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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8. 2022

삶은 여행이다

파리의 소매치기

 용만과 애순의 삶은 여행이었다. 


<여행 준비>


 2014. 8월, 애순


 애순에게 아들의 전화가 왔다. 

 “엄마, 여기 와 줄 수 있어? 휴고를 봐 줄 사람이 필요한데…….”

 손주가 갓 9개월이 되었던 때 였다. 며느리가 일을 시작하게 되어 아이 봐줄 사람을 구했지만, 아무래도 낯선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기를 혼자 맡길 수 없던 아들 내외는 머나먼 고국에 있는 엄마에게 도움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부부는 루마니아에 살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딸과 육아를 해보지 않은 용만은 아들이 지나친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다. 온 식구가 함께 아들네 다녀온 지 이제 3달이 된 때였다. 무슨 상황이 있어도 자기네 일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순은 달랐다. 애순은 아들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것이 비상사태임을 인지했다. 

 “가야해.”

 애순은 살면서 한 번도 고집을 부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애순이 결단한 걸 보자 용만과 딸은 말릴 수 없단 걸 알았다. 애순이 갈 준비를 할 동안 용만은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애순은 강화도 옆 작은 섬 석모도에서 공부를 꽤 잘 해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여성에게 교육의 문이 그리 넓지 않았던 시기였던 걸 감안하면 애순의 아버지는 꽤나 열린 사람이었다. 애순은 어린 시절부터 친적 집에서 혼자 지내며 독립심을 키워나갔다. 동생들이 조금 더 커서는 아예 서울에 올라와서 함께 자취를 했다. 애순은 스무살이 되기 전부터 가장 노릇을 하며 서울살이에 적응했다. 그는 공부를 잘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시절의 장녀가 그렇듯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곧장 일을 시작했다. 가끔 이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공부를 계속 했을 것이라고, 그림을 그렸을까 무얼 했을까 상상했지만 애순은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경험해보지 않은 길을 쉽사리 가정하거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애순은 언제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번 아들의 요청은 꼭 자기가 가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애순은 혼자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아들네 집에 한 번 가보긴 했지만 그 땐 남편, 딸과 함께 였다. 육십이 넘은 중년의 여자가 홀로 낯선 땅에 가기란 대단한 결심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마니아는 애순이 혼자 가기에 너무 멀었다. 10시간 가량의 비행을 하고 다시 유럽 어느 도시에서 부쿠레슈티행 항공으로 갈아타 또 몇 시간을 가야 했다. 겁이 덜컥 날 만한 여정이었지만 애순은 아들 내외가 출근하고 홀로 남겨질 손주만 생각했다. 갈 수 있고 아니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야 했다. 


  2014. 5월, 용만


 용만은 짐을 싸는 아내를 힐끗 바라봤다. 딸내미가 화려한 등산복은 절대 안된다고 성화여서 무채색의 옷들이 캐리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용만은 파리 맛집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후 파리에 갈 예정이었다. 아들네 가기 전 유럽 몇 나라를 여행하기로 한 것이다. 용만은 늘 그렇듯 예산이 걱정되었지만 모처럼만의 여행에 내심 마음이 들떴다. 

 자식들이 온전히 독립을 한 후에야 용만은 한시름 놓았다. 아들은 결혼했고, 딸은 서울에서 일을 하며 독립해 살고 있어 더 이상 용만이 부양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집이나 그렇듯, 80년대 중산층의 이야기는 대략 비슷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시절은 꽤 잘 살았으나 IMF 이후 가계가 어려워졌다는 사정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용만의 사업은 잘 되지 않았고, 수입은 예전 같지 않았다. 자식들이 수험생이 되었을 때 부부는 생활에 치여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여러 해를 지나보냈다. 

 용만이 다시 여행을 꿈꾸게 된 건 아들이 결혼을 하고 해외에 살게 되면서였다. 군대, 어학연수 등으로 아들이 가족과 떨어져 있던 때가 없던 건 아니지만, 아예 정착해 살아갈 곳이 외국이라는 건 용만에게 큰 변화였다. 번듯한 용만의 집안에서 용만의 아들은 아랫 세대 막내였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꼼짝없이 윗 사촌 동서들의 눈치를 보며 일년에 여러 번 있는 크고 작은 제삿일 시중을 들 팔자였던 것이다. 그런 아들이 외국인 며느리를 데리고 왔을 때, 용만은 어찌 대해야 할 지 속이 시끄러웠다. 용만은 아들이 진심인지 알고 싶어 한 번 불러다가 이야기를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반대해 사랑하는 여자를 잃을까봐 평생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였다. 용만은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 사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며느리를 외국 사람으로 들이는 것까지는 용납했으나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 산다고 하니 용만은 마냥 축하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잘됐다는 생각보다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용만은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 조카들이 복작이며 사는 걸 봐온 세대였다. 비록 본인의 가족은 핵가족으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가족이 떨어져 사는 건 익숙지 않았다. 그나마 아들이 해외에 번듯한 직장을 잡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뭉쳤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던 건 여행 준비를 하면서였다. 용만은 여행을 좋아했다. 용만의 생애 첫 여행은 6.25였다. 용만이 3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용만의 부모는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데리고 아직 어린 용만을 등에 걸쳐 업은 채 피란을 떠나야 했다. 잠시 쉬어갈 때마다 땅바닥이 그리운 용만은 아버지의 등에서 벗어나 종종 걸음으로 도망치곤 했다. 용만의 아버지는 난리를 피해 피난가는 와중에 조금도 잡힐 생각이 없는 아기를 잡으러 뛰어다녀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용만이 장성한 청년이 되었을 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다. 용만은 호기심이 많았고 때때로 계획 없이 낯선 동네 탐방 하는 걸 좋아했다. 그가 젊었던 시절은 아직 우리나라의 곳곳이 꽤나 오지였던 때 였다. 그는 모르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 섬에 가 빈 초등학교에서 숙박을 하기도 했고, 그 동네 주민들과 서스름없이 친해졌다. 낯선 음식을 먹어보는 걸 좋아했고, 모험을 즐겼다. 용만은 손위 네 명의 형님들에게 할 말 할 줄 아는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아들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직장을 구하고, 그곳에 집을 구하러 출국을 하면서부터 용만과 애순, 그들의 딸은 아들네 집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용만은 잊고 있던 여행 본능이 살아남을 느꼈다. 그의 첫 유럽 여행이었다. 


<여행의 시작>


 2014. 9월, 애순


 아들은 애순이 익숙하도록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환승하는 비행기표를 샀다. 애순이 남편, 딸과 함께 아들네 집에 갔을 때 그들은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환승을 했었다. 가본 곳이라 해도 프랑크프루트 공항은 어마어마하게 큰 곳이었다. 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딸은 환승하는 길을 찾으며 꽤나 애를 먹었었다. 그 기억이 생생한 딸은 그 큰 공항에서 환승해야 할 엄마가 걱정되어 한국어와 영어 매뉴얼을 만들었다. 부쿠레슈티행 환승하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합니까? 아들의 집에 가고 있습니다. 00 게이트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등등 애순이 직면할만한 상황을 영어와 한국어로 써놓은 매뉴얼이었다. 이전에 갔던 길을 애순이 잘 기억하고 간다하더라도 여행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걸, 여행을 많이 한 딸은 알고 있었다. 딸은 프랑크프루트 공항의 지도와 함께 정리된 매뉴얼을 애순에게 주었다. “우리 환승했던 데야. 알지? 그대로 가면 돼.” 애순은 딸이 건네준 A4 용지 세 장을 받아 읽어보고 가방에 넣었다. 딸은 애순이 혹시나 영어를 제대로 읽지 못할까봐 한국어로 발음까지 써놓았다. 아임 고잉 투 마이 썬즈 홈. 웨얼 이즈 더 게이트? 애순은 오랜만에 챙김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이내 아들네 집에 가져가야 할 말린 나물과 고추장이 생각나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2014. 6월, 용만


 파리엔 해가 진 뒤 도착했다. 용만은 아내, 딸과 함께 택시를 타고 숙소가 있는 생 제르망 거리로 향했다. 토요일밤 파리의 거리는 음악이 채우고 있었다. 길거리 공연하는 밴드가 여럿 골목을 채웠고, 파리지엥들은 식사를 하거나 술 한 잔 기울이며 밴드의 음악을 듣거나 담소를 나눴다. 낯선 도시의 밤은 어디나 두렵기 마련이지만 멜로디와 낭만, 노란 가로등 불빛으로 가득 찬 파리의 밤거리는 그런 걱정을 말끔히 가시게 했다. 용만은 대충 짐을 풀고 파리의 낭만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그들은 크로와상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딸이 궁전에 가기 전에 전철역 앞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걱정했지만 용만은 빵이 생각보다 맛있고 속이 편안해 놀랐다. 과연 명성대로 궁궐은 아름답고 화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건 없었다. 그들은 정원을 한 바퀴 도는 기차를 타고 구경한 뒤,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운하로 향했다. 그리고 적당한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뱃놀이 하는 사람들을 보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파리에 도착한 긴장이 이제야 풀어지고 있었다. 정원은 이곳이 관광지라는 걸 잊게 할 만큼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궁전과 멀어진 곳일수록 현지인들이 공원처럼 산책하고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용만은 즐거워졌다. 그는 좀 더 큰 나무 아래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엔 아예 등을 대고 잔디에 누웠다. 아내와 딸이 그를 따라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베르사유의 진면목은 궁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품어주는 이 정원이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고개를 들자 나무의 곧게 뻗은 몸통이 믿음직스러웠다. 용만은 말 없이 한동안 베르사유 정원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오수를 즐겼다. 아주 오랜만에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것 같았다. 


<여행의 위기>


 2014. 10월, 애순


 애순은 딸과 용만의 배웅을 받고 게이트에 들어가 출국 심사를 마쳤다.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상 홀로 공항에 있으려니 두렵지 않았다. 애순은 중학생이 되어 이제 막 서울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석모도 새너머에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배를 타고 강화도로 와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온 길이었다. 그 때만해도 서울에 가는 건 큰 일이었다. 두려웠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미처 예상하진 못했지만 견뎌낼 자신은 있었다. 애순의 엄마 월랑은 어린 딸을 서울에 혼자 두고 돌아가는 길에 많이 울었다. 비행기를 타고 혼자 외국에 가는 게 뭐 대수랴. 그 어린 나이에도 했던 일이다. 애순은 담담하게 프랑크프루트에 도착했고, 이내 환승했던 방향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잠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었다. 애순은 당황하지 않고 비행기표를 손에 든 채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 건넸다. 공항 직원은 익숙한 듯 표의 게이트를 확인한 후 애순에게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웃었다.


 2014. 6월, 용만


 파리의 여름은 하루가 아주 길었다. 베르사유 소풍을 하고 노트르담 성당 주말 미사를 보고 저녁을 먹어도 9시까지 해가 지지 않았다. 파리의 첫 날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긴 아쉬웠다. 용만은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다. 

 “우리 에펠탑 보러 갈까?”

 딸이 말했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밤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그러자.”

 지하철을 타고 에펠탑에 도착하자 해는 지고 깜깜해져 있었다. 까만 밤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반짝 불을 밝힌 에펠탑은 눈이 부셨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곡선이 우아해 아름다운 여성의 몸매처럼 늘씬했다. 그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너나 할 거없이 고개를 꺾어들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용만은 에펠탑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 봤다는 데 의의를 뒀다. 올라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이 좋았다. 

 시끌벅적한 에펠탑 아래를 몇 번 돌다 다시 숙소로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향했다. 파리의 전철역은 낡고 후미졌다. 밤이라 사람이 없어 더욱 황량해보이는 통로를 걸어갔다. 개찰구에서 몇몇 사람들이 출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억!”

 용만이 지나가던 남자와 부딪혔다. 남자는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이고 제 갈길을 갔다. 용만은 남자와 부딪힌 여운이 남아 몇 번을 뒤돌아 남자를 쳐다보았다. 딸이 용만을 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저 사람……”

 용만은 기분이 상했다. 걷다 부딪힐 순 있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쁜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 좋은 느낌의 원인은 개찰구에서 드러났다. 

 “지갑이 없어!” 

 남자는 소매치기였다. 다행히 여행지에서 쓸 돈은 딸이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용만의 지갑엔 한국 신용카드 몇 장과 약간의 원화 밖에 없었다. 그들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에펠탑 쪽으로 다시 가봤지만 남자를 찾을 순 없었다. 문을 닫으려는 에펠탑 사무실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자국에 와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잃은 외국인 여행객을 안타깝게 바라볼 밖에는.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하고, 그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용만은 밤새 잠을 설쳤다.


<여행의 끝>


 2014. 10월, 애순


 애순은 무사히 부쿠레슈티 공항에 도착했다. 아들이 엄마가 잘 도착했다는 걸 가족에게 알렸을 때 그들은 애순의 대담함에 놀랐다. 애순은 휴고를 다시 만난 게 좋았다. 휴고가 태어났을 때, 용만과 애순은 자식들이 태어났을 때와는 또 다른 기쁨을 느꼈다. 그들의 아들 딸은 사랑스러웠지만 자식을 부양하는 건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주는 마냥 예뻐할 수 있었다. 애순은 아들 내외를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손주와 장난을 치며 놀고 산책했다. 


 2014. 6월, 용만


  용만이 지갑을 잃어버린 다음 날, 그들은 마레 지구로 향했다. 그들이 전철에서 노선표를 보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걸 뒷 좌석에 앉은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성이 보고 있었다. 대놓고 멋을 부리진 않았지만 세련된 캐쥬얼 차림의 여성이었다. 그들이 역에서 내렸을 때, 그 여성도 마침 같은 역에서 내렸다. 출구를 찾기 위해 지도를 다시 보려고 멈춰 선 용만의 가족에게 여성이 다가왔다. 

 “도와줄까요?”

 여자는 길을 가르쳐주고 제 갈길을 갔다. 딸이 여성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걸 지켜보던 용만은 여성이 길을 알려줬다는 걸 알고 꽤나 감동받았다. “그래. 저렇게 좋은 사람도 있는데.” 용만은 혼자 속삭였다. 파리에서의 좋은 기억이 소매치기로 사라질 뻔한 걸 멋쟁이 파리지앵이 되살린 것이다. 용만은 파리가 여행자들을 쥐락펴락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파리의 매력이었다. 용만은 애순, 딸과 길을 가다 사람들이 따끈한 수프를 먹고 있는 식당에 들어가 닭고기가 올려진 꾸스꾸스를 먹었다. 그 식당이 맛있어 보인다고 말한 건 아내였지만 용만도 새로운 음식을 먹는 걸 좋아했다. 용만은 외국에서 밥과 김치 없이 지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느 샌가 여행에 적응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2014. 6월, 아들


 용만과 애순, 딸이 부쿠레슈티 공항에 도착했을 때, 초조한 몸짓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 재회했다. 유럽의 모든 공항이 오래되었지만 부쿠레슈티는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작고 낙후되었다. 장성한 아들이 이렇게 먼 나라에 산다는 걸 부부는 직접 비행기를 타보고 가며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아들이 외국 여자를 데려왔을 때, 용만과 애순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적응했다. 며느리가 될 여자는 키가 작고 푸른 눈에 금발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여자는 아들에게 용만과 애순에게 ‘허그’해도 되냐고 물었다. 어색하게 첫 허그를 하고, 여자는 아들에게도 부모와 허그하라고 제안했다. 용만과 애순은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이후 처음으로 그들보다 큰 아들을 안아보았다. 그 날부로 이 가족에게 허그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아들은 부모가 도착하기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가족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엄마아빠가 보였을 때, 그는 사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꾹 참고 부모가 다가오자마자 작아진 그들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낡은 중고 도요타 자동차에 올라타 아들의 집으로 향하며 용만과 애순은 시내를 돌아보았다. 오랜 공산국가의 잔재는 도시를 회색빛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애순이 그리웠던 손자를 다시 안아보았을 때 그들은 이 모든 건 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한 여정임을 깨달았다. 용만과 애순은 몇 개월 사이 커버린 손주를 보며 삶이 쏜살같다고 느꼈다. 비행기를 타고 아들네 오고가는 여행은 큰 일이었지만 이내 비행기를 탄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들 내외를 돌보고, 손주가 커가는 걸 보는 것, 그 자체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삶은 여행이다. 용만과 애순은 오랜 세월 살아온 그네의 삶 자체가 여행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삶이 축복이라는 것도. 용만이 파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애순이 식사 때마다 소화제를 챙겨먹고, 딸이 기차에서 토를 한 건 이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제 이 모든 이야기를 향초가 피워진 아늑한 아들의 집에서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할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여행 이야기는 이 뒤로도 계속되지만 이즈음에서 마친다. 삶도 여행도 계속 되므로 이야기는 좀 더 짧아도 될 테니까. 그리고 이건 나의 부모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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