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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8. 2022

다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

프놈펜의 뚝뚝 기사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앙코르와트 투어를 마치고 프놈펜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제 얼마 안있어 여행을 끝내고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내게 남은 것이라곤 짧은 프놈펜 여행 뿐이었다. 어깨에 맨 배낭 차림으로 버스에서 내려 덤벼드는 뚝뚝 기사들을 맞이했다. 

 “뚝뚝! 뚝뚝!”

 몇 명의 기사 중 끈질기게 나를 따라 붙는 한 명이 있었다.

 “뭘 원해? 프놈펜 투어? 하루? 이틀? 어디까지 가?”

 뚝뚝 기사 중 드물게 영어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공항가기 전 몇 시간 동안 킬링필드와 프놈펜 시내에 있는 ‘뚜얼슬랭’을 보고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마치고 그의 뚝뚝에 올라섰다. 

 “이름이 뭐에요?” 

 “존이에요.”

 “존, 반가워요. 난 현영이에요.” 

 서양식 이름의 뚝뚝 기사도 처음이었다.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 만큼이나 독특한 뚝뚝 기사였다. 존은 우리가 약속한 대로 먼저 킬링필드로 향했다. 시내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얼마간 시간이 소요되는 건 알았지만 더운 날씨에 황량한 모래 벌판 같은 곳을 달리고 있노라니 더욱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헬맷을 쓴 존의 양옆으로 모래 바람이 휘휘 불어나가는 걸 맥 없이 바라보길 몇 십분. 드디어 킬링필드에 도착했다. 

 얼핏 보기엔 깨끗하고 넓은 공원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어마어마한 학살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킬링필드는 고요했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가 지닌 황홀한 고대 역사와 달리 비참하고 처절한 근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좌익무장세력인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으면서 1960~70년대 대량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 방식이나 규모가 나치에 비교될 정도로 매우 잔인하고 극악무도하다. 킬링필드엔 이 때 희생된 희생자들의 유골이 모아진 추모의 탑이 있다. 유골을 층층이 쌓아 그대로 보이게 한 추모의 탑 앞에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나라도 한 없이 설명할 수 없는 슬픈 근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다른 나라의 비참함을 목도하니 그 무게감은 또 달랐다. 

 나는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앙코르와트의 멋진 건축물을 노트에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비루한 솜씨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치 앙코르와트와 내가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조용한 정글 속에 숨겨져 있는 고대 도시의 비밀을 파고드는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앙코르와트에 일출이 뜰 때 거대한 탑을 그리기도 했고, 부처같은 얼굴이 새겨진 앙코르 툼의 돌 탑을 그리며 같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압사라 여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기도 했고, 모든 고행을 짊어지고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중생의 얼굴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역사와 대화하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었다. 

 킬링필드 추모의 탑 앞에서 한동안 침묵하던 난 일기장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해골이 한 개, 두 개, 여백을 채워나갔다. 해골은 입이 뚫려있다. 빈 입 속 공간을 연필로 까맣게 색칠하니 마치 말 없는 비명을 지르는 듯 보였다. 앙코르와트에서 그렸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한참을 탑 앞에서 해골을 그리고 천천히 킬링필드를 둘러보았다. 초록 풀과 나무가 자라 있는 들판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땅은 모든 걸 품은 채 또 다시 새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난 다시 존의 뚝뚝에 올라 ‘뚜얼슬랭’으로 향했다. ‘뚜얼슬랭’은 킬링필드와 더불어 캄보디아 근현대 암울한 역사를 대변하는 역사적 장소다. 본래 학교였지만 크메르 루주가 지식인들을 처형하고 고문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일단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하는 악명 높은 장소로 유명했다. ‘뚜얼슬랭’은 겉으로 보기엔 일반 학교의 외형이었지만 안에 들어가면 이전에 사용되었던 고문 기구, 사람들이 학살 당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해놓은 기록물들이 있어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이 많은 곳이어서 그런지 대낮인데도 소름 돋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으스스한 기분은 잠시, 건물 밖을 나오자 한낮의 뜨거운 태양 볕에 온몸이 말라 익을 것 같았다. 존에게 말했다. 

 “존, 공항 가기 전에 잠시 뭐 좀 마실 곳에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생과일 주스 같은 거요.”

 “그래요.”

 존은 내가 킬링필드, 뚜얼슬랭을 돌아보는 내내 조용히 뚝뚝에서 기다리다 내가 나오면 군말 없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곤 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의 커다란 눈은 뚜렷하고 빛나서 꼭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했다. 존은 뚝뚝을 시장 쪽으로 움직이더니, 생과일 주스를 파는 한 노점상 앞에 세웠다. 난 노점상 앞의 의자에 앉아 과일 주스를 하나 시키고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때 존이 놀라운 행동을 했다. 뚝뚝에서 내리더니 내 옆에 앉아 주스를 주문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주스는 자연스레 내가 계산했다. 뚝뚝 기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주스 한 잔쯤 내가 살 수 있지만 난 캄보디아에 있으면서 나를 대하는 다른 뚝뚝 기사들의 태도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씨엠립에서도 뚝뚝 기사가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내 옆에서 식사를 하거나, 내가 뭘 할 때 옆에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고용된 직원처럼 나를 잘 돌보는 것이 그의 임무인 듯, 말을 걸거나 자기 의사표현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뚝뚝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사들의 행동에 익숙해져 있던 난 존의 돌발행동에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갔다. 

 “존, 영어 어디서 배웠어? 정말 잘해서 놀랐어~”

 “그냥 관광객들 상대하면서 늘었어. 이 사람 저 사람 상대하다보니 늘더라고.”

 존의 생존 영어는 꽤나 수준급이었다. 아무리 관광객을 상대한다고 한들, 뚝뚝 기사들이 다 영어를 존 처럼 잘 하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을 상대하며 영어를 익혔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을 지 짐작이 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사는 건 불공평한 것 같아. 너는 너의 나라에 태어나서 이렇게 다른 나라 여행 다니고, 난 이 나라에 태어나 뚝뚝 기사 하고. 그건 다 어디에 태어 났는 지에 따라 결정되는 거야.”

 나는 존의 속내에 놀랐다. 그의 말엔 뼈가 있었다. 내가 그런 삶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 못하고 그저 햇볕 아래 녹아내린 주스만 빨대로 휘휘 저을 뿐이었다. 그도 그런 삶을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었을 테니까. 


 여행하며 그곳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내 앙코르와트 그림을 달라고 했던 캄보디아의 동네 꼬마 아이, 내 영어를 굳이 지적해 고쳐주었던 런던의 지하철 표 판매원 할아버지, 우리에게 돌을 던진 루마니아의 집시 아이, 매일 신선한 음식을 주기 위해 아침 일찍 요리하던 그리스의 숙박 주인,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온 마음을 집중해 들었던 일본의 기차 역무원……. 모두가 자기 방식 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에 잠시 들렀다 가는 여행자로서 난 내가 무얼 깨닫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집트 룩소르엔 ‘귀족의 계곡’이 있다. 귀족이 묻힌 곳이라고 하는데, 역대 왕과 왕비들이 묻혀 있는 ‘왕들의 계곡’이나 ‘왕비의 계곡’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투어를 이끌던 택시 기사가 우리를 ‘귀족의 계곡’에 내려줬을 때, 그곳은 ‘귀족의 계곡’이 아니라 ‘귀신의 계곡’ 같았다. 관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고 방치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택시에서 내린 후 어딘가 유적지가 있을 만한 곳으로 걸어가니 앞쪽에서 터번 쓴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고 “웰컴웰컴!”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꼬마 아이가 우리를 안내했다. 아이가 안내하지 않았으면 그저 작은 돌 언덕에 불과한 곳이었다. 아이를 따라 거의 허물어져 가는 초라한 유적 입구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건물이라기 보다 작은 동굴처럼 보이는 곳 앞에 서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였다. 우리 말고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있으니 유적 안에 있던 다른 아이가 거울에 햇빛을 반사시켜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아이는 몸이 성치 않아 보였다. 빛이 비춰진 곳에는 잘 보이지 않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너무나 못 사는 이 동네는 그나마 있는 이 유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로 인해 먹고 사는 것 같았다.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언덕을 내려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웰컴’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박시시(팁)를 주지 않는 우리에게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언어라도 욕하는 건 알아듣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디선가 조그만 여자아이가 나와 팔찌를 건네며 사라고 권유했다. 학교에도 가지 않을 나이였다. 나는 펜을 하나 꺼내 아이에게 쥐여 주었다. 이집트에선 문구류가 귀했다. 아이는 펜을 받자마자 팔찌를 파는 것도 잊어버리고 함박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달려갔다. 

 푸켓 출장 갔을 땐 화려한 리조트 차가 나를 공항에 데리러 나왔었다. 더운 날씨에 땀을 식히라고 찬 수건과 물병이 놓여 있는 고급 세단이었다. 행사 기간 내내 리조트 밖을 한 번도 나오지 않아 동남아의 날씨가 어떤지 실감 하지 못했다. 오전엔 세션을 듣고, 오후엔 내내 미팅을 하고, 저녁엔 파티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쉬는 시간엔 마사지를 받거나 수영을 하거나 정원을 산책했다. 마지막날 저녁에 볼룸에 모두가 세련된 드레스와 정장 차림으로 모여 술 한 잔씩 하며 재즈를 들었다. 

 “보드카 좀 더 넣어주세요.”

 “와우! 니콜! 보드카를 더 넣는 거야?”

 “쟤 한국에서 왔잖아! 한국은 소주의 나라야! 소주 한 번 맛보면 보드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걸.”

 한국에 몇 번 출장온 귓동냥으로 소주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는 영국 사람, 일하며 생긴 에피소드를 맛깔나게 이야기하는 호주 여자, 진지하게 커리어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 모두 화려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일상생활이 어떤진 뒷 사정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마냥 즐겁고 미래가 두렵지 않아 보였다. 

 여행은 내가 가진 걸 다르게 보게 한다. 이집트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차가 차선을 따라 달린다는 게 얼마나 새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무언가 내 안에서 바뀌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집에 도착한 직후였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내 방 앞에 섰을 때, 난 차마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 달 동안 매일 하루 방값을 계산하고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어디서 사기 당하진 않을까 걱정하던 나는 이제 떠돌이 여행자가 아니었다. 따뜻한 집이 있고, 아늑한 내 방이 있는 사람이었다. 

 푸켓 출장을 다녀와선 정 반대였다. 데리러 오는 세단도 없었고, 알아서 밥 차려 주는 가짓수 많은 뷔페도 없었다. 으리으리한 리조트 건물에 호화로운 침실이 아닌 그저 싱글 침대 하나가 놓여 있는 작은 내 방에 돌아오자 드디어 진짜 내 삶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본래 나는 이 세상에 여행 온 사람이고 이 집과 방은 세상을 여행하는 내게 잠시 쥐어진 것이라는 걸. 내가 잠시 이 생에 빌린 것들은 비단 그런 것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내 가족, 친구, 동료, 내가 겪은 경험, 모든 것이다. 여행은 잠시 내게 쥐어진 이 귀한 것들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걸, 난 나의 작은 방에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존의 옆에서 금세 미지근해진 과일 주스를 바라보며 난 내 방을 생각했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잠시 빌리게 된 나의 집과 방. 존의 말이 맞았다. 사는 건 불공평하다. 난 이 나라에 나의 부모님에게 태어나서 이런 삶을 누리고 있다. 이런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삶이 좋은가 나쁜가. 우린 주스를 다 마시고 말 없이 다시 뚝뚝에 올랐다. 공항에 날 내려준 존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찰칵. 존은 배낭을 멘 내 모습을 사진에 남겨주고 떠났다. 

 공항에서 몇몇 한국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기도 했고,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기도 했다. 가장 많이 물은 질문은 “왜 혼자 여행하세요?” 였다. 그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왜 혼자 여행하냐’는 질문은 내게 ‘왜 여행하냐’는 질문처럼 들렸다. 난 한국의 내 방문을 열고 그 답을 홀로 답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내가 이 생에 잠시 빌린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그리고 빌린 것들에 감사하며 또 다시 힘차게 살아나갈 힘을 얻기 위함이라고. 삶이 가진 불공평은 때론 좌절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때론 기쁨과 환희가 되기도 한다고. 그 사실을 잊어버릴 즈음 난 언젠가 또 떠날 것이다. 내가 이 생에 만난 사람들과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기쁨을 되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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