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이상한 아저씨
런던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매력적인 도시였다. 날씨가 좋지도 않고 음식이 인상적이지도 않고 사람들이 친절하지도 않았다. 헌데도 음침한 날씨는 빅벤, 템즈강의 운치와 잘 어울렸고 매쉬드 포테이토와 그래비 소스를 올린 파이는 영국 음식만의 바이브가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건 아니지만 밤거리 펍에서 시끌벅적 웃고 떠드는 런더너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엘리자베스 2세가 살고 있는 버킹엄 궁 인근은 왕이 사는 도시의 아우라를 풍겼다. 넓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여유로움과 반듯한 수트에 롱코트를 입고 길을 가는 신사들, 스모키 화장을 한 세련된 여성들을 보노라면 나도 이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런던은 굉장히 잘나가고 인기가 많아서 모두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 같았다. 나에게 먼저 다가오진 않지만 내가 다가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런던에서 나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피카딜리 서커스를 걷고 있었다. 런던의 중심부는 걷기 좋아서 그날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버킹엄 궁, 다시 피카딜리 서커스까지 천천히 산책했다. 구슬비가 부슬부슬 내려 사파리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 쓴 채였다. 예상치 못한 비라 우산이 있지도 않았지만 그 정도의 비에 우산을 쓰는 런더너들도 없었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식당 밖에 세워진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Korean?”
예상치못한 말에 놀란 나는 뒤돌았다. 키가 크고 얼굴이 긴 남자가 날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 맞다고 하자 남자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아, 너무 반가워! 나 쇼핑 나왔다가 널 본거야. 나 한국인 친구가 있거든. 00라고. 너무 친해서 같이 잘 지냈어. 김치찌개? 그런 것도 먹고.”
남자는 말이 많고 빨랐다. 따발총처럼 쏴대는 그의 말에서 내가 겨우 얻은 정보는 그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고, 친하게 지냈다는 점이었다. 그는 가끔씩 친구에게 배운 것 같은 한국말을 섞어가며 말을 했다. 여러가지 말을 했지만 내가 이해할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고 분위기는 정신 사나웠다.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듣나 싶어 집중해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 한국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식당 앞에 서 있는 걸 보더니 물었다.
“밥 먹으려고? 점심 먹을거야?”
난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내심 같이 먹자는 말이 나오길 기대했다. 그는 맞은편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저 가게 맛있어. 괜찮아.”
“그래?”
“응응 맛있어.”
같이 먹겠다는 건지 그는 나를 데리고 가게로 향했다. 가게는 신선한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었다. 벽에 갓 만든 샐러드와 샌드위치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신선한 주스도 함께 판매했다. 편의점처럼 마음에 드는 샌드위치를 골라 직접 계산하는 시스템이었다. 좀 더 정돈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던 나는 실망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는 가게에서도 정신 사납게 날 여기저기 데려갔다.
“이 샌드위치는 어때? 이것도 맛있어! 그거 먹을거야? 그래 그것도 좋지!”
얼떨결에 샌드위치 가게에 오게 된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진열대 앞에서 우왕좌왕 하며 겨우 샌드위치 하나를 골라 계산대 앞에 섰다. 계산하며 보니 남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샌드위치를 고르지도 않은 채였다.
“넌 안 먹어?”
“난 괜찮아. 그나저나 너 켄싱턴 가봤어?”
남자는 내가 샌드위치와 주스 먹는 걸 보며 또 이야기 한보따리를 꺼냈다. 그는 내게 런던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안 가봤어.”
“그렇구나. 거기 정말 좋은 동네거든. 나 그 근처에 사는데 @#@%##%^&”
켄싱턴이라는 동네가 어딘진 모르지만 남자는 그곳에 산다는 말과 그 한국인 친구도 놀러왔었다는 말을 계속 했다.
“어때? 켄싱턴 가볼래?”
“그래.”
“좋아! 너 이거 다 먹고 같이 가보자.”
정신 사납긴 했지만 난생처음 런던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게 나쁘지 않아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어딜가나 현지인을 만나는 건 재미난 일이니 말이다. 켄싱턴은 내 여행지 리스트에 있지 않았으니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내가 샌드위치를 다 먹자마자 우린 가게를 나와 길을 건넜다.
“저거 타봤어?”
남자는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빨강 2층 버스를 가리켰다.
“아니!”
“저거 타자.”
버스를 타자마자 남자는 날 2층으로 데리고 가 가장 앞 좌석에 앉았다.
“여기 앉아야 잘 보여.”
계획에도 없던 2층 버스를 타게 되어 신이 난 나는 창밖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자는 그런 내게 계속 말을 걸며 수다를 떨었다.
“이거봐. 나 아까 신발 사고 오는 길이었어. 이거 봐봐. 이거 비싼 거야.”
남자는 자기 신발을 보라면서 계속 가리켰다. 별 관심 없는 나는 보는둥 마는둥 거의 듣지 않고 창밖 풍경만 열심히 바라봤다. 남자의 수다는 질리는 맛이 있었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고 가벼웠다. 몇 정거장 안 가 우리는 켄싱턴에서 내렸다. 켄싱턴은 피카딜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오래되고 큼직한 건물들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어 묵직한 느낌이 드는 동네였다. 세련되고 호화로웠지만 사치스럽다기보다 고풍스러운 기운이 거셌다. 정거장 바로 앞에 커다란 호텔이 보였다. 남자는 나를 이끌고 호텔로 갔다.
“여기 구경시켜 줄게. 여기 진짜 좋은 호텔이거든.”
켄싱턴까지 와서 호텔을 구경시켜준다니 의아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독특하거나 유래가 깊은 호텔인가 싶어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남자는 호텔 레스토랑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직원들은 별 제지하지 않았다.
“여기 풍경 봐봐. 여기 앉아 있으면 저 바깥을 보면서 먹을 수 있어.”
남자가 말한 대로 레스토랑에서 보는 풍경은 근사했다. 탁 트인 창으로 공원의 녹음이 한 눈에 보였다. 레스토랑에서 뭔가를 먹나 싶었지만 남자는 바로 나와 또 어딘가로 향했다. 남자는 1층 로비가 내려다 보이는 2층의 휴게공간으로 갔다.
“여기 간식이 늘 구비되어 있거든. 이거 먹어도 돼.”
남자는 호텔에서 서비스로 비치해 놓은 과자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다 소파에 앉았다. 정신 없이 그를 따라 이끌려 다니던 나는 이제 좀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잠깐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혼자 있으니 차분해지며 이성이 돌아왔다. 남자는 행동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친구하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고, 밥을 같이 먹은 것도 아니고, 켄싱턴까지 왔는데 관광지도 아닌 호텔을 구경시켜주고 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뿔싸. 여행하며 지킨 내 원칙.
‘여행지에서 먼저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이제야 그 원칙이 생각났다. 처음부터 남자는 이상했지만 그의 산만한 태도와 말투에 홀린듯이 여기까지 왔다. 정신 차린 나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남자에게 돌아갔다. 그의 행동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직접 묻고 답을 듣고 싶었다. 남자는 아직까지 테이블 가까이 몸을 수그리고 과자를 먹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과자를 물고 나를 바라봤다. 난 그에게 물었다.
“너, 나 여기 왜 데려왔어?”
그 때, 나는 이제껏 보지 못한 체험을 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이 처음 개봉했을 때, 관객들은 톰크루즈가 사람 얼굴 형태의 가면을 벗는 장면을 보고 경악을 했다. 그건 단순히 얼굴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봤던 사람이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다. 나는 한 사람이 그가 뒤에 숨겼던 이중적인 면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장면을 보았다. 남자는 내가 질문을 함과 동시에 얼굴 표정이 바뀌며 몸을 소파 뒤로 천천히 기대어 앉았다. 등을 대고 앉은 남자는 다리를 꼬고 두 손을 다리에 얹은 채 양손가락을 끼었다. 천방지축 키 큰 수다쟁이에서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한 전문가로 바뀌는 시간은 단 2초였다. 나는 속으로 매우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려온 태세였다. 그는 이제껏 말투와 전혀 다르게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그제서야 모든 게 확실해졌다. 남자는 처음부터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무슨 제안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 피카딜리에서 말을 걸고,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말을 하고, 내가 점심을 먹을 때 켄싱턴에 가자고 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제안인가 싶어 내 눈은 커다래졌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부자가 있어. 그는 정말정말 돈이 많아. 그에게 너를 소개할까 해. 넌 영어도 잘 하고 예쁘니까 그가 좋아할 거야.”
맙소사. 토할 것 같았던 건 그의 말 때문이었다. He will love you. 그가 나에게 정확히 무슨 제안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알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이거 하나였다. 거절해야 한다! 속으로 부글부글 하는 마음을 다잡고 겨우 말을 꺼냈다.
“거절이야.”
난 곧장 일어나서 뒤돌아 길을 갔다.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앉은 채였다.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하지 않겠어?”
난 계속 걸었다. 도대체 내가 왜 후회한단 말인가? 뭐가 아쉬워서? 호텔 로비를 걸어가는 내내 남자가 2층에서 내 뒷모습을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화를 삭히지 못한 나는 분노로 심장이 끓어올랐다. 그는 분명 내게 수치스러운 제안을 했다. 그가 계속 자기 신발이 비싼 거라는 둥, 이 곳이 고급 호텔이라는 둥, 켄싱턴에 산다는 둥 돈 자랑 아닌 돈 자랑을 해댔던 것은 결국 나를 꼬시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뺨을 한 대 후려칠까 고민이 되었지만 사실 겉으로 보면 그가 나에게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명목 없는 싸움이 될 게 뻔한 데다 여긴 남자의 영역이다. 우선 자리를 떴다.
호텔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내 옆으로 넓은 켄싱턴 가든과 하이드 파크가 걷는 내내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아까 남자가 보여줬던 레스토랑에서 봤던 멋진 풍경이 바로 이 공원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화가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이상한 제안을 받은 것 자체가 우선 화가 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난한 동양인 여자가 그의 타겟이었던 것 같다. 길가에 서서 멍하니 레스토랑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그런 인상이었을까? 나는 한국에선 나름 잘 나가는 직장인인데, 그런 취급을 받은 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솔직히 남자가 제안을 한다고 했을 때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현지인 친구를 사귀어 런던에 다시 올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 어쩌면 런던의 회사에서 스카웃해서 런던에서 일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받길 바라는 공짜 기대감이 그에 의해 건드려 졌단 걸 알았을 때 난 화가 났던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건 받아 들이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고, 그 생각은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내가 그의 말에서 진짜라고 느꼈던 몇 가지는 그에게 정말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한국에 다시 간 것인지 친구를 그리워하는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정말로 한국인이 아니면 모를 김치찌개 정서를 쿡 찌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있었을지 모르는 한국인 친구와 그 친구에게 그가 제안했을 거래를 상상하노라면, 맑은 런던 하늘도 찌뿌리고 보게 되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고,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고 좋은 면만 보는 것이 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헌데 세상은 그런 내게 조차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남자의 제안은 두고두고 찝찝함으로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찝찝함이 가신 건 어느 날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였다. 회사에 싫어하는 사람이 생겨 마음이 좋지 않았던 날이었다. 사회 생활이란 누군가 날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날은 아무리 유레카를 외쳐도 개운하지 않다. 날 싫어하는 감정을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가 누군갈 싫어하는 감정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답답하기 때문이다. 나의 우울한 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던 엄마는 말씀하셨다.
“어둠은 절대 빛을 이길 수 없어.”
그리고 칼같이 내게 이야기했다.
“부정적인 마음을 끊어야 해. 그런 마음은 너에게 하나도 도움이 안돼. 잊거나 참는 게 아니라 그냥 끊는 거야. 마음에서부터 끊어. 마음에 밝은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은 가시게 되어 있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 토닥이며 위로해줄줄 알았던 엄마는 가슴 앞을 손으로 긋는 시늉까지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인생의 깊은 가르침은 이래라저래라 행동하라는 구체적인 조언보다 더 올바른 통찰력을 가져다준다. 난 다음 날부터 날 싫어하고 나도 싫어하는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배제했다. 다행인 것은 함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자 그 사람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경험으로 오래도록 내 안에 찝찝함으로 남아 있던 런던의 이상한 남자 역시 내 마음에서 도려내었다.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괴롭혔고, 그 제안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은 것이 찝찝함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짧고 즐길 것은 많은데 무엇하러 싫어하는 거에 마음 쓰며 산단 말인가.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모두 사랑받거나 나도 모두를 사랑할 수 없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 난 더 회의적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를 만난 경험은 내 인생을 확 바꾸거나 가치관을 뒤흔들 만큼 강력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다른 나라 대도시에 가도 조심 또 조심 행동하게끔 주의를 준 예방주사였다. 안 좋은 기분을 주는 사람이 생기면 난 호텔을 나와 걷던 하이드 파크를 떠올린다. 그리고 되새긴다. 무시하는 것도 때론 인생에 약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