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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Dec 29. 2015

이렇게 걸었고, 그렇게 됐다. 2015

걷는 여행자의 2015년을 돌아보며

뒤 돌아보면 알게 됩니다
내가 이토록 멋진 곳에 있었다는 것을



모스크바, 2015


흔히 '앞만 보며 달려'라 말하잖아요, 사실 저는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사람들을 걸어온 길을 뒤 돌아 바라보는 것에 인색해지도록 만든다 믿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최고의 순간을 보낸, 비록 그렇지 못했더라도 작게나마 하루 혹은 인생의 한 조각을 새긴 곳을 완전히 떠나기 전 한번 더 인사 나누는 것이 그리 바보 같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처음이지만 저도 남들처럼 며칠 남지 않은 2015년, 저의 한 해를 정리해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역시나 그 추억들은 역시나 '걸음' 속에 있었던 조각들이라는 것이겠죠. 길 위에 흩어진 조각들을 쇠똥구리 마냥 걸음으로 굴려 뭉치니 제법 그럴듯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냐는 여행부터 아직도 채  빠져나오지 못한 떨림의 순간까지. 사진으로 보는 2015년 걷는 여행자의 기록들은 기꺼이  그곳에 찾아가 지치도록 걷고 심지어 사진으로 찍어 남기기까지 한 제 자신에게 건네는 격려이자 신이 나 볼까지 발그레한 그의 무용담을 듣는 시간입니다.



1월, 이 미친 여행으로의 이 끌림

모스크바, 2015

새해 첫 월요일, 영하 30도의 겨울 도시 그리고 걷는 여행자의 탄생. 2015년 1월은 2015년뿐 아니라 제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 됐던 러시아 모스크바 여행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티켓과 추위를 피할 숙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도, 정하지도 않고 떠난 그래서 '미친 여행'이라 이름 붙인 이 열이틀 동안 저는 제가 지난 삼십여 년간 겪었던 것들과 견줄 만한 양의 특별한 경험들과 마주했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감정이며 감흥이 되어 굳이 뭉쳐 넣지 않아도 제 안에 켜켜이 쌓였습니다. 수없이 들추고 떠들어 이제 다른 이의 무용담 같은 이야기가 됐지만 찬바람이 부는 요즘 다시 떠오릅니다. 머리보다는 손 끝과 가슴으로요. 그것들은 분명 모스크바 그 미지의 땅에서 느낀 냉기와 비슷하지만 저는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마 제 것이 됐기 때문이겠죠.


그 여행에서 걷고 뛰고 때로는 구르며 알게 된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짤막한 생존 러시아어나 지하철 경로, 그곳만의 문화나 습성이 아닌  그곳에 있음으로 느낀 감흥 그리고 구하지 않았으나 저절로 제게 다가와 닿은 이런저런 것들입니다. 다녀와서 저는 모스크바보다 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굳이  그곳까지 가야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재미있죠? 떠나야 알게 되는 것이 다름 아닌 '나'라니.



2월, '다시 떠날 수 없을지도 몰라' 

서울, 2015

꼭 짧고 뜨거운 겨울밤  꿈같았습니다. 물론 '일장동몽(一場冬夢)'이란 말도, 겨울밤 달콤한 꿈이란 표현도 세상에 없지만 그 여행의 걸음 하나하나의 향취가 돌아오고 나니 새삼 너무 진해서 한참을 깨지 못하고 꽤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에서 깨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제가 사는 도시 곳곳을 다니기도 했고 갈 수 있는 한 멀리 남쪽 도시까지 떨어져 보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완전히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단편적이나마 저를 둘러싼 풍경들이 제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손을 내밀어줬고 돌아와서 한동안 잃었던 미소를 지은 후에야 비로소 '다녀왔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도 한동안 이 여행 이야기를 하느라 매일  그곳의 사진을 보고 있었던 일들이며 어쭙잖은 대화들을 수없이 떠올렸지만 다시 슬퍼진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저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여행을 다녀왔고 역시나 여행은 돌아온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이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3월, 짧고 강렬했던 겨울잠이 끝나고

서울, 2015

어쩌면 겨울 도시를 탈출하던 그 1월에 저의 겨울은 끝이 났지만 봄을 만나기까지는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계절이 찾아오는 것이랄까요. 그 날 이후 영영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나 결국 그리워만 하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꺼내보는 스물 혹은  그즈음의 추억들과 비교하면 조금 늦어도 괜찮습니다. 결국 봄은 올 것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세상에 어느새 '탄생'이라는 가장 큰 축복이 이루 셀 수 없이 망울을 터뜨리니까요.

 혹독한 겨울을 보낸 후라  지난봄은 더욱 따사로웠습니다. 땀띠가 생길 정도로요. 아침보다 먼저 일어나 기다렸고 어김없이 돌아가는 모습이 아쉬워서 걸음이며 페달을 내밟아 쫓기도 했습니다. 물론 때가 되어 찾아왔듯 때가 되니 떠나 버렸지만 어느 때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제 호기심을 이끌어낸 그녀의 끝없는 매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다음에 돌아올 날을 지금까지  손꼽아 세고 있으니까요.



4월, 낭만의 도시 프라하의 봄

프라하, 2015

아직도 저는 그 시간들을 비현실이며 기적이라는 간지러운 단어들로 소개합니다. 왜 나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눈 깜빡이는 시간이 아까워 종일 저를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프라하의 봄, 지구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시간을 보낸 그 여행은 다시 떠날 수 없을 것이라던 저를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게 만든 여행이었습니다. 새벽녘 페트르진 언덕에서 여명으로 점점 밝아오는 프라하 시의 전경이 꼭 동전으로 칠흑 껍데기를 벗겨 일억 원 글자를 발견하는 과정처럼 느껴져 홀로 환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던 그 아침 풍경이 꼭 저 하나만을 위해 준비한 거대한 미술작품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비가 오면 젖은 대로 품위가 있어 좋았습니다.  그곳은 끊임없이 이 비현실 같은 장면을 믿을 수 있냐며 저와 대화하도록 떠밀었고 돌로 만든 길은 부드러운 카펫처럼 종일 걸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제가 가진 상상력보다 더 로맨틱한 장면들에 종종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아프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꼭 다시 가고픈 도시,  그땐 이 낭만에 박수를 보내는 관객보다 저처럼 이 도시를 평생 꿈꾼 이들에게 그 날 저와 같은 감동을 선사하는 유화 속 한 획이길 기대합니다.



5월, 과한 낭만이 준 숙취 같은 후유증

돌아오는 하늘 어딘가, 2015

걸음은 인간의 가장 느린 이동 수단입니다. 걷는 여행자도 그만큼 느리고 둔해서 한바탕 여행을 다녀온 후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겨울과 봄, 두 번의 큰 여행도 여행이었지만 낭만의 도시에서 환호하느라 쉰 목에 박수 치다 부어버린 손, 뛰다 풀려버린 다리 등 그 후유증이 대단했습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극심한 숙취처럼 5월 한 달간은 순식간에 쌓인 추억 더미들로'이만하면 충분해'라며 보냈습니다. 낭만적인 여행은 힘든 여행보다 그 후유증이 오히려 더 독하고 씁니다. 달콤함에 그새 중독됐기 때문이겠지만요.

한동안 멀리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삼 년 전 갔던 카페가 아직 있다는 것에 가슴 저릿한 감동을 느낄 정도로 마음이 물러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소원했던 '저의 장소들'을 하나하나 찾아 무용담을  털어놓았고 오고 가는 길엔 낭만의 도시에서 가져온 감흥들을 뿌려 놓으려 애썼습니다. 생각해보니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매일 참 많이 걸었습니다. 머리는 아니라고 해도 다리며 가슴 같은 몇몇 반동분자들은 끊임없이 저를 어딘가에 던져놓을 때를 호시탐탐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6월, 강원도 - '그래  그곳이라면' 

강릉, 2015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나고 나니 역시나 다행이지만- 감상에 빠진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단 한마디의 질문과 대답으로 떠나게 된 초여름 강원도 여행은 지금 떠올리면 지난 두 번의 여행 못지않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삼 제가 사는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된 시간이었거든요. '떠나는 것'이 굳이 바다를 건너고 다른 언어의 사람들과 마주하거나 처음 걷는 길 위가 아니더라도 '나서는 것'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장면들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오후에 시작해 오후에 끝난 하루였습니다.  그동안의 것들과 다른 하루는 다른 것들을 보여줬고 그 걸음이며 시선에서 알게 되는 것들은 역시나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내게 선뜻 다가와 쌓였습니다. 이후 저는 여행마다 챙겼던 수첩을 등한시하게 됐습니다. 내 것이라면 결국 내 것이 될 것이라는 억지 같은 말이지만 정말 제 것이 된 것들은 굳이 적거나 저를 다그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까지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두 시간 선잠 후에 휴휴암으로 달려가 바라본 이 새벽에 했던 저와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7월, 누군가에겐 이 곳이 기적. 내게는  그곳이 오사카

오사카, 2015

'내 여행의 출발점'이라 표현하면 영 어색한가요? 누구나 결코 특별하지 않지만 유독 잊을 수 없는 여행 그리고 여행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그것은  난생처음 떠난 가슴 설렌 여행의 추억일 것입니다. 너무 오래돼 바래고 혹 깨지더라도 마치 그 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여기저기 박힌 것처럼 모든 여행에 스미고 떠나는 순간마다 결국 그 날의 빛 바랜 내 모습이 되곤 합니다. 제겐 오사카가 그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찾게 됐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떠올렸는지 마치  지난봄에 왔던 것처럼 골목 하나하나가 익숙했고 섬나라의 여름 더위마저 웃음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때 그 라멘집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그때처럼 박수를 치고 즐거워했죠.

얼마나 즐거웠던지 닷새간의 그 여행에선 단 백여 장의 사진만이 남았습니다. 턱을 괴고 한숨을 쉴 만도 한데 지금도 이 여행 이야기를 합니다. 여행 전 그 시절과 비슷한 배낭을 찾아 매며 기대했던 대로 저는 남바 역에서 신사이바시로 통하는 그 시절 그 길을 다시 걸으며 다시  그때의 여행을 이어갔던 것 같습니다. 익숙하다고도 새롭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여행은 새로운 질문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신 여행의 시작점은 어디였나요?'



8월, 가장 길었던 여름 한 달

과천, 2015

더위를 많이 타는 저는 여름을 싫어합니다. 차라리 다시 1월의 겨울 도시로 돌아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점원의 무뚝뚝한 표정 앞에서 손짓 발짓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요. 걷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8월엔 저보다 더위를 잘 이겨내는 이들의 표정이며 몸짓들을 보며 보내곤 합니다. 물론 그들의 밝은 표정에 속아 달려나간 후에는 영락없이 '역시 난 안돼'라는 푸념을 늘어놓게 되지만요.

해가 지면 그나마 살만 합니다. 물론 신이 날 정도로 선선하진 않지만 움츠렸던 몸을 펼 수 있는 시간이고 몇 걸음이나마 할 수 있는 짬이 나기도 합니다. 큰  맘먹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기도 하지만 맞바람의 시원함보다 배어드는 땀이 힘겨워 가까운 공원에 세워두고 이런저런 공상을 하곤 합니다. 유난히 헛된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언젠가 여름의 끝자락에 그림 같은 노을을 보며 결국 미워할 수 없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한 몇 초 외에는 이번 여름 역시 미움의 대상이었어요. 다행히 그 붉은 쇼를 마지막으로 여름은 끝이 났고 그제야 다시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9월, 땀이 밴 이른 옷차림으로 맞은 가을

서울, 2015

전에 없던 색들을 보니 두근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맞이하는 제가 부끄러워 셔츠며 재킷을 차려 입지만 여름이 아직 훼방을 놓는지 금방 땀범벅이 됩니다. 여름을 싫어하는 제 가을맞이는 언제나 다른 이보다 빠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이 땅이 가장 아름다운 이 계절은  지난가을의 감동과 아직 찾지 못한 틈을 비집으며 어느 때보다 짙은 농도의 풍경들을 보고 담으려 애쓰는 시기입니다. 어머니는 이맘때쯤 매일 늦어지는 제 귀가 시간을 보며 '가을이 왔구나'라고 하실 정도죠.

빛, 색, 꽃, 낮, 밤.


아마 제가 이 곳에 여행 온 낯선 이었다면 이 화려한 장면들에 반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9월은 지난 일 년 내내 낯선 땅의 감흥에 빠져있던 저를 다시 이 도시에 빠져들게  한한 달이었습니다. 다행히 이 곳은 제가 가장 잘 아는 곳이고 밤새 걷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풍경들은 세상에 없는 색들로 화답했습니다.



10월, 내가 정말 좋아하는 - 과연 이 계절

서울, 2015

아쉽게도  지난가을은 너무 짧았습니다. 해다마 손가락을 구부려 가을날 수를 꼽아보는데 어째 점점 그 시간이 짧아지기만 합니다. 그에 맞춰 가을을 맞는 사람들의 책임감도 점점 커집니다. 이 계절의 색과 바람, 전에 없던 여유들을 느끼는 것이 짧아진 가을 탓에 선물이 아닌 숙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단 며칠로 기억하고 있는  지난가을엔 결국 한 번도 입지 못한 가을 재킷과 일 년 내내 별렀지만 결국 찾지 못한 곳들이 남았습니다. 유독 가을엔 놓치고 지나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그 며칠간 저는 어지러울 만큼 많은 색을 보았습니다. 나무며 하늘 그리고 사람들의 손이 경쟁하듯 화려한 색들을 내놓았고 감상하는 이는 그저 앉아서 그것들을 보는 것으로 가을을 여행합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가을길을 달리는 아이들이며 손짓 몇 번으로 그림 같은 꽃다발을 내어 놓는 손을 보니 이럴 땐 보고 감탄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제 무능력함이 차라리 축복이다 싶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 가을에 무엇인가 보답할 기회가 있겠죠.



11월, 초겨울 해운대의 낭만

부산, 2015

좀처럼 속을 내어 보이지 않는 도시입니다. 그만큼 제게는 어려운 상대입니다. 올해 처음 부산을 찾았던 2월엔 내내 이 도시의 무뚝뚝한 투가 어색했지만 자꾸 보니 역시 마지못해서라도 하나씩 내어놓는 정이 있습니다. 11월, 제법 쌀쌀한 아침에 출발했지만 남쪽나라는 한없이 포근했고 이제 됐다 싶어 스스럼없이 다가갔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맘껏 먹었고 함께 또 혼자 여행하니 전에 없던 해운대가 됐습니다.

바다는 과연 인파 하나하나가 획이 되어 매 초마다 멋진 장면을 연출했고 끝내 반해버린 저는 돌아오기 전 네댓 시간을 그저 '해운대에 있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끝에서 끝으로, 시작에서 시작으로. 찬바람은 없었지만 겨울 바다의 운치가 미리 내려앉아 오히려 더 여유롭고, 즐거웠습니다. 아마 다시 찾는다 해도 해운대가 이 날처럼 아름답고 친절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마 이게 올해 내 마지막 여행일 거야'라며 신발 속 모래를 털어내며 문득 빨리 2016년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2월, 나를 감동시킨 홍콩의 밤거리

소호, 2015

멋진 혼란이었습니다. 갑자기 떠나게 된 홍콩 여행, '역시나 내 여행은 준비가 없구나'라며 뒤늦게 구입한 가이드북 몇 페이지를 볼 새도 없이 도착한 가까운 도시. 그 짧고 강한 여행은 뚜렷한 형태 없이 가슴에 붓을 휘둘러 흩뿌린 색들로 남아 있습니다. 폭우로 나를 맞은 홍콩의 밤은 비정상적으로 붉은 조명들이 빗물에 번져 어딘가 측은한 느낌을 줬지만 금방 터질 것 같은 그 그렁거림이 비를 맞고 걸을수록 점점 좋아져서 한국까지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나 이 도시가 정말 좋아'

소란스럽지만 여유가 있었고 낡았지만 품위가 있는 밤거리에 반해 침사추이에서 센트럴, 소호, 란콰이펑으로 보물 찾기 하듯 다녔습니다. 그 길 위의 풍경들은 다른 도시에선 본 적 없는 강렬한 색과 대비로 저를 매료시켰고  바가지요금 택시를 타고 겨우 소란을 빠져나온 후에도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도 저는 다시 이 곳에 오고 싶어 견딜 수 없었고 2015년의 시작에 느꼈던 '새 길을 걷는 즐거움'을 다르지만 닮은 모양새로 다시 떠올리며 다음 걸음을 다짐했습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떠날 수 있어서, 그리고  그곳이 이토록 강렬하게 아름다워 다행이었던 여행이었습니다.



나도 걸음도 꼭 그만큼 자랐어


언젠가 붉은 광장을  빠져나오기 전 마지막 걸음에 평소보다 과한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지금 떠올리니 무성 영화의 배우처럼 우스꽝스러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 본 풍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상상은 물론 처음 그 광장을 발견하고 달려 들어가던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거든요. 그 길로 다시 파고들어 다시 한바탕 즐기고 싶을 정도로.


여행이 지나고, 이제 다시 떠올리니 기대반 걱정 반으로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나보다 그 순간을 모두 겪고 즐긴 혹은 견뎌낸 제가 그만큼 성숙한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찰나들이 모여 이렇게 한 해가 지났습니다. 일 년이라는 의미가 새삼 어깨며 가슴을 누를 정도로 거대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 그 장면들을 넘기며 그새 일 년 꼭 그만치 늙은 저와 제 여행을 바라보니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내가 이토록 멋진 곳에 있었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뒤 돌아 지난 걸음을  살펴보세요,

분명 이보다 더 멋진 걸음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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