋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이 있다. 그들이 스스로 찾고 선택한 길은 절대 틀리지 않다. 수잔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네 삶이 옳다. 네가 가는 길이 옳다. 네 선택이 옳다. 네 인생이 옳다. 누구나 그들의 삶엔 각자가 거쳐야 할 과정이 있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수잔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난 패들요가 수업을 들으러 갔다. 잔잔한 바다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하는 요가는 꽤 신선했다. 물에 빠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보드라운 물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져 즐겁기도 했다. 하늘을 보고 누운 상태로 팔을 옆으로 뻗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롬복섬이 바로 옆에 친구처럼 친근하게 서 있었다. 바다 위에 둥둥 떠 맑은 하늘 아래 롬복 섬을 보고 있노라니, 벅찬 행복이 가슴 깊은 곳부터 올라왔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하는 패들요가는 흔들흔들 불안하면서도 그 잔잔한 스릴이 삶과 비슷하다. 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균형을 잘 잡고 있을 수도, 물에 떨어질 수도 있다. 때론 외부의 영향도 받는다. 파도나 너울이 쳐 훼방을 놓을 수도 있고, 맑은 날엔 이렇게 멋진 풍광을 볼 수도 있다. 그저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균형을 잡는 것. 그게 내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인생이란 알 수 없어 재밌다. 신혼여행에서 특별한 친구를 만나고, 그 친구에게 삶의 지혜를 선물받으니 말이다. 자신의 길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없다. 삶은 현재진행형이니까. 결정을 하되 때론 인생이 날 이끌어가도록 흐름에 맡기는 것. 그런 삶의 방식대로 살고 싶다. 그래서 믿는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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