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놀라운 것은 늘 첫번째 걸음에 숨어있다
빠아아앙-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잠시 당신의 손을 놓았다 얼른 다시 잡았다. 적당히 빈 빨간 트램이 금세 저만큼 앞질러간다. 부연 유리창 너머의 새벽빛이 한결 풍만하게 퍼진다.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방금 그 장면 너무 사랑스럽지 않았냐면서.
꼭 난생처음 맞는 겨울처럼 낯선 찬 공기에 잠에서 깬 것은 이미 한참을 걸어온 길 한복판 그리고 이른 다섯 시 남짓. 내 여행의 첫 번째 아침은 늘 이렇다. 쓸데없이 활기차고 부지런하다.
분명히 내가 깨워 붙들고 나왔을 이 손, 그리고 함께 내딛는 발. 잠시 멈춰 아직 잠에서 덜 깬 당신의 얼굴을 본다. 새벽빛을 받아 상기된 듯한 색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못내 미안해 잡은 손에 살짝 더 힘을 준다.
괜찮아?
응, 좋아.
일 년 전,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이름보다 먼저 사랑하는 공간에 대해 물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 잘 설명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역시나 눈 앞의 그녀보다 발아래, 머리 위 이 도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살짝 찌푸린 눈으로 작은 블랙베리 속 화면을 번갈아 보며 몇 개의 단어를 적던 그녀의 모습은 퍽 매력적이었다.
나답지 않게 취한 그 날, 아쉽게도 쪽지는 새카만 밤 속에 잠겨 버렸지만 다행히 이름 하나가 번지지 않고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지 못한 숙제, 지키지 못한 약속처럼 가슴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온 여행의 새 아침, 그러니까 두 번째 첫 아침에 난 그곳을 향하고 있다. 꼭 내일이면 그 이름을 영영 잊을 사람처럼. 재미있게도 이 날 이후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는 데 전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됐다.
새벽 트램 한 대가 지나간 후 한참을 텅 비어있던 거리, 평소 같았으면 한없이 여유롭다며 어느 영화에서처럼 길 한가운데 당신과 팔을 뻗어 드러눕는 일탈을 꿈꿔볼 만도 한데 어쩐지 이날은 그 풍경이 내 맘을 더 다급하게 했다. 간간히 좌우를 한 번씩 돌아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말 한마디 없이 걸음도 시간도 그렇게 한참을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 내가 걷는 길엔 이따금씩 머리칼을 아침 방향으로 빗어 넘기는 손길이 불어오고 있다. 오늘만큼은 이 손길을 바람 대신 아침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니 괜히 아까보다 조금 포근해진 것 같다.
당신의 뺨을 물들였던 새벽의 색이 어느새 내 가슴에 들었던 걸까? 공원이 생각보다 가까웠던 것과 어느새 아침이 주변에 가득 차오른 것 심지어 아직 올라가야 할 계단이 한참 위로 늘어 오른 것도 하나같이 즐거웠다. 숨이 조금 찰 정도로 오르는 동안 일부러 등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거창한 수식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때는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새벽녘 하늘의 오묘한 그러데이션과 천년 간 아래서 위로 밀어 올린 도시의 실루엣. 둘로만 그린 그림이 품위 있게 도시 전체를 채우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이 순간 내려앉아 혼자일 때보다 더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이따금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갈 때 잠시 마주 보며 미소 짓는 당신, 이내 비슷한 것으로 화답하는 나. 늘 혼자였던 내 여행에 오늘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며 그렇게 아침을 맞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암막이 걷히고 도시가 다시 벗어 두었던 색을 입는다. 살짝 비친 틈에 안달이 나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고 고개를 기울여 보니 멀리 있던 장면들이 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이 도시는 언제나처럼 친절해서 내가 한 발 다가가면 두 걸음씩 다가왔다.
어느새 도시는 내가 사랑하는 그 모습이 되었고 잡은 손 끝에 있는 당신의 모습도 조금 전보다 더 환하게 밝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우리는 그 자리에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도 그 순간 나를 채운 감정을 넘치기 전에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 무척 서툴고 어색했지만 즐거웠다.
아, 그리고 확실히 그 날 나는 지난 여행의 첫 번째 아침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부러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 하는 쓸데없는 잔소리도 꾹 참았던 그 아침의 나에 대해. 아마 그 날 다 비워냈기에 오늘 다시 이렇게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았겠냐며.
거울은 없었지만 그 순간 내 눈빛은 확실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의 또 다른 프라하, 레트나 공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