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펜의 독일 친구들
여행하며 가장 설렜던 만남은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막 넘어가던 길에 일어났다. 메콩강을 통해 캄보디아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패스트 보트, 슬로우 보트. 말 그대로 빠른 보트와 느린 보트이다. 난 굳이 웃돈을 주고 가야 하는 패스트 보트를 탈 이유가 없어 슬로우 보트를 예약했다. 베트남에서 보는 메콩강도 그리 도시적이진 않았지만 캄보디아로 넘어가니 풍경이 확 달라졌다. 메콩강 투어할 때 만난 미국인 수가 캄보디아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었었다.
“너무 가난해. 너무너무.”
수상가옥이 즐비했던 베트남과는 달리 캄보디아 영역의 메콩강엔 제멋대로 자란 풀더미와 나무가 우거진 숲, 소에 물을 주는 소년 밖에 없었다. 슬로우 보트는 이 모든 걸 지나치게 천천히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무 것도 없는 강변의 풍경은 나중엔 감흥도 없어져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아침에 출발한 보트는 중간 국경 영역에서 잠깐 쉬는 시간 겸 점심 시간을 제외하곤, 이제나저제나 흙탕물 위를 느릿느릿 기어갔다.
캄보디아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해가 져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까지 데려다주는 작은 버스에 올라타 겨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다 뒤늦게 버스에 올라탄 나는 보트에서 친해진 일행과 떨어져 뒷문 바로 옆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자리에 앉자 뒷문이 닫혔다. 그 때 버스 창문에 뚜렷이 적힌 글자를 보았다.
[자동문]
한국에서 운행하던 중고 버스가 캄보디아까지 가서 남은 여생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 내어 말했다.
“하하. 이거 한국어야! 자동문!”
그러나 나의 외침은 소리없는 아우성처럼 메아리없이 울려 퍼졌다. 프놈펜에 도착해 또 다시 숙소를 알아봐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귀찮음, 오랜 보트 여행으로 피곤함에 찌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공기를 메우고, 난 민망함에 곧추 앉으려 했다. 그 때였다.
“뭐라고 했어?”
내 바로 뒷 좌석에 앉은 남자가 내 쪽으로 자세를 숙이며 물었다. 머리를 거의 밀다시피 한 짧은 스타일인데도 두상이 동그란 계란 같아 잘 어울렸다. 순한 소 같은 눈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민망할까봐 대답해준 게 뻔히 보여서 어찌나 고마웠던지.
“이거 말야. 이 글자. 한국어거든. 자동문이라고 쓰여있어. 한국에서 운행하던 건가봐.”
“아, 그렇구나.”
그의 이름은 플롯. 독일 청년이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데 미소가 아주 예뻤다. 아구 이쁜 것,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플롯은 친구 율리아와 여행 중이었다. 율리아는 플롯 친구의 여자친구라고 했다. 둘이 함께 여행하다 나중에 율리아의 남자친구이자 플롯의 친구가 합류할 거란다. 친구의 여자친구와 같이 여행을 하다니, 역시 서양인들의 오픈 마인드는 대단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단순하게 일정 맞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고 안돼는 사람이 뒤늦게 함께하는 걸로 보였다. 이러나저러나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플롯의 동행인 율리아는 짧은 금발머리를 뒤로 쫑긋하게 묶고 안경을 쓰고 있어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플롯과 내가 옆에서 말을 하는 내내 옆에서 책을 읽거나 잠을 잤고 우리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여행하다 만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뻔하지만 대부분 여행이야기다. 그동안 어떤 여행을 했는지, 어디를 갔는지 정도는 자연스레 서로 공유하지만 의외로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와 플롯은 그동안 여행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솔직히 잘 찍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말 중에 와 닿았던 것이 있다.
“사진 지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흔들린 것도 내버려 둬.”
정말로 그는 엄청난 양의 사진을 찍었는데, 흔들리거나 초점이 나간 사진도 모두 남겨두었다. 여행하다 본 풍경, 행인, 표지판, 동행인 율리아…… 그가 찍은 사진을 보노라면 잘 찍진 않았어도 피사체에 진심을 담아 찍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진이었다. 나는 천천히 플롯이 찍은 사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플롯도 자기가 촬영한 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처음이었는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플롯 덕분에 프놈펜까지의 한 시간 반 여정이 전혀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덧 버스는 프놈펜에 도착했다. 나는 플롯과 율리아에게 숙소를 같이 찾아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그들은 흔쾌히 오케이했고, 우리는 여행자들이 많이 묵는 번화가로 향했다. 프놈펜은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엔 굉장히 조용하고 낙후되어 있었다. 베트남의 시골 동네는 이에 비하면 으리으리한 편이었다. 시내 중심가지만 건물들은 높아야 4~5층 정도였고, 네온사인 간판 한 두개가 골목을 밝히며 번화가라는 티를 내었다. 우리는 주변 숙소 중 가장 커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나와 플롯이 그새 친해진 걸 눈치챈 율리아는 플롯에게 숙소 선택권을 주었다.
“둘이 방을 돌아보고 괜찮은지 정해줘.”
나는 깐깐해 보이지만 성격은 쿨한 율리아가 맘에 들었다. 방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얼른 쉬고 싶었던 나는 이 정도면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고, 플롯도 괜찮은 것 같다고 해 우린 체크인을 했다.
율리아와 플롯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내 방에 짐을 풀었다. 각자 씻거나 쉬고 나서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씨엠립 가는 버스표를 알아보자고 약속을 한 후였다. 다시 만났을 때 플롯은 베트남 국기 문양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새빨간 바탕에 노란 별 하나가 가슴 가운데 턱 그려진 티셔츠는 분명 기념품이었을 터였다. 촌스러운 패션이었지만 나름 귀여웠다. 우리 셋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둘은 길거리 상점에 들어가 맥주 캔을 사더니 그 자리에서 열어 한 입 마시고 걷는 내내 물처럼 들이켰다. ‘길맥’은 상상도 못했던 내게 색다른 문화충격이었다.
“길에서 맥주 마셔!”
멋쩍어 소리치자 플롯이 센스 있게 답했다.
“우리 맥주의 나라에서 왔거든!”
난 씨엠립 행 버스표를 샀고 거리를 걷는 내내 율리아는 묵게된 숙소의 방이 못미더워 플롯에게 잔소리를 했다.
“방에 휴지통도 없고 이불도 없고 수건도 없어. 화장실도 더럽고.”
하룻밤만 자고 다음날 일찍 씨엠립으로 떠날 나로선 세세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 대충 보고 괜찮다고 한 게 아닌가 새삼 미안해졌다. 띄엄띄엄 보긴 플롯도 마찬가지여서 율리아의 말에 크게 반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일정, 예산, 방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율리아는 논의가 길어지자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미안해. 우리 잠깐 독일어로 이야기 좀 할게.”
율리아가 크게 의식하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은 내게 큰 감동이었다. 산토리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싫거나 좋거나 잘하거나 못하거나 영어를 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가는 걸 두려워 하는 데에는 나의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몸이 아프다거나, 위험에 처한다거나, 내 나라를 떠나 겪게 될 모든 곤란한 상황은 결국 소통의 문제로 귀결된다. 굳이 응급상황이 아니더라도 잘 하지 못하는 영어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든다. 영어 공부 해야겠다는 기본이고, 때때로 한국에 관해 묻는 질문에 말이 막힐 때마다 역사 공부도 하고 신문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토리니 섬을 갔을 땐 언어 때문에 상대적 외로움을 느꼈다.
난 다른 나라 친구들과 동행을 했다. 그들은 함께 여행하는 친구 둘이었는데 P는 말이 많았고, J는 조용한 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P는 밝은 성격 탓도 있었지만 우선 영어를 잘했다. 잘하니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고, 자연스레 말이 많아 보였던 것이다. 반면 J는 상대적으로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예 못하진 않았던 것 같다. 본래 수줍음이 많은 성격에 영어도 친구에 비해 잘하지 못하니 자연스레 말하는 횟수가 적었던 것이다. 나도 그다지 유창한 편이 아니었지만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어서 함께 잘 다녔다. 두 사람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어서 같이 섬을 둘러보는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외로움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왔다. 셋이 길을 가다 무슨 얘기가 나왔다. 시덥잖은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때 J가 모국어로 무슨 말을 하며 웃었다. P도 그 말을 듣고 함께 신나게 웃었다. 바로 옆에 있던 나는 함께 말을 하다 순식간에 대화에서 제외되었다. 분명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알아 들을 수 없는 농담에 웃을 순 없는 일이다. 그 순간 나는 외로웠다. 그들이 나의 외로움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난 소외되고 있었다. 옆에 자리한 것만으로도 내가 여기 왜 있나 민망함이 들었다. 내가 아는 J는 그 정도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편한 말이 먼저 나온 버릇이었을 게다. 그런데도 난 J가 예의 없게 느껴졌다. 옆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라고 여겨졌다. 언어란 소통의 수단일 뿐이란 걸, 영어를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라는 걸 짧은 순간에 깨달았다.
나만 이런 소외감을 겪은 건 아니다. 내 팀엔 필리핀에서 온 미코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곳은 글로벌 회사이니 만큼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싶으면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대부분 대륙을 관장하는 헤드 오피스로 이동하고 싶어했고, 아니면 더 큰 마켓이나 대륙을 선호했다. 한국은 요즘 흔히 말하는 K-POP이나 K-콘텐츠로 인기가 많았지만 한국어라는 장벽이 있어 외국 지원자를 쉽게 받지도 않았고 지원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여러 사정으로 해외에서 직원을 뽑기로 결정했고, 미코 역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큰 결심을 하고 한국에 온 터였다. 필리핀에서 온 만큼 영어는 네이티브였고, 일도 웬만한 한국 사람이나 글로벌 인재보다 훨씬 잘했다. 미코는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서 자리를 잘 잡았고 팀원들, 광고주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난 채용할 일이 있을 때 인터뷰에 미코를 꼭 데리고 들어갔다. 그건 영어 인터뷰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함께 일할 사람을 고를 때의 합을 보기 위함이 컸다. 인턴 사원을 뽑을 때의 일이었다. 여러 명의 지원자가 눈빛을 초롱초롱 밝히며 질문에 답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코의 질문 차례가 오자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는 게 보였다. 미코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함께 일을 할 때 꼭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지원자들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며 답을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답을 하다 막히자 한국말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긴장해서 그랬겠지만 우선은 미코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게 우선이었으므로 “영어로 답해주세요.”라고 다시 요청했다. 그는 몇 번 시도를 하다 안돼겠는지 다시 한국말로 답을 했다.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건 내 질문이 무시 당해서가 아니라, 미코가 무시당하는 기분을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그 지원자는 내가 보기에 영어를 아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답을 제대로 못한 것은 태도의 문제였다. 스스로 느끼기에 부족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해 답을 끝까지 했어야 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함께 일할 사람과 최소한의 소통을 할 수 있는지 였는데, 그런 자세라면 미코와는 일을 못할 터였다. 우리는 당연히 그 사람을 뽑지 않았다.
율리아가 아주 자연스럽게 “미안해. 우리 독일어로 이야기 좀 할게.”라고 말을 한 것은 그가 평소에 자신과 이야기하는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던 대목이었다. 율리아는 자신들이 모국어로만 대화하면 내가 소외감을 느낄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영어를 썼던 것이고, 깊은 이야기가 나와 모국어를 사용할 일이 생기자 나에게 양해를 구한 것이다. 산토리니에서 그런 수모(?)를 겪었던 나로선, 나와 함께 있는 내내 영어로 대화하려고 했던 플롯, 율리아의 깊은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율리아처럼 모국어를 사용할 때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모국어를 쓰는 건 너무 당연한 내 권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상대방에게 양해 구해야 한단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나로선, 미코와 일을 하면서 더욱 그 필요성을 느꼈다. 난 미코가 처음 팀에 합류할 때부터 팀원들에게 되도록 영어를 쓰도록 권유했다. 가뜩이나 혼자 한국에 올 미코가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한국어를 쓸 일은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 때마다 미코에게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미코는 괜찮다고 하며 다른 일을 했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코는 때론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율리아와 플롯은 한참을 독일어로 이야기한 뒤, 결국 옆에 있는 다른 숙소의 방도 둘러보았다.
“내일 방을 옮기려고.”
그들은 하룻밤 더 묵을 예정이어서 다른 숙소로 옮기는 걸로 짧은 토의를 끝마쳤다. 율리아는 끝까지 매너 있었다.
“나는 먼저 들어가 쉴 테니까 둘이 좀 더 걷다 들어와.”
플롯과 나는 프놈펜의 밤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좀 더 나눴다. 헤어질 걸 아쉬워하자, 플롯이 제안했다.
“우리랑 하루 더 프놈펜에 있다 같이 씨엠립 가는 건 어때?”
고민이 되었지만 그렇게 되면 앙코르와트를 볼 일정이 너무 짧아졌다. 그 여행은 앙코르와트를 위한 여행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정을 바꾸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씨엠립에 도착하고나서도 플롯과 율리아와의 여행을 끝낸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남자답고 순수한 플롯과 야무지고 배려심 있는 율리아는 함께 여행하기 좋은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새벽같이 숙소를 나오며 그들에게 쓴 엽서를 프론트에 맡기고 왔지만 아쉬운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씨엠립 작은 시내에서도 혹시나 마주칠까 거리의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짧지만 진했던 그들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플롯은 내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놀라며 말했다. “내 가방 안에 있는 게 뭐게? <데미안>이야!” 율리아는 플롯과 내가 버스에서 수다 떨 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따뜻하고 정겨운 눈빛으로 날 바라봐주었던 플롯. 새침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율리아. 처음엔 플롯의 다정함에 설렜지만 나중엔 율리아의 속깊은 배려에 반했다. 어떻게 친구의 여자친구와 여행하지,란 생각은 율리아와 플롯의 철저한 동행인 관계를 보고 있으니 이해가 갔다. 그들에게 내가 어떤 인상으로 남아 있을 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남긴 배려심과 작은 예의는 진한 표식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