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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an 26. 2016

#16 홍콩, 흠뻑 젖거나 혹은 눈부시거나.

유난히 검은 밤, 그래서 더 보석 같던 거리.

그 두 번의 밤,
비가 아닌 정취에 흠뻑 젖었고
조명보다 눈부신 장면에 눈을 감았습니다.

지난 12월, 해가 가기 전 홍콩으로 마지막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급하게 떠난 여행, 짧은 일정에 첫날 저녁 식사의 소감마저 돌아와서 떠올릴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단 하나 또렷하게 각인된 것이 있다면 형태보다 색으로 각인된, 비현실처럼 붉고 강렬한 홍콩의 밤거리입니다. 스타 페리를 사이에 두고 침사추이부터 센트럴, 소호와 란 콰이 펑까지 홍콩 중심가 거리들을 쉼 없이 걷는 동안 저를 희롱했던 그 색들은 무척이나 고혹적이어서, 돌아온 후 그 도시를 오직 밤으로만 기억하게 됐습니다.


홍콩의 야경, 2015

많은 분들이 사랑하시는 홍콩, 하지만 사실 저는 한 번도 이 도시를 꿈꾼 적이 없습니다. 시끄러운 목소리와 기름진 음식, 무더운 날씨 등의 선입견 때문에 오히려 '평생 가지 않을 도시'쪽에 더욱 가까웠어요. 하지만 이 도시의 거리와 사람이 가진 은은하지만 선명한 색, 낡은 듯 품위 있는 형태들을 보며 도착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첫 번째 밤, 타임 스퀘어 주변 골목들을 목적지 없이 훑어가며 이미 다음 홍콩 여행을 꿈꿀 정도로요.


홍콩에서 두 번의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참 많이 걸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자신 있는 여행이니까요. 그 둘날씨를 비롯해 많은 것이 달랐습니다만 돌아보니 그 도시 곳곳을 누빈 제 걸음 그리고 감정은 꼭 하나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마치 평소보다 두어 배는 긴 하루를 보낸 것처럼.


길마다 유난히 다양한 이야기가 떨어져 있던 도시, 홍콩. 그 풍경들에 반해 다리가 붓는 것도 잊고 철저하게 걷는 여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웠던 그 이야기를 호호 불어 내어 놓는 지금은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처음이자 첫 번째,

폭우 속 도시 풍경이 꼭 쓴웃음 같아 쓰다듬듯 걷던 밤.

비가 오던 홍콩의 첫 밤

첫 번째 밤은 아쉽게도 퍽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을 들어도 쉽게 건물 밖으로 나설 수 없었으니 폭우라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짧은 여행을 가만히 서서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컸던 터라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하고 타임스퀘어 입구의 처마 아래 섰습니다. 무엇보다 저녁 식사 길에 차창 밖으로 본 홍콩 거리의 채도가 썩 마음에 들었거든요. 식사 내내 빨리 나가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코즈웨이 베이, 2015

저와 어울리지 않는 수박 모양의 작은 우산을 빌려 들고 타임 스퀘어를 나섰습니다. 제법 큰 덩치의 제가 귀여운 우산을 쓴 모양새만 신경 쓰였지 금세 젖을 스니커즈나 옷가지, 혹은 사방으로 펼쳐진 '낯선 길'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새 길 앞에 설 때 저는  쇼윈도 앞에서 새 옷을 고르는 것처럼 설레니까요.


처음 마주한 홍콩의 밤거리에는 어느 도시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날 유독 도드라졌는지는 몰라도 말예요. 밤하늘이 유독 새까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강렬한 조명과 낯선 형태의 건물들,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비가 주는 묘한 감정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 것도 그 칠흑 같던 밤과의 대비 때문이었겠죠.


반면에 그 밤이 어딘가 먹먹한 기분을 들게도 했습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산 하나에 의지해 걸으며 떨어지는 비가 무언가를 쉼 없이 누르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 무게 때문인지 고개를 숙이고 걷는 걸음, 비를 피하는 데 급급한 움직임이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애써 외면하듯 걷는 사람들의 대비, 그 풍경들이 언젠가 제가 지었던 쓴웃음 같아 순간 여행이란 것을 잊기도 했습니다.



걷는 내내 멈추지 않았던 제목 모를 음악, 소리

비가 오면 유독 시끄러워지는 교실 풍경, 차동차가 지나가는 소리들. 그 밤 역시 폭우 속에서 거리는 시끌벅적했고 알 수 없는 언어들과 제가 있던 것과 같은 것들이 낸 다른 소리가 처음 듣는 음악처럼 흐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  못지않게 감정 역시 소 란스 레 만드는 특별한 비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거리 사진을 좋아하는 제게 홍콩의 밤거리 풍경은 그야말로 길 여기저기 동전들이 떨어져 반짝이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비 덕분에 반짝여 더욱 좋았습니다. 그래서 스무 발짝 넘게 멈추지 않고 걸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두리번 거렸고 탐욕스레 주워 담았습니다. 그래서 지나고 나니 그 날 그렇게 비가 왔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생각합니다. 처음 만난 홍콩을 특별한 감정으로 새겨줬고 화창 갠 둘째 날의 감흥을 증폭시켜 줬으니까요.


아 또 하나 있어요. 낯선 갈래길에선 모든 선택이 정답일 수밖에 없다는 '걷는 여행의 묘미'.


코즈웨이 베이, 2015

그렇게 알 수 없는 먹먹한 감정을 남기고 홍콩에서의 첫 밤이 지났습니다. 빌린 우산을 그대로 들고 택시를 타니 날씨가 슬슬 걱정이 되더군요. 이 감정이 퍽 마음에 들지만 오늘 하루로 족한데, 하며 말이죠. 그때까지도 비는 쉬지 않고 내렸지만 행운스럽게도 남은 이틀은 활짝 갠 홍콩의 온화한 겨울 날씨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다음 아침, 활짝 갠 하늘을 만났습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색에 취해 갈증도 잊고 걸었던 밤.

센트럴의 야경, 2015

'정신을 차려보니 그랬더라'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에 매우 진부한데다, 누가 봐도 과장 혹은 거짓이 섞인 것을 알기에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타 페리 광장에 앉아 본 야경에서 문득 홍보 사진에서나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폭우 속에 걷던 지난밤의 감정선 끝과 지금 이 감흥이 연결돼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번의 밤, 돌아오니 오히려 날씨에 대해 달관하게 되지만 스타 페리 광장의 난간을 한 자리 삼아  걸터앉았던  그때는 그 밤 갯수만큼의 날씨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스타 페리 광장, 2015

'아, 여행 책자에서 본 적 있어'라며 떠올린 홍콩의 야경 이 눈앞에 펼쳐지고 모인 사람들의 실루엣은 그것대로 이 야경  못지않게 멋진 장면들을 연출했습니다. 등 뒤로는 재미없는 3D 라이트 쇼가 펼쳐졌지만 좌우로 함께 이 여행 속에 머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으로 됐다'는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하루의 절반이 밤이었던 겨울 도시도 다녀왔지만 유독 이 여행에서만큼은 밤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양 기다렸습니다. 낮보다 밤이 아름다웠던 도시, 그래서 그 밤 제가 보았던 몇몇 장면들은 이제 홍콩이라는 도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던 이야기들

소호, 2015

'지금이 아니면'


이라는 생각은 모든 여행에서 저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매혹적인 홍콩 야경에 이미 충분하다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더 큰 갈증을 느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도착한 소호는 매우 수다스러웠던 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비단 사람이 무척 많고 불이 켜진 가게마다 빠짐없이 강한 비트의 클럽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며 대단한 불협화음을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 눈, 그리고 한 장에 담으래야 담을 수 없는 거리 위 이야기가 만드는 시선의 소란이 귀를 때린 소음보다 크게 남았습니다..


번잡한 소호 거리를  빠져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이 장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비현실적으로 붉은 밤거리의 조명 아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데, 누구 하나 주인공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더 소란스럽게 해 줘!'라고.


그렇게 걸음은 소호에서 란 콰이 평까지 이어졌습니다. 사실 이 거리의 흥에 휩쓸려 그리고 조금이나마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어느새 그곳에 닿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 그렇게 걷는 동안 참 많은 장면들을 마주했습니다. 그것은 비록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소란함 속 어딘가에 여유가 있고, 깊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보였습니다. 굳이 시끄러운 펍을 선택해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걷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았거든요. 지금은 이날의 선택이 꽤나 괜찮았다고  자평합니다. 역시 저는 이렇게 길에 떨어진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긴 이야기라도 쉬지 않고 있어갈 수 있습니다.


홍콩의 까만 밤 위 붉은 글씨로 쓰인 그 이야기들 역시  하나하나가 무척 흥미로워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결국 마치지 못하고 먼저 일어서야 했던 것이 너무나도 아쉬울 정도로. 몇 겹의 시간이 흘러, 오늘도 다시 넘겨 보는 사진들은 홍콩의 밤거리 사진들입니다. 그만큼 저는 이 소란스러운 거리가 좋았습니다.



홍콩, 그 까만 거리 위에 쓰인 이야기 두 바닥

센트럴 거리, 2015

사실 감흥이 쉽게 식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잠시 발을 쉬자는 핑계로 란 콰이 펑 끝자락 후미진 골목에 있는 펍에 앉아 칭다오 맥주 한잔을 들이켠 후에도 한참이 더 걸렸습니다. 열 두시가 넘어서야 그렇게 평소 요금의 세 배가 넘는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겨우 그 풍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길에 반짝이는 동전을 그대로 두고 쫓겨 나가는 사람처럼 연신 뒤를 돌아보며.


돌아오는 택시에서 눈을 감고 다음 홍콩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호텔이며 거리, 공항에 작별인사 한 번 건네지 않았습니다. 순흑(黑)의 강렬함으로 저를 빨아들이듯 사로잡은 그 두 밤의 새까만 색은 먹먹함과 대비돼 더 화려했던 밤거리의 춤과 함께 또 하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됐습니다.



떠나기 전 제게 홍콩의 단점만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홍콩이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기다렸던 듯 돌아오는 길에 준비했던 대답을 했습니다.
색과 대비가 너무 촘촘하고 사랑스러워 걸음으로 자꾸 휘젓고 싶은 도시였다고.


그때 제 표정은 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유난히 밝았습니다.


란 콰이 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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