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발음으로 따라 읽는 뒷모습 이야기
처음 걷던 길, 우연히
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한 없이 낯선 존재가 기꺼이 미소를 내어 줍니다. 직접 눈을 마주 했다면 그렇지 못했을 텐데 파인더 속 환한 표정이 마치 잿빛 갤러리 끝자락에 걸린 인물 사진 같아 곧 흉내 내어 웃습니다. 어쩌다 저답지 않게 용기가 나면 둘 사이 차가운 쇳덩이를 내리고 진짜 세상 속 그녀에게 짧은 인사를 건넬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떠남으로 얻는 기적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대화는 대부분 같은 문장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한 발짝만 디뎌도 바다 너머 한참 먼 추억이 되니 과연 기적은 이런 것이구나 싶기도 하죠. 그렇게 유쾌한 인사 후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에 늘 몇 번의 셔터를 보냅니다. 마치 키스처럼 끊어지는 소리에 맘을 들킨 것 같아 이내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지만, 이 장면이 가장 깊숙이 가라앉아 끝까지 남는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이렇게 뒷모습을 따라 읽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습니다.
언젠가 포토그래퍼도 아니면서 커다란 사진기를 이고 다니는 제 모습이 너무 낯설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 이유모를 이질감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며 익숙했던 것들마저 새삼 어색하게 했습니다. 바라보는 장면 속 주인공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아 머뭇거리기 시작했고 어쩌다 불쑥 프레임 속으로 난입한 행인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깜짝 놀라 딴청을 부리는 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설상가상 제가 기록하는 것들마저 빠르게 저를 닮아가면서 눈이 먼 듯 긴 외면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시선을 흘려보내는 데 익숙해질 무렵 우연히 마주친 한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색을 잃은 건조한 풍경 속 거리를 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비슷한 것을 꼽으라면 수백 개도 더 떠올릴 만큼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그린 형태며 공간을 채운 먹먹한 감정이 유독 특별해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고, 잊고 있던 용기를 꺼내 보았습니다.
그렇게 익힌 새로운 화법이 새것이라 좋았던 것도 잠시, 한동안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어색했고 그 날의 장면을 착각으로 치부하게도 했습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몇 발짝 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정과 솔직한 표정을 조금씩 발견하게 됐습니다. 난생처음 읽게 된 그 이야기들이 무척 재미있어 한동안 일부러 그들의 뒤로 달려가 새것을 뒤적이는 데 열중했습니다. 혹 그것들을 놓칠까 잊을까 따라 적는 제 도구들도 점점 더 작은 카메라, 넓은 광각 렌즈로 변하게 됐죠.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말 한마디 건넬 것 없는 풍경에 나타난 그의 뒷모습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대화 상대처럼 반가웠고 그 실루엣에 의지해 장면과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몇몇 장면에서 그들은 쉼표처럼 저를 붙잡아두었고 또 다른 장면들에선 마침표 혹은 느낌표가 되어 이야기를 완성해 줬습니다. 그 움직임이 아니었다면 일부는 미완성 문장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부족함 없는 교감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감상을 나누기도 했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찾는 모습이 궁금증을 자아내게도 했습니다. 종종 마치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의식하는 듯 멋진 포즈로 화답하기라도 하면 어떤 절경이나 멋진 건축물 앞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짜릿함에 박수처럼 셔터를 치곤 했습니다. 그저 가만히 선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던 것뿐인데 어느새 저는 장면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눈, 코, 입 어느 것으로도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뒷모습에 무엇이 있느냐 하지만 실은 가장 솔직한 표정이 숨어 있습니다. 악의든 선의든 종종 상대를 속이곤 하는 얼굴 대신 바라보는 방향과 걸음의 간격, 손끝이 가리키는 것에 주목하면 어렵지 않게 그 표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발견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마치 흑백사진을 읽는 것 같습니다. 눈을 현혹하는 색을 지우고 민낯으로 장면을 마주하는 느낌이 꼭 같지는 않더라도 분명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쁠 때 주저 없이 팔을 뻗었고 애써 즐거운 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가을, 몰라보게 영근 노란 은행나무길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던 승려의 뒷모습은 감추지 못하고 터져나온 감정이 그대로 비쳐 그 계절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제가 마주친 수많은 장면 속에서 뒷모습마저 솔직하지 못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보이는 그대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나란히 뒷짐을 진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수십 년의 시간을 감히 가늠해 보고 연인의 맞닿은 어깨를 통해 사랑에 대한 저만의 정의를 내리곤 합니다. 아이들의 실루엣은 매우 작지만, 그만큼 더 크게 출렁여서 호기심에 바짝 들린 뒤꿈치만으로 저를 설레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읽어 내려가는 이야기 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운 상상입니다.
수많은 장면들이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있고, 감정으로 읽힙니다. 어떤 뒷모습은 웃음소리가 가득해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고 다른 어떤 것은 곧 울음이 터질듯해 더 볼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노인의 주름과 아이의 보조개를 통해 인물과 교감하지만 종종 뒤로 젖힌 고개에서 행복을, 들썩이는 어깨로 슬픔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앞선 방식이 직유라면 후자는 은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이 낯선 방식에 푹 빠져 있는 중입니다.
예상 밖의 수확은 종종 혼자 걷는 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때입니다. 움츠린 뒷모습 위로 퍼지는 입김이, 종종걸음의 새까만 실루엣은 겨울도시에 던져진 제 어깨 위 쏟아지는 폭설을 더욱 하얗게 빛냈고 낭만의 도시를 내려보는 연인의 뒷모습에서는 다음 여행을 약속하게 됐습니다. 몇 번의 여행 중 꼭 한 번은 저를 닮은 뒷모습을 마주치게 됐고, 그렇게 사람들의 뒷모습을 훔치던 습관이 내 모습을 찍을 수 없는 여행을 내 것으로 기록하는 방법이 됐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여행마다 꼭 챙기는 가장 좋아하는 이름표, 즐겨 쓰는 붓이라 소개합니다.
지난 2월, 운 좋게 찾은 2016년 대만 등 축제는 난생처음 보는 대규모였음에도 홈페이지에서 본 사진과 다른 것이 없어 금방 지루해졌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 돌아가야겠다 마음먹을 즈음, 난데없이 귀를 때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새카만 밤하늘 위로 화려한 불꽃쇼가 펼쳐졌습니다. 반가움과 놀라움에 순간 주변 사람들과 같은 환호성이 터졌지만 빠르게 달리는 방향만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렇게 힘껏 물러나 담은 장면의 주인공은 형형색색으로 터지는 폭죽이 아닌, 깜짝 이벤트에 저와 함께 환호했던 사람들의 뒷모습입니다. 밝은 빛 때문에 까만 형태로만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에서 환희를 보고 환호성을 듣습니다.
뒷모습을 담는 습관 혹은 화법. 사실 앞으로도 저는 용감한 ‘포토그래퍼’가 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 비겁한 만독법(慢讀法)을 갈고닦아보려 합니다. 아직은 더듬더듬 흉내 내는 수준이지만 언젠가 제법 세련된 방법으로 뒷모습을 해석할 때까지. 그때쯤이면 제 뒷모습도 그럴듯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