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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5. 2022

때론 인생은 영화처럼

카이로의 수세미 할아버지

 그리스, 산토리니 


 인연은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슬그머니 다가왔다. 산토리니로 가는 페리 안은 ‘겨울 그리스 섬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여름 관광객들의 의지가 엿보일 정도로 텅텅 비었다. 배는 생각보다 훨씬 컸는데, 사람이 없으니 어느 좌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객실엔 아시아 여성들이 몇 명 있었고 그 중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배낭에 태극기가 붙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눈여겨 보던 그 사람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게 된 건 둘 다 산토리니에 내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어이, 안녕하세요.”

  털털한 대답이 단번에 나왔다. M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쿨하고 당찬 여행자였다. 배에서 함께 내려 동행하게 된 대만 친구 페이와 쟈시엔은 M의 호쾌한 행동과 말투에 내내 깔깔 웃었다. 나도 홀로 여행자였지만 커다란 배낭을 메고 혼자 여행하는 그는 노련미가 넘쳐흘렀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한가한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걸걸한 사투리로 대화를 나누는 M은 시원시원한 여걸이었다. 그리하여 누구랑 통화했냐고 물은 질문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신랑”이라고 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두고 혼자 배낭여행을 할 수 있다니. 그 열린 마음과 당당한 자세가 어찌나 멋지던지. 우리는 나름대로 조화가 훌륭했다. 밝고 쾌활한 M은 채도 강한 진파랑색이었다. 나는 맞장구를 치거나 추임새를 넣으며 분위기 맞추는 톤 다운된 초록색이었다.

 겨울의 산토리니는 텅텅 비어있었다. 관광객들은 여름에만 오기 때문에 한 철 장사하고 본토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안내소는 자주 문을 닫았다. 마을을 오가는 버스에도 사람이 타지 않은 채 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어딜가든 우린 눈에 띄었다. 상점 하나 문 열지 않은 썰렁한 해변가, 떠돌이 개와 고양이만 남아있는 이아 마을, 한적한 언덕에서 풀을 씹는 당나귀……. 어딜가든 주인공이 되는 명랑한 아시아인들은 섬 여기저기 웃음을 뿌리며 누볐다. 산토리니 피라, 이아 마을의 회백색 집들에 어울리는 푸른 빛의 여행자들. 파랗게 빛나는 며칠을 함께 보내고 우린 여느 여행자들처럼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터키, 카파도키아 


 “저… 한국 사람이세요?”

 이제 막 세수한 듯한 여성이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방에서 나오며 나에게 물었다. 양치를 하려던 참이었는지 칫솔을 들고 있었다. 한국말 소리에 아침식사를 하러 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성의 표정은 초조해보였다. 

 “네, 맞아요.” 

  여성의 표정은 익숙했다. 낯선 땅에 와 모든 것이 두려운 상태. 그 와중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우연히 봤고, 서둘러 달려나와 지나가던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어설프고 어리숙한 여행자. 그것이 Y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미 여행에 적응할 대로 적응한 난 몇 가지 정보를 알려주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우린 곧 투어 버스에서 만났다. 

 황색 사막에 기암 괴석이 들쭉날쭉 외계인처럼 불친절하게 서 있는 곳, 카파도키아. 층층이 쌓인 돌의 여린 층이 오랜 시간 바람에 깎여 윗 부분만 버섯 모자처럼 크게 남겨져 있기도 했고, 커다란 돌 사이사이에 수도사들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구멍이 뻥뻥 뚫려 있기도 했다. 마치 땅처럼 크고 거대한 편평한 돌이 있는가 하면, 파도파도 끝이 없는 지하 세계도 있었다. 어딜가나 보지 못한 돌들의 연속이었다. 스타워즈 촬영장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실제로 촬영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카파도키아의 자연은 이색적이었지만 실제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런지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고 맑은 날이었다. 걷기에 좋았다. 광활한 평야를 걸으며 햇살을 맞으니 외계 행성 같던 붉은 돌의 평원도 삭막해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만난 Y와 난 노란 돌을 오고가며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았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이스탄불이었다. 그는 여행을 하며 훨씬 여유로워져 있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먼 나라를 택해 떠나왔다는 이야기를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친해져보니 Y는 아주 웃긴 사람이었다. 유쾌했고, 어느 상황에서나 유머러스했다. 첫 만남을 회고하며 많이 웃었다. 마음이 잘 통한다는 걸 느낀 우린 이집트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카파도키아 암석처럼 밝은 노랑빛의 Y와 여행을 하려니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집트, 카이로


 인연은 또 한 번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슬그머니 다가왔다. Y와 카이로 숙소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밝은 표정을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이”

 M은 방금 전 헤어진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나를 불렀다.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만나고 다시 카이로의 시내에서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산토리니에서도 능숙한 여행자처럼 보였지만 그세 이집트를 오래 여행한 M에게선 베테랑 여행자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그간의 안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여정을 물었다. 이제 막 이집트에 온 우리와 달리 M은 여행을 다 끝내고 내일 새벽 터키로 넘어간다고 했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우리는 정보를 주고 받았다. M은 여행지보다 더욱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꼭 수세미 할아버지에게 환전해.” 

 “누구요?”

 수세미 할아버지. 알고보니 그는 이집트 여행자들에게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타히르 광장 뒤편에 큰 재래시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여행자를 대상으로 환전을 해준다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도 타히르 광장 근처였다. 환전소보다도 좋은 환율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보가 확실하지 않았다. 시장 어디에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M은 웃으며 말했다. 

 “시장에 있어. 가서 찾아봐. 보면 누군지 알거야.”

 M에게 알짜배기 정보를 받았지만 우린 금세 수세미 할아버지를 잊었다. 신화 같은 그의 명성도 그렇지만 어떻게 찾아야 할 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러 나서기가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생각난건 룩소르, 아스완을 모두 돌아보고 바가지에 진절머리가 날 때 쯤이었다. 카이로로 돌아온 Y와 나는 환전을 해야 했다. 그 때 M의 말이 생각났다. 또 바가지 씌우면 어떡하나 걱정은 되었지만 M의 추천이니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마음에 안들면 환전을 안하면 그만이니 믿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그를 찾기로 했다. 

 우린 바로 다음 날 수세미 할아버지를 찾기위해 시장으로 나섰다. 타히르  광장 뒤쪽으로 걸어가니 어마어마하게 큰 재래 시장이 보였다. 온갖걸 파는 장사꾼들이 빽빽이 자리를 잡아 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상점마다 간판이나 번호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시장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수세미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왜 ‘수세미’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수세미 할아버지일까?”

 “수세미를 앞에 놓고 판다 그랬어.”

 “진짜 수세미를 팔고 있을까?”

 “글쎄…….”

 수세미가 정말 수세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물건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암호와도 같은 ‘수세미 할아버지’라는 단서 하나만 가지고 Y와 난 시장 초입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시장을 대충 훑어보니 몇 개의 열로 되어 있었다. 한 개의 열을 진입해 끝까지 보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장 자체는 컸지만 한 열 한 열 씩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Y와 난 각자 한 열 씩 나눠 보며 뭔가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하고 흩어졌다. 

 한 골목을 다 돌아보고 있으니 Y가 나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현영아! 찾았어 찾았어!” 

 Y가 내 팔짱을 끼고 방금 둘러본 골목으로 들어갔다. 좀 걸어가니 한 건물 앞에 터번을 쓴 건장한 나이든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앞엔 수세미가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수세미를 파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자세의 남자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가 불이 켜지 듯 반짝거렸다. 감이 왔다. 저 사람이구나. 환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볼지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한국말이 튀어 나왔다.

“수세미?”

 놀랍게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리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어두컴컴한 건물 1층 복도에서 우린 환전 논의를 시작했다. 수세미 할아버지가 나름의 유창한 영어로 환율을 제안했다. 일반 환전소보다 훨씬 좋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가격은 무조건 협상을 하는 법. 그것보다 우리에게 유리한 금액을 다시 제안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또 다시 금액을 제안했다. 오호라. 비즈니스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괜히 여행자들이 이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었다. 금액이 나쁘지 않았다. 딜! 내가 달러를 내밀자 할아버지가 품안에서 돌돌 만 지폐 덩어리를 꺼내 내가 건넨 달러에 맞는 이집션 파운드를 셌다. 복도 끝에선 시장의 분주함이 느껴지고, 어둡고 습기 어린 건물 안에서 나와 터번을 쓴 할아버지는 밀거래를 하는 중이었다. 아, 이건 마치 느와르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다.

 [아랍의 한 시골 마을. 국제 테러범들을 수사하던 주인공은 허름한 마을로 들어가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는다. 습기 어린 복도, 터번을 쓴 사내들, 말 없이 주고 받는 눈짓. 돌돌만 지폐를 던지고 단서를 받아 주머니에 챙기는 주인공.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잔뜩 느끼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총소리. 탕탕탕. 추격이 시작되었다.]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할아버지에게 받은 이집션 파운드를 고이 지갑에 넣어 가방 안쪽에 넣었다. 헐리웃 액션 영화가 절로 떠오르는 골목에서 거래를 마치고 우린 따로따로 건물을 나섰다. 원하는 돈을 얻고 밖으로 나와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굉장한 비즈니스 거래를 하나 마친 것 같았다.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갔다 나온 우린 꽤나 좋은 환율에 이집션 파운드를 사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정말 영화 같았던 건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우리의 인연이었다. 그리스, 터키를 거쳐 만나게 된 우리 셋의 인연. 

 여행을 하다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일들이 발생한다. 여행을 준비하는 귀찮음과 여행하며 맞닥들이는 수 많은 사건사고들. 그 모든 피곤함은 이런 좋은 인연과 영화 같은 재미진 경험 덕에 잊을 수 있다. 이 맛에 여행한다. 좋은 영화 한 편 찍고, Y와 난 또 다음 장면을 위해 계속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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