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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2. 2022

나이든 돌과 사랑하기

솔즈베리의 스톤헨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나이든 돌을 보는 게 좋다. 자신을 만든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혼자 덩그러니 남아 그곳의 오랜 세월을 지켜낸 돌들이 있다. 자연의 것을 사람이 이고 지고 깎아 하나의 건축물로 만든 돌엔 인간의 숨결이 들어가 있는 듯 하다. 모든 역사의 순간이 자기 안에 저장된 돌들. 피라미드, 앙코르와트, 스톤헨지. 이 거대하고도 나이든 돌들은 묵혀둔 이야기가 많지만 의외로 침묵한다. 그리고 숨겨진 옛 이야기가 듣고 싶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아주 조금씩 말을 꺼낸다. 한 번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에 매료되어 또 다시 돌을 찾아간다. 오래된 이야기엔 힘이 있다. 

 이직을 하게 되었을 때 새 회사 가기 전까지 겨우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일주일이라고 해도 직장 생활을 하며 이 정도로 길게 휴가 가기가 어디 쉽던가. 황금같은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어디든 가야 했다. 화려한 도시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쇼핑도 하고 싶고, 휴양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물 위에 둥둥 떠있고 싶기도 했다. 문득 피라미드가 생각났다. 오래된 비밀을 몰래 알려준 듯한 고대의 돌들. 그래. 돌을 보러 가자. 오래된 돌을 보러 가는 것이 이 황금의 시간을 보내는 데 완벽할 것 같았다. 세계의 여러 돌들을 찾아보았다. 스톤헨지, 모아이 석상, 러쉬모어 산의 미국 대통령 얼굴, 만리장성 등등……. 보고 싶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이왕 가는 거 아시아보다 멀리 가고 싶었고, 또 너무 멀어서 오가는데 시간을 다 뺏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마 유럽이 적당한 거리일 것 같아 스톤헨지가 있는 영국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잉글랜드는 겨울인데도 많이 춥지 않았다. 스톤헨지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선 솔즈베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관광 버스를 타야한다. 워털루 역에서 솔즈베리행 기차를 탔다. 외곽으로 향할 수록 푸른 잔디 위에 한가한 시골 주택들이 눈에 띄었다. 기차역에서 나오자 마치 놀이동산에 나올 것 같은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 보였다. 작은 운하엔 백조들이 놀고 있고, 집들은 유럽 배경의 동화책에서 보던 것처럼 뾰족한 지붕이었다. 하얀 회벽에 어두운 색 삼각형 지붕 집, 빨간 벽돌 지붕 집, 벽에 나무로 격자무늬처럼 모양을 낸 집…….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이 나란히 어우러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골목골목엔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이 있었고, 알록달록 캔디와 초콜릿이 가득한 귀여운 상점에선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보기만해도 배가 불러오는 풍경이었다. 달달한 향기를 맡으니 기분도 금새 좋아졌다. 마을을 잠시 둘러보고 스톤헨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솔즈베리 평원으로 가는 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푸르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버스가 가는 길목 마다 고목 나무들이 길 양쪽 가로수로 늘어져 서 있었다. 평원을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언덕에 돌무더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톤헨지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거석에 관광객들이 술렁였다. 버스는 스톤헨지 입구 가까이에 정차했다. 입장료를 사고, 추운 몸을 녹이려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맑은 날이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게다가 넓은 평원엔 나무 한 그루 없어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아야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디오 가이드 하나를 대여해 스톤헨지 곁으로 다가갔다. 

 스톤헨지는 집시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벌였던 전례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 보지 못하고 정해진 코스대로 돌아야만 한다. 돌을 만질 수 없고 멀리서만 볼 수 있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나마 일부 구간에선 가까이서 스톤헨지를 볼 수 있었다. 입구에서 왼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른 오후였는데 해는 벌써 기울어지려 하고 있었다. 한 바퀴 돌며 스톤헨지를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가까이 돌을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스톤헨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후 햇살이 평원과 5천년 된 거석을 비추었다. 스톤헨지는 그림으로 그려보니, 원형의 형태로 만들어 진 것이 더욱 실감났다. 안쪽의 커다란 거석들을 중심으로, 가장자리 원을 이룬 돌들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세워진 거석 위에 지붕처럼 커다란 돌이 올려져 있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며 또 하나 발견한 점은 세워진 커다란 거석 위에 여드름처럼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는 세워진 바위 위에 가로로 돌을 놓을 때 떨어지지 않도록 레고처럼 서로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한옥 서까래를 짜맞춤해 조립하는 것처럼 돌도 조립해 놓았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 옛날엔 모든 세워진 돌 위에 가로로 누여진 돌이 있었고, 이를 위에서 보면 원형의 모습을 띈다 했다. 이 신비로운 모습에 스톤헨지가 왜 만들어졌는지 더더욱 의문에 싸였을 것이다. 

 거대한 돌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바람 부는 평온에서 스톤헨지를 그리고 있노라니, 마치 내가 고행을 나온 스님처럼 느껴졌다. 날이 점점 추워오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4시면 밤이 오는 겨울의 영국은 이미 해가 질 시간이었다. 그림을 다 그리고 한 바퀴 더 돌기 위해 일어섰다. 다시 시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천천히 걸음을 이어가던 난 해가 지는 방향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해를 등진 거석들은 새카만 그림자로 변신해 거대한 거인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까맣게 변한 거석들. 이미 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스톤헨지는 그림자 그 자체였다. 뒤로 아직 흰 빛을 환하게 내뿜은 태양이 부드럽게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한 편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에 난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스톤헨지 뒤로 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 시커먼 돌들의 그림자가 필름 사진 인화돼 듯 내 마음에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운명이란 게 정말 있을까. 내가 여행을 했던 2011년 만해도 스톤헨지의 역할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5월을 기준으로 가장 최근에 밝혀진 스톤헨지의 비밀은 이 돌들이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였다는 것이다. 원리는 이렇다. 스톤헨지는 안쪽에 세워진 10개의 블루스톤이 작은 원을, 바깥의 30개의 사센 스톤이 큰 원을 이루고 있다. 원의 바깥 쪽엔 일정한 곳에 네 개의 스테이션 스톤이 놓여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사센 스톤은 1~30으로 이름을 붙여놓았고, 돌 사이의 간격과 돌 자체의 너비를 보았을 때 1~11, 12~20, 21~30이 한 그룹으로 묶인다. 각 돌은 30일 한 달 내의 하루를 의미하고, 3 그룹은 ‘주’ 개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돌들이 하지와 동지 사이 해가 뜨고 지는 길을 중심으로 정확히 대칭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1번 돌과 15번 돌을 직선으로 이으면 하지에 해가 뜨는 북동쪽과 동지에 해가 지는 남서쪽을 가리킨다. 

 여기까지 스톤헨지의 연구를 읽었을 때 문득 내가 봤던 일몰이 생각났다. 돌 사이로 저물었던 태양. 환하게 흰 빛을 내뿜으며 돌을 검은색으로 물들였던 태양의 아이러니. 새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해와 새카만 돌. 도저히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던 일몰이었다. 내가 크리스마스 직전에 한국에 왔으니 설마……? 달력을 찾아보았다. 2011년 12월 22일. 세상에. 동지였다! 내가 본 일몰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15번 돌과 우두커니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16번 돌 사이로 떨어지는 해였던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세상에 알려진 지 2개월 밖에 안된 따끈따끈한 정보였다. 

 여행하기 전, 고대했던 스톤헨지를 보면 울음이 터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퇴사를 했지만 며칠의 인수인계로는 부족했던 지 한국에선 매일같이 연락이 왔다. 회사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뜨면 그때부터 긴장되며 스트레스가 확 올라왔다. 그러나 고생하는 동료를 위해 안 받을 순 없었다. 밤엔 자면서 한국 꿈을 꾸고 일어나면 내가 영국에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연락은 서서히 잦아 들었다. 찬 바람을 맞으며 스톤헨지 앞에 있을 때 Keane의 <Somewhere only we know>가 귀를 적시고 엽서 같은 영국 남부 평원의 모습이 영화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난 울지 않았다. 


I`m getting old and I need something to rely on

So tell me when you`re gonna let me in

I`m getting tired and I need somewhere to begin


  스톤헨지를 한참 바라보며 내 앞의 돌들이 살아온 5천년의 역사를 상상했다. 누가 세웠든, 어떻게 세웠든, 이곳의 돌들은 때론 넘어지고 망가지긴 했어도 5천년을 버텨 살아온 것이다. 아니, 살아낸 것이다. 막 퇴사를 하고 떠나온 난 과거와 이별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나에게 스톤헨지는 ‘내가 5천년을 살고 있는데, 너도 잘 살 수 있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을 입은 암석이 나에게 괜찮다 한다. 무엇이든 시간이 해결해준다면서……. 꿋꿋하게, 나도 잘 살 수 있다 다짐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위대한 치유의 돌들은 내 일기장 깊숙이 그림으로, 마음 속 깊은 곳 영혼의 친구로 단단히 새겨놓았다. 옮긴 회사에서 우당탕탕 새출발을 하면서도 잘 견딜 수 있던 것은 스톤헨지에 다녀와서 모든 걸 훌훌 털었기 때문이라고, 난 지금도 믿는다. 

 첫 사회생활을 하며 엉겼던 나의 마음은 마음의 정화를 얻고 평화를 되찾았다. 그건 아마도 운명처럼 만난 동지의 햇살과 그림자로 변해 잠깐 환영 같은 모습을 보인 거석 덕분일 것이다. 내 짧은 삶 어느 한 부분이 스톤헨지의 기나긴 세월 속 하나와 합쳐졌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나보다 훨씬 오래 그 자리에 있을 저 돌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눈 아래 깊이 내려 앉은 삶의 무게를 인 채 이곳에 왔던 한국의 평범한 여행자가 그들로 인해 치유받고 떠났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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