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하지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 체스키 크룸로프
우리, 여행 갈까?
아마도 뭔가에 취해 내뱉은 이야기였겠지. 찬 숨마다 부연 김이 피어오르고 등에는 땀이 송글 맺힌 겨울과 봄 사이의 오후, 아니면 돌 난간에 기대 바라보는 카렐교 중간께 펼쳐진 풍경 혹은 감정들. 어쩌면 그들 모두가 나를 흔들어 놓았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이 터져 나올 리가 없지.
열 시간 넘게 날아온 도시 한복판에서 여행을 떠나자는 나를 그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나 역시 말없이 그 눈을 응시한다. 아마 이 도시에 온 이후 가장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 본 시간이었을 것이다.
- 그래, 좋아. 어디든.
이 믿음의 깊이가 얼만큼일 것 같아, 그녀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내게 되묻는다. 아마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머쓱해진 내가 몸을 돌려 돌다리에 팔꿈치를 기대 섰고, 곧바로 그녀가 따라 돌았다. 멈춘 듯 고요한 강 블타바를 나무 유람선 몇 대가 열심히 휘젓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프라하성의 실루엣- 나는 문득 지난봄 호텔 옥상에서 본 이 도시의 전경을, 심장을 꽉 눌러 쥐는 듯 숨 막힌 그 날의 감동을 떠올렸다.
그래, 어디든. 갈 수 있어.
휴일의 나메스티 리퍼블리키(Náměstí Republiky)역에는 인적이 드물다. 하긴, 눈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운 이 도시에서 굳이 지하 굴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텅 빈 플랫폼에는 전광판이 홀로 다음 열차의 도착 시각을 알리고, 종이 티켓을 만지작 거리며 그 숫자를 바라보는 나는 되도록 천천히 열차가 와 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갑자기 하지만 급하지는 않게 떠날 수 있도록. 이 순간을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며 음미하고 싶어서.
빨간색 열차가 안델(Anděl)역까지 짧게 날았다. 꼭 밤 비행 같았던 창 밖의 검은 굴, 강약 없는 소음 속에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제 막 떠나온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성과 다리, 골목을 그렸고 소리와 노래를 흥얼거렸다. 언제쯤 돌아올까,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그날을 세 번째 여행으로 이름 붙이자고 화답한 나. 함께 떠나고 싶지만 이 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걸까. 목적지에 이 도시와 꼭 같은 풍경이 또 하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인 걸 보면.
안델 역에서 가까스로 노란색 버스를 탔다. 키가 작고 귀여운 인상의 금발 사내는 나를 보고 운이 좋다며 웃었다. 짐칸에 넣어주겠다는 그를 사양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작은 가방, 급하게 챙긴 짐은 사실 굳이 챙길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나는 그저 카렐교에서 숙소까지 함께 달리고 싶었고, 숙소를 나서 다시 한번 묻고 싶었다. 나와 떠날 준비가 되었느냐고.
알 수 없는 체코어 안내방송이 흐르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창 밖 풍경을 보며 마음에 새겼다. 어느새 돌아와야 할 곳이 된 이 도시를. 버스까지 달려온 탓인지 그녀와 맞잡은 손 언저리가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수 없이 시간이 멈추길 바랐던 풍경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낯선 도시로. 그렇게 여행이 또 한 번 시작됐을 때 나는 ‘오랜 바람이었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제야 할 수 있게 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언젠가 너무도 간절했던 지금의 이 설렘과 그동안 내가 마주했던 텅 빈 풍경들을,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갈증을. 배경은 서너 개의 도시 그리고 수십 개의 계절이었다.
-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렸지, 나?
이야기는 길어졌고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가 종종 힘없이 떨어졌다. 잠이 깨지 않도록 손등을 들어 그녀의 이마 언저리에 댔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영락없는 봄 같아서. 내가 꿈꾸던, 완벽한 오후였다.
버스의 소음이 멎은 것은, 프라하를 출발한 지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오후라기엔 늦은 시각, 작은 가방을 들쳐 매고 낯선 표지판 앞에 선 나는 도시의 이름과 그녀를 몇 번이나 번갈아 불렀다.
표지판을 따라 도시로 들어가는 동안 그녀는 내게 이 도시의 이름이 ‘체코의 오솔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가까이 다가와 귀에 속삭이는 모습이 오랜만에 듣는 ‘오솔길’이란 단어만큼 머리에서, 입가에서 뱅뱅 돌았다.
그들이 이름 붙인 오솔길을 걷는 동안 나는 종종걸음을 늦춰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거리를 뒀다. 프라하의 첫 번째 아침에서처럼 서서히 솟아오르는 새 도시의 풍경에 그 뒷모습을 놓아 보고 싶어서. 하지만 눈치 빠른 그녀는 내 바람과 달리 종종 뒤를 돌아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럴 때면 풍경도 다가오는 것을 잠시 멈췄다.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곳까지 가는 데는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내 활짝 하고 펼쳐졌을 때, 나는 한참을 그곳에 서 있어야 했다. 이 곳은 열차에서 내가 무심코 뱉은 허무맹랑한 소망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훌쩍 떠나왔지만 놓고 싶지 않았던 그 도시의 향, 첫 번째 오솔길의 끝자락에서 나는 그 향을 느꼈다.
- 좋지?
- 응, 믿을 수 없을 만큼.
프라하가 낭만이라면 이 도시는 영원이다.
사, 오백 년 전 어느 날에 멈춰있는 도시의 날짜와 골목마다 가득 쌓인 시간의 더미에 압도된 나의 고백이다. 가늘고 잘게 뻗은 골목 곳곳에서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초침의 리듬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내 시간과 비교했다. 혹시 잠시라도 시계가 멈춰 있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확신할 수 있을 테니까. 이 낡은 도시가 느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너무 급했었다고.
도시는 넘치도록 새로웠고, 충분히 익숙했다. 형태보다 먼저 내게 쏟아지는 골목의 색채가 그랬고, 이따금 멈춰 감상하는 식당의 문고리와 패인 벽, 깨진 바닥이 그랬다. 골목을 벗어나는 순간 쏟아지는 성채의 실루엣은 종종 내가 떠나온 것을 잊게 만들었다.
스보르노스티(Svornosti) 광장에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나를 맞은 것은 현악기의 소리였다. 낯선 선율은 이발사의 다리로, 체스키 크룸로프 성까지 내 걸음따라 이어졌다. 아니 어쩌면 블타바를 타고 프라하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것은 아닐까, 나는 블타바 강 위에 놓인 이발사의 다리, 목재 난간에 기대 이른 오후를 떠올렸다. 몇 시간 전 나는 석재 난간에서 이 순간을 상상했다.
- 이러다 늦겠어
이발사의 다리에서 좀처럼 떼지 못하는 발을 그녀가 끌어당겼다. 성벽의 동그란 구멍 사이로 새어든 빛이 놓은 징검다리를 따라 오르는 동안, 그녀는 몇 발짝 앞서 뒤로 걸으며 내가 쉽사리 성벽 너머에 시선을 둘 수 없도록 했다. ‘뭐 이대로 계속 당신만 보고 걸어도, 나쁘지 않겠어.’ 성벽이 조금 더 길었다면 결국 참지 못하고 이 말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결국엔 전망대에 들어서는 작은 문까지 꼼꼼히 막아 선 그녀. 하지만 옆구리를 살짝 찌르니 이내 자지러지며 문이 열린다. 그 틈으로 들어선 순간, 시간은 물론 계절까지 잊은 풍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아니, 쏟아졌다.
도시가 가장 넓게 보이는 자리에서 나는 고개 대신 몸을 돌려 하루의 절정을 만끽했다. 왼쪽으로 돌았을 때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형태가, 오른쪽으로 돌면 중세 유럽의 색이 나를 쉴 새 없이 황홀하게 했다. 도시를 둘로 나눈 블타바 강의 줄기는 장난스레 감은 붓의 한 획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아름답다,
잠시나마 프라하를 떠나 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말없이 눈과 파인더를 번갈아 보며 낯선 도시에 빠져있던 나는 한참 후에야 곁에 있는 그녀를 찾았다. 미안함에 셔터에 있던 손을 내밀어 잡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싱긋 웃었고, 이렇게 말했다.
- 내게도 오랜 바람이 있었어.
시간이 멈춘듯했던 도시에도 어둠이 깔리고, 푸른 노을은 성벽 곁에 놓였던 징검다리를 걷어간 지 오래다.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동안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앞서 걷지 못하도록 손을 꼭 잡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 이번 여행에선 서둘러 돌아가지 않을래
광장에 도착하자 도시는 색을 모두 잃고 실루엣만이 남았다.
아주 깊은 푸른빛의, 낯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