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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8. 2022

마음의 평안이 삶의 즐거움을 낳고

부다페스트의 박수소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것은 보름달이 찬란한 추석 연휴였다.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한가운데 있는 숙소 거실의 분위기는 마치 여유로운 카페에 온 것처럼 따뜻했다. 저녁을 먹고 한숨 돌리니 어느 덧 해가 완전히 지고 가로등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좀 걸을까요?”

 “그래요.”

 달밤에 도나우 강변을 걷는 것만큼 낭만적인 게 있을까? 남자친구와 난 가로등을 따라 천천히 강변으로 향했다. 바닥에 작은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한 도시를 노란 빛들이 반짝반짝 빛내주고 있었다. 

 “와!”

 부다성이 보였다. 도나우 강변은 그야말로 빛나는 오래된 건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사이로 부다와 페스트 지역으로 나뉜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어느 곳 하나 우열을 가릴 것 없이 아름다웠다. 부다 쪽 강변은 왕들이 살았던 부다성의 야경으로 번쩍였고, 페스트 쪽 강변엔 유명한 국회의사당이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잇는 세체니 다리의 아름다움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걸 더욱 빛나게 해준 것은 부다페스트의 새카만 밤하늘에 뜬 보름달이었다. 강변의 그 어떤 조명보다도 밝고 환하게 도시를 비추고 있던 보름달. 강변을 달리던 사람들, 늦은 시간 부다 성 앞을 서성이는 관광객들도 모두 한번씩은 자신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달을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결혼을 앞둔 우리는 두손을 꼭 잡고 달달한 산책을 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추석 날이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녹음이 가득했다. 공원의 무성한 나무만 보이는 풍경.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공기내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공원의 나무 머리꼭대기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니 자연스레 겔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저녁도 빛났지만 부다페스트의 낮은 햇빛으로 더욱 반짝반짝했다. 한국은 이미 늦은 오후일 터였다. 단정히 앉아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친척들이 다 모인 할머니 댁은 분주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한 채 모여들었다. 나는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할머니께 추석 인사를 드렸다. 이미 연세가 많이 드신 할머니는 못봐서 아쉽지만 즐겁게 지내다 오라는 덕담을 잊지 않으셨다. 

 부다페스트는 마지막 여행지였다. 우린 느긋한 마음으로 최대한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지 않기로 했다.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렇게 이 아름다운 도시를 즐기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간 곳은 바로 온천이었다. 부다페스트는 온천의 도시다. 세체니, 겔레르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이 있는데, 하나같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우린 숙소에서 좀 더 가깝고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겔레르트로 가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온천으로 출발했다. 

 한국의 최신식 워터파크를 많이 즐겨본 이들에겐 이 겔레르트 온천이 시시할 수도 있다. 한국식 뜨끈뜨끈한 탕에 비하면 이 곳 온천은 미지근한 수준이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넣고 “아 시원하다”는 탄성을 지르고 싶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게다가 슬리퍼, 수건 등의 자잘한 물건은 챙겨가야 해 모든 시설이 완비된 우리나라 목욕탕에 비하면 모자란 것도 많았다. 처음 온천 입구에 들어서면서 난 생각했다. 

 ‘에이, 유럽 온천 별 거 아니잖아?’

 그러나 천천히 돌아보니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겔레르트 온천은 명성대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천정이 높은 널찍한 홀에 마치 고대 신전에 와 있는 듯한 기둥들이 실내 수영장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고, 곳곳에 온도별 테마별로 다양한 온천탕이 있어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야외엔 파도풀까지 있어 마치 놀이동산 온 것처럼 즐길 수도 있었다. 유럽풍 인테리어가 아니라 정말 유럽의 테마파크에 와 있는 걸 실감하자 기분이 꽤나 근사했다. 

 겔레르트의 야외 한가운데엔 파도풀이 자리하고 있었다. 파도풀을 중심으로 양옆, 뒤쪽으로 선베드가 놓여있고, 사람들은 여유롭게 햇볕을 쬐거나 풀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파도풀은 우리나라 테마파크에 비하면 작은 수영장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탄 것 마냥 까르르 까르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들이쳤고, 사람들은 파도의 물세례를 맞기도 하고 파도를 타기도 하며 물놀이를 했다. 

 그 중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르고 얄쌍한 체구의 20대 남자는 얼핏 보기에도 소위 ‘인싸’ 기질이 있어 보였다. 그는 파도가 들이치면 한가운데에서 파도를 잽싸게 타 멋진 수영 솜씨로 파도의 끝까지 날아갔다. 그를 중심으로 여러 젊은이들이 파도가 나오면 자리를 잡고 물에 점프를 해댔다. 구경하는 사람들마저 흥이날 정도로 신나게 놀고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놀던 지, 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옆에서 구경만 했다. 

 습식 사우나, 실내 온천탕 등을 돌다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 파도풀에 잠깐 쉬는 시간이 왔다. 파도도 쉬고, 신나게 놀던 젊은이들도 쉬는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던 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를 우걱우걱 먹고 조심스레 파도풀에 들어가봤다. 넓은 수영장에서 위를 바라보니 선베드에 누워 있는 유럽인들의 한가로운 모습과 파란 하늘이 여유로워 보였다. 살랑살랑 시원한 물을 조심스레 팔로 휘저었다. 구름을 비추던 물이 사르르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그 때였다.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풀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입구쪽에서 물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바다 저 멀리에서 파도가 밀려드는 걸 바라보는 것 못지 않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우아아아아 철썩! 순식간에 파도는 사람들을 들고 나르며 먼 곳에 철푸덕 하고 내동댕이쳤다. 패대기쳐지건 말건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깔깔깔 웃으며 다시 파도를 맞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나와 남편도 좀 더 깊이 있는 파도를 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파도가 왔다. 점프! 완벽한 타이밍이다. 파도를 타고 앞으로 가 다시 철푸덕! 

 그렇게 타길 여러 번, 난 파도를 탈 때 누군가 옆에서 잽싸게 돌고래 마냥 파도 위를 헤엄쳐 앞으로 나아가는 걸 보았다. 그 젊은 남자였다. 어느 새 친구들과 파도풀에 들어와 다시 놀고 있던 것이다. 움직임이 어찌나 민첩하고 날쌘지, 파도를 타는 그의 움직임은 예술 같았다. 커다란 인공 바다 위에 구명조끼를 입은 채 둥둥 떠 있는 우리나라 워터파크와 달리 여기는 얕은 수심이라 아무도 구명 조끼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좀 더 날렵하게 물 위를 뛰어다닐 수 있었다. 파도가 나오는 쪽으로 뛰어가 자리를 잡고, 파도가 나오면 물을 타고 두둥실 한껏 위로 올라갔다  힘껏 팔을 내저어 앞으로 앞으로 파도를 타고 간다. 그리고 파도가 내려올 때 물에 찰싹 꽂혀지는 재미! 난 나도 모르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하고 있었다. 어찌나 재밌는지, 나중에 사람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같이 파도를 타고 같이 이동하고 같이 웃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물속에서 부딪히며 깔깔깔 웃어댔다. 

 체력이 고갈될 정도로 열심히 놀았다. 어느 새 다시 파도풀 쉬는 시간 알림이 울렸다. 사람들은 여운이 남는 표정으로 물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 때 젊은 남자는 잠시 파도풀을 돌아보고 섰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파도풀 쪽과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허공에 대고 박수를 쳤다. 모두가 그 박수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파도풀을 준비해 준 겔레르트에 보내는 찬사이기도 하면서 함께 즐긴 사람들에게 보내는 환호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왜 ‘인싸’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신나는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알고 본인이 제일 열심히 논데다 끝나고 주변에게 인사하는 젠틀한 태도까지. 그 멋진 젊은 남자가 박수를 친 순간 난 묘한 감동을 받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곧 그를 따라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겔레르트는 순식간에 박수소리로 가득찼다. 짧은 순간 서로에게 박수를 건넨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미소를 지으며 풀장을 떠나갔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녹인 우리는 일찍부터 뻗어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환한 거실을 바라보니 문득 피아노가 치고 싶어졌다. 숙소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하얀 그랜드 피아노에 앉았다. 앞에 있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따당땅땅땅 따당땅땅땅. 포레스트 검프의 주제곡이 울려퍼지고, 바람에 커튼이 날렸다. 피아노 옆 화분의 나뭇잎이 연약하게 흔들렸다. 행복했다. 

 부다페스트가 가장 좋았던 여행지냐고 물으면 바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바로 전 여행지에서 몸이 매우 아팠고, 치료를 마치고 이 곳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부다페스트는 내 몸이 회복하는 걸 천천히 지켜보며 도와주었다. 추석 보름달, 눈부신 도나우 강의 야경, 겔레르트 온천에서 박수치던 사람들, 하얀 그랜드 피아노……. 마음이 평안을 얻으니 모든 것이 좋았다. 나는 어느새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의 녹음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파르르 녹음을 적시고 있었다.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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