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같은 장소, 완벽하게 다른 장면. 아직은 어느 쪽도 아닌 나
기도 했지만, 기대 안 했지
인연이 닿아 돌아오게 된다면 꼭 너를 찾겠다 다짐했고
그땐 네 미소를 볼 때까지 언제까지고 곁에 있겠노라 약속했다.
비록 오늘은 그 날이 아니지만,
나 역시 그 날과 같지 않으니까.
폭신한 카센티노 코트를 팔에 건 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분명 그때와 같다. 그것은 지난 4월의 마지막 화요일이었고 지난 여행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돌 사이로 낸 창으로 보이는 성과 강, 다리가 여전하고 주황색 지붕들이 변함없다. 밟고 있는 돌은 왼쪽 모서리만 둥글게 마모된 것이 그 날 몇 번이나 곱씹어 본 것이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땀이 계절의 간극마저 메웠다.
하지만 지금 나를 마주한 풍경은 그 날과 완벽하게 다르다. 주황빛 중세 유럽의 건물들은 이름에 걸맞은 색을 입었고 다리 위엔 걷는 사람보다 멈춰 선 사람들이 많다. 짙은 남색의 블타바는 나무 유람선의 멋진 항적이, 그 날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 전망대는 연주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채웠다. 마치 같은 밑그림에 채색을 새로 한 듯한 풍경이 작은 창 밖 세상에 의지해 계단을 오른 나를 순간 휘청하게 했다. 마치 무릎 뒤를 때린 듯, 계절이며 익숙한 언어를 잊게 만든 그것이 재회의 벅찬 감동인지 이것으로 여행이 끝나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마음 덜컹하게 했으니 오답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같은 무대, 1막과 2막으로 나뉜 여행 사이에 있다. 긴 암흑의 계단을 올라 기다리던 그에게 바통을 넘겨받는 것으로 두 개의 여행이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 멋지게 맺는 솜씨며 그럴듯하게 시작할 재주가 내게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일까. 게다가 지금 이 풍경과 나 사이엔 그못지 않게 반짝이며 미소 짓는 당신이 있다. 나중에 그러나 다행히 늦지 않게 덧대 그린 그림 덕분에 나는 이제 3막 그리고 4막을 기대하게 된다.
때가 되면 놀랍도록 망설임이 사라져.
하지만 슬프게도 그건 그 때라야 알 수 있는 거아.
셔츠에 땀이 살짝 밴 것을 보니 새로 산 코트는 확실히 체코의 늦겨울에는 맞지 않는다. 요세포프 지구부터 달리듯 재촉한 걸음이 마침내 탑 아래 작은 문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 카렐 다리 위 인파를 보았고 다시 조금 들어 첨탑 끝에 걸린 구름의 모양과 하늘의 색을 확인했다. 다행히 조금 전 조각으로 보던 그대로이다. 금방 사라질 리가 없다면서도 마음은 전보다 더 급해졌다. 심호흡을 하고 몇 계단을 오르니 문득 그 날의 푹 젖은 몸보다 더 무겁고 고독했던 여름 하루가 또렷해졌다. 회색 도시에서 나는 종종 그날을 가련해했었다.
가끔 만나는 작은 창이 내가 이 도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 것 정도를 알려줬다. 작은 크기엔 불필요하게 촘촘한 창살이 답답했지만, 서너 개쯤 지나니 그 너머 풍경이 그것대로 이름 모를 체코 화가의 수채화 같아 이내 어김없이 멈춰 눈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었다. 그날도 분명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 오후는 꼭 하벨 시장에 가서 이것 같은 세로 그림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하며.
나선 계단은 그 날보다 몇 배는 더 가파르고 길었다.
나는 올라가자마자 코트를 벗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맛보단 그저 이 곳에 앉아있기 위해 주문한 빵과 달걀은 아마 점심쯤 돼야 먹을 용기가 생길 것 같다. 두 번째 아침,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어 창 밖 풍경을 한참 동안 읽고 있다. 이 텅 빈 포만감은 두 번째 여행이라야 느낄 수 있는 것이지, 라며. 그나마 맛이 좋은 초콜릿 머핀이 내 손을 들어 올었고, 팔목 반대편 시계 알이 반짝이며 정적을 깼다. 얼추 두어 시간이 지났다.
그녀와 나는 카페 안에 있는 과감한 색의 소파에 대해 그리고 낡은 테이블과의 매력적인 이질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깔아뭉갠 듯 주저앉은 자주색 소파에 앉더니 오늘 하루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아늑하다 말하는 그녀는 언젠가 꿈꿨던 해묵은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특별한 곳에서의 평범한 하루.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내 주름진 미간에 대해 묻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그렇게 믿을 뻔했다.
사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것을 뒤적거리고 있다. 택시 창 밖으로 비투스 성당이 보일 때부터였으니 벌써 삼일째다. 그렁그렁한 표정이 분명 누군가의 것은 아닐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기억의 서랍을 맨 위부터 아래까지 몇 번이나 열어 보았다. 기억력만큼은 자신하던 나는 종종 이렇게 잊은 것 잃은 것 때문에 평정심을 잃곤 한다. 지난 여행 수첩을 찾느라 밤을 새울뻔한 출국 전야가 그랬다.
모르겠어, 라며 쓰러지듯 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겨울 하늘 한 조각은 계절을 보여줄 만큼 넉넉하지 못했지만 볼에 닿는 촉감이 분명 겨울이다. 구름이 포슬포슬 퍼진 모양이 익숙하다며 미간을 힘껏 찌푸린 후에 시선이 서너 모금 마시고 놓은 바닐라 라테에 향했다. 둘을 몇 번 번갈아본 후 주저 없이 일어났다. 머리며 등줄기가 소름 끼치도록 상쾌해졌다.
카렐 다리까지 가는 길은 이미 알고 있다. 아마 십오 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도 대신 당신 눈을 보고 조금 전 하던 이야기를 나누면 그마저도 짧아질 것이다. 어느새 이 도시에 이토록 무던할 수 있게 됐다. 그게 오늘따라 퍽 감동이다.
- 그게 떠올랐나 봐
- 뭐가?
- 아니야, 아니야
사실 이 전망대에 오른 이유는 비를 더 머금고 있기가 힘들어서였다.
지금 내가 고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다.
아침 아홉 시와 오후 세시 사이. 맺기엔 부족하지 않은 여섯 시간, 떨쳐 내기엔 턱없이 모자란 삼백 육십여 분이 주어졌다. 그마저도 이름 모를 기차역에서, 바츨라프 광장과 신시가지, 비를 피해 들어간 맥도널드에서 이백여 개가 이미 떨어져 내렸다. 아침도 거르고 재촉한 걸음이지만 돌아보니 그저 길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길은 그저 블타바를 의지해 걸었고 그 끝에 이 탑이 있었다.
십여분쯤 나선형 계단을 다 밟은 후에야 목덜미에 달라붙은 젖은 셔츠 깃을 떼고 머리칼을 털었다. 소매를 쥐어 빗물을 짜냈다. 거짓말처럼 탑 위가 텅 비었다는 것을 그 후에야 알았고 아찔한 고독의 향도 그제야 콧속으로 스민다. 우산 없던 하루가 아마 이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걸어온 길은 비에,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아침보다 거세진 비에 돌 너머 풍경이 참았던 울음이 터진 것처럼 보인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심한 표정이 처음 보는 것이라 한없이 낯설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어제처럼 웃지 않고 몸을 가린 채 다리를 건넌다. 아무도 없는 탑 위엔 빗소리, 비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가 때리는 것들의 소리뿐이다. 속삭임 같기도 흐느낌 같기도 해 잔뜩 숨을 죽인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대로도 당신은 아름답다는 것은 역시 말뿐, 사실은 한참을 무기력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곁에 있는 나를 외롭게 했던 너, 그보다 먼저 너를 혼자 둔 나에 대해 생각했던 것도 같다. 이 도시, 탑 그리고 내가 서로에 대해 아무 관심도 두지 않던 그동안에도 시간은 쉼 없이 흩어져 내린다. 마침내 삼백 육십여 개의 칩을 모두 잃은 나는 올라왔을 때보다 몇 배나 무거운 것들을 흠뻑 머금고 아찔한 계단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켜보겠다던 내 선택이 사실은 최악수였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공항에 가는 차의 시트가 나를 따라 흠뻑 젖었고 번진 차창 밖으로는 이제 그렁그렁한 표정마저 제대로 볼 수 없다. 두세 계절이 흐른듯한 추위가 그제야 한 번에 찾아왔다.
그 순간도 봄이었을까.
꼭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아무래도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어쩐지 가진 것을 다 보인 것 같은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촌스런 감탄사를 지른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돌 너머 풍경을 응시했다. 카페를 나서며 상쾌해진 머리와 코트를 벗어 가벼워진 몸은 계절을 잊게 했고, 이윽고 탑 위를 제법 채운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돌아오고 나서야 뒤늦게 떠오른 지난 약속을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곁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은 아쉽게도 나 혼자만 기억하는 것 같지만, 환한 표정 앞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후련했다. 미뤄뒀던 지난 이야기의 마무리를 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였다. 처음부터 내 멋대로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장면 앞에서 마지막으로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새 구름이 걷혔는지 풍경이 조금 더 밝아졌다.
오랜 시간 알 수 없는 내 표정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치자 잠시 커졌다 곧 가늘게 뻗는다.
- 이제 됐어?
- 충분해
좁은 나선형 계단은 조금씩 길어지는지 올라올 때보다 더 가파르게 느껴졌지만 내려가는 동안 그녀와 나는 한 번도 손을 놓지 않았다. 중간중간 작은 창으로 바깥세상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손을 꽉 쥔 것은 방금은 홀린 듯 혼자 탑에 오른 두어 시간 전의 나에 대한 사과였다. 이 곳에서 나는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대신한다
우리는 내려와 카렐 다리를 걸었다. 이따금씩 멈춰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과 초상화가 그려지는 것을 보고 마리오네트 공연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지난봄의 이야기를 여전히 이어가는 그의 머리에는 밀짚모자 대신 검은색 중절모가 올려져 있다. 미련 많은 내 이야기에 든든한 후원군이 생긴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 봄보다 부적 짧아진 카렐 다리를 끝에서 끝으로 몇 번이나 쓸고 훑었다. 그동안 그녀는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걸음이 더 이상 여행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짧은 키스를 했다.
감은 눈꺼풀에 오후보다 환한 주황색 빛이 비쳤다. 이것이 이제야 내게 허락된 프라하의 밤이다.
제목 없는 연주가 여전히 그 날처럼 바람으로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