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일시 정지 버튼이 생기지 않는다.
일시정지는 재생 버튼을 누른 용기 있는 자의 특권이다. 일단은 시작을 해야, 정지 버튼도 닫기 버튼도 누를 수 있는 거지.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나는 재생 버튼을 누르면 일단 끝까지 들어보는 편이다. 영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도 썸네일에 끌렸든, 제목에 끌렸든 그 영상 또는 음악을 고른 나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어서. 너무 고리타분하다. 만년 완벽주의자로 살아온 나에게 닫기 버튼은 재생한 클립이 끝날 때까지 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빠르게 배속을 돌려보더라도 중간에 꺼버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렇기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다는 건 사실 엄청난 용기였다.
완벽주의자라고 해서 모든 걸 척척 손에 얻은 건 아니었다. 당연히 그 누구도 그럴 수 없다. 그런데 20대 초반엔 어리석게도 계획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에게 성취감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깨지고 무너지고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울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나를 더 몰아세우며 다시 달리기를 해보려고 마음먹은 올 해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직장도, 학교도, 교회도.. 잠시 나도 내 삶에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버렸다. 타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문을 걸면서 과감하게. 그 사이에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즐겼다. 평소에 너무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가장 먼저 했다.
다행스럽게도 글 쓰는 일은 사람을 만나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중적인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방 조용한 구석에서 혼자서 노트북을 펼쳐 두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말 충동적이었다. 내 삶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충동적이었던 적이 없다. 그동안 해왔던 모든 것을 그냥 다 놓아버렸다. 글쓰기 외에는 어느 것도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 퇴근하면 집에 달려가 글쓰기,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글쓰기, 출근길에도 머릿속엔 온통 글쓰기, 직장에서 틈이 나면 글쓰기. 덕분에 글쓰기 외엔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타인은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매사 모든 일에 의욕적인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살짝 글쓰기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일시 정지한 시간이 그리 오래 주어지진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일기를 꾸준히 써왔는데 연도별 일기장을 뒤적였다. 처음엔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 없이 그것들을 시간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해 갔다. 언젠가는 책을 써보리라 하는 막연함으로. 그렇게 막연하게 적어 내려 간 글을 처음으로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나의 생일날이었다. 우리 동네 근처에도 독립서점이 생겼다길래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독립서점에 들렀다. 안에 카페도 있어서 오랜 시간을 책과 함께 머물 수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생일 선물로 원하는 책을 고르라고 했다. 친구는 내가 독립출판에 관심 있는 걸 알고 있었고 내게 독립출판에 관한 인디자인을 다루는 핸디북을 내가 고른 책과 함께 선물했다. 이 친구는 늘 나에게 영감을 주는데 그날도 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길 나누게 되었다. 왠지 보여주고 싶어서 책의 내용을 살짝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친구는 꼼꼼히 봐주었다. 책의 제목부터 사진 배치 같은 것들을 짚어주었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는 사진이나 색감 같은 것에 대해 감각이 있었다. 가장 먼저 짚어준 것이 상업적으로 사용 가능한 글꼴이나 이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기본적인 것부터 무지했던 나였다. 친구가 알려준 상업용 글꼴 사이트에 들어가서 사용해도 되는지 확인했다. 이렇게 조금씩 모르는 영역에서 아는 영역으로 넘어갔다. 덕분에 소설같이 추상적이라는 가제도 수정하고, 사진의 크기도 키웠다. 친구가 해준 조언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수정을 해갔다. 그러자 pc안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글들을 정말로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 졌다. 정말 이대로 책을 써도 되는지 궁금해져서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고 싶어졌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검색 기술을 활용해 검색 끝에 적절한 충무로 인쇄소를 찾았다. 예약을 하고 그 주에 바로 갔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절대 미루지 않는 나의 실행력이 빛을 발했다. 대표님은 나 한 사람을 컨설팅해주기 위해 파주에서 사시는데 주말을 포기하고 회사로 나와주셨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만큼 궁금한 것을 차근차근 여쭤봤다. 컨설팅받기로 한 전날 부랴부랴 책 제목을 드로잉하고 그림을 스캔 떠서 가져갔다. 어떤 느낌의 책인지 노트북에 쓴 글들을 보여드리면서 함께 머리를 맡대야 할 것 같아서. 전에 같이 작업했던 책들을 샘플로 몇 개 보여주시더니 색감이나 재질, 디자인 등을 참고하라고 하셨다. 종이 종류와 판형에 대한 정보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표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 조언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정도 책의 모양이 가다듬어졌을 때쯤 인디자인으로 파일을 옮겨와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글꼴, 사진, 간격, 배치... 손을 보고 또 봐도 마감까지 끝이 없었다. 글을 쓸 땐 좋다지만 그 과정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서서히 실감이 났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텀블벅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사실 일들이 척척 진행되긴 했다. 언제나 주변에는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그 친구에게 포토샵 같은 전문적인 부분들에 도움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이든, 주말 오후 같은 꿀 같은 휴식 시간도 포기하며 날 위해 작업하러 언제든 달려와줬다.
코로나가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텀블벅을 3주간 진행했는데 텀블벅 마감되는 주에 나의 일터인 유치원이 개학을 하게 되었다. 개학과 동시에 책을 포장하고 우편 발송하는 작업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했는데, 내가 일하는 지역은 주변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 개학한 지 하루 만에 휴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얻게 된 기회로 포장작업을 할 시간이 생겼다. 옆에서 자발적으로 도와주셨고, 학교 앞에 우체국이 있어 퇴근 후 우편발송까지 무사히 마쳤다. 일이 끝나고도 절반의 책은 입고를 했다. 책방 입고하는 것도 서울을 시작으로 인천, 경기, 강원, 전북, 전남, 경북, 부산, 제주까지 전국적으로 입점을 허락받았다.. 너무 신나고 벅찬 일들이 일어났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게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고, 새롭게 인연을 맺었고 몰랐던 출판 분야에 대해 전보다는 조금 더 알게 되었고, 나의 삶의 방향성도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나에겐 너무 축복인 일들이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잠시 쉬어갈 생각이었는데 일시 정지했던 3개월의 멈춤이 나에겐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여전히 앞으로의 삶을 다시 이어가는 것은 두렵고 떨리지만 기대가 된다. 내가 전부터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점 같은 사건들이 한 번에 쭉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바늘구멍을 콕콕 찍어냈던, 그저 마음을 따라 했던 일들에 드디어 실을 쭉 꿰었더니 멋진 그림으로 선명해진 기분이다.
행복이라는 건 소소하게 찍힌 점들이면서 동시에 이어질 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것 같다. 매 순간 쉼 없이 달려오느라 지친 당신도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주변이 어떤 풍경인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 산들거리는 들꽃, 귀여운 강아지도 마주칠 수 있다. 멈추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자.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면 언제든 이어갈 수 있으니까. 과정, 그 안의 기쁨을 꼭 느꼈으면 좋겠다.
희망차게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낫다.
To travel hopefully is a better than to arrive.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