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여행 사이의 섬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두 여행 사이의 하루

by 금요일
그 순간은 분명 새 여행의 팡파르였지만
동시에 헌 여행의 커튼콜이기도 했다.


프라하로 가는 체코항공 비행기 안에서 지난밤 어렵게 찾아 챙겨 온 수첩을 꺼낸다. 그 날 이후 꺼낸 적 없던 것이다. 그 새 저 혼자 낡아버린 수첩을 휘리릭 넘기다 삼분의 일 즈음에서 이윽고 눈이 멎는다. 내 멋대로 정한 첫 페이지 왼쪽, 지난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렇게 여행은 또 한 번 끝이 났다.

아니, 잠시 돌아왔다고 할게. 곧 다시 떠나게 될지 모르니.


다만 다음 여행은 오늘처럼

잃을 수밖에 없고, 놓아야만 하고, 잊고 싶은 것들 뿐인 여행이 아니기를.


- 2015년 4월,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



다시 그곳으로 향하는 이 순간이 새 여행의 시작임을 의심한 적 없는 내게, 그의 메시지는 두 여행 사이에 뜬 섬을 가리킨다. 글자며 감정 하나하나가 마치 이제 막 말라가는 잉크처럼 생생하다. 떠밀리듯 그 위에 올라선다. 두 여행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그 외딴 시간에.


양 옆을 번갈아 보는 것밖에 할 것이 없던 외로운 섬, 왼쪽 어깨너머에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지난 여행이 있다. 일 년 만이다, 일 년 만에 그 여행에서 벗어나 다시 그에게 묻는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 놓기 싫었던 것들과 잊을 수밖에 없던 것들에 대해. 그의 대답은 아주 길게 이어졌고 뒤이어 긴 침묵이 흘렀다.



귀보다 먼저 마음의 정적을 깬 것은 곧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안내방송.

좁은 비행기 의자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큰 한숨의 반동으로 팔을 당겨 무심히 끄적이는 손이 문득 남의 것 같다. 글씨마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다.


2016년, 두 번째 프라하 여행


그래, 뱉어내고 나니 이것이 내 방식의 화답이다. 별 것 아닌데 참 오래 걸렸다.


반가움과 설렘의 무게 차이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

꼬박 한나절을 날아야 도착하는, 불과 일 년 전 내 세계에는 형태조차 없던 도시. 여전히 손바닥만 한 창 밖의 풍경은 비현실 같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다. 순간 그 날과 지금 이 순간 사이, 일 년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울렁이는 설렘과 나른한 편안함.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느낌을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품게 됐다.


서울과 다름없이 쌀쌀한 기온에 입김 불어가며 바츨라프 하벨 공항을 나선 늦은 오후, 문득 지난 여행과 오늘의 무게를 양 손에 들고 가늠해 본다. 오래 살필 것도 없이 가진 것 많은 이 반가움이 지난 설렘보다 꽤나 묵직하게 잡힌다.


좌우를 번갈아 보는 습관은 그 섬에서 얻은 것이다. 눈에 닿는 모든 장면들을 내 기억 속 편린들과 하나하나 겹쳐 비교해 본다. 귀퉁이가 어긋난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씨름을 하던 내게 가장 큰 조각과 꼭 들어맞는 장면 하나가 달려와 박힌다.


'우와'. 천 피스짜리 조각을 다 맞춘 아이처럼 새어버린 낮은 환호성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의 것이기도 했다.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무척이나.

구시가 광장, 프라하

함께하던 날엔 떠올릴 수 없을까 싶어 소리 내어 읽으며 마음에 새겼다. 돌아와선 혹 없던 일이 될까 매일 네 사진을 봤다. 짐을 대강 던져놓고 나선 길은 어느새 깊은 밤이었고 익숙한 걸음은 망설임 없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문득 낯선 색채가 묘한 떨림을 준다. 떠올려 보니 밤의 구시가 광장은 처음이다.


이 날 나는 나답지 않게 한 행인에게 내 사진을 부탁했다. 돌아와서 열어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두 팔 가득 안고 있던 것들이 순간 왈칵 쏟아졌나 보다. 두 번의 여행, 하나의 이야기. 당신의 두 번째 여행도 이랬을까?


카렐교, 프라하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이 다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날 나는 당신의 손이 정말 필요했어 라며. 나는 아직 이 곳만큼 나를 하얗게 발가 벗기는 곳을 보지 못했다. 까만 밤하늘 위 기적처럼 그려진 야경으로 걸어가는 길, 키스하는 연인과 말없이 손 맞잡은 노부부가 있다. 역시 이 땅 위에서 사랑은 유독 또렷한 형태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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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밝혀진 내 세계는 빛을 잃어도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친다. 다시 미지(未知)가 될 수 없다. 발걸음을 따라, 종종 터지는 감탄에 이끌려 걷는 길 위 빛나는 장면들은 그 날 나를 감동시킨 장면들이다.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잊고 그에게 다시 몇 마디를 건넨다. 다행히,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고.


페트르진, 프라하

자정이 가까운 시각, 연신 손목시계로 걸음을 채촉하며 단숨에 내 기억 속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다. 여전히 그 날처럼 빛나는, 단숨에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 그 장면이다. 오늘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없던 일이 될까 두려웠던 걸까, 간절히 종이만 기다린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써 내려간 하루. 그렇게 크게 감싸 안듯 다시 품은 시간. 그것은 분명 시작이었지만 어쩐지 마지막 같기도 했다.



새 아침은 무척 빨리 찾아왔다.

아슴푸레 비친 햇살에 일어나니 조금 전까지 기대 있던 생소한 공간에는 지난밤엔 볼 수 없었던 낯선 것들뿐이다. 뭐 하나 쉽게 손을 댈 수 없던 그곳에서 이내 커튼을 젖히고 창문에 볼을 맞대 하루를 맞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 것 아닌 그 공간 속 단 하나 익숙한 존재였다. 유독 길었던 어제, 나를 공허의 섬에서 끌어올려 준 당신.


그래. 이제 너와 나, 우리만의 첫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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