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행은 낭만적인 쉼표로 남아

잠시 마지막, 나를 취하게 한 낭만은 다름 아닌 그곳에 있었다.

by 금요일
이것은 지난 걸음을 되밟으며
아주 천천히 건네는 작별 인사


4월 29일, 29일, 29일.


애꿎은 전원 버튼을 눌러 휴대전화 화면에 표시된 날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숫자가 바뀌었을 뿐인데 어제와 오늘은 완전히 다른 날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아침까지 거르고 늦잠을 잤다. 우산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선 아침, 비행시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았지만 오늘은 그저 한 뭉텅이다. '돌아가는 날'.


돌아오던 날, 프라하

대부분의 걱정은 꼭 들어맞는다. 이미 알고 있기에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그녀는 떠나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영영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는데. 아침부터 제법 세차게 내리는 비에 밤 사이 두어 계절쯤 지난 것 같다. 혹 그게 아니라면 그 새 다른 도시에 누가 나를 떨어뜨려 놓은 것도 같다. 안개에 가려진 저 풍경이 먼저 뒤로 물러나 달아나는 듯.


생각대로 시간은 뭉텅이로 지났다. 해 한 번 비추지 않고 오후까지 단숨에 흘렀다. 이제 듣지 못하더라도 혹 들으려 하지 않더라도 작별 인사를 건네야 할 시간이다. 가시지 않는 아쉬움에 어깨부터 손등까지 쓸어내리듯 다시 한 번 이 도시를 걸었다.

화약탑 위, 2015

'응, 알아'


쓰다듬으며 걷다 보니 그녀는 이내 그 날 나를 반기며 짓던 그 표정을 짓는다. 떠나기 전에 다시 봐서 다행이야, 지은 미소 덕에 비에 젖고 안개에 가려 낯설었던 기억들이 다시 선명해졌다. 잠시 남의 것 같던 이야기들이 다시 내 것이 되어 길을 기울이고 손을 이끈다.


이 멋진 땅과 이별하는 길, 가장 빛나던 봄의 그 순간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는다.

이것이 이 여행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이다. 끝끝내 붙잡고 싶던 이 낭만과 결국 멀어지고 떨어지는 내 방식이다.



"평범한 여행자일 수 있어서 기뻤어"

프라하 성, 2015

혹 서울의 첫 여행지로 경복궁부터 찾는 외국 친구가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할까 상상해 보니 눈 앞의 프라하 성이 한결 흥미롭게 보였다. 내가 본 첫 번째 프라하는 이 성의 풍경들이었다. 첫 번째 밤과 첫 번째 아침 모두.


생각대로 성 내부는 따분했고 인파에 밀리며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하실 같던 성을 빠져나오니 잠시 끊긴 여행이 다시 이어지는 것 같다. 내게 프라하 성은 이 시간의 표정들로 기억되고 있다.

여행은 평범한 색들이 특별한 캔버스에 흩뿌려져 완성되는 그림이라 했던가. 아마 몇 날을 빼면 늘 계속되었을 그 음악이 내겐 새로 구매한 앨범의 인트로 트랙처럼 쿵쾅거려 걸터앉아 나른한 시선을 보내는 그들 몫의 설렘까지 기꺼이 떠안았다. 천년 된 건물보다 그들이 만든 소리와 형태들이 좋아 보물 찾기 하듯 구석구석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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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소로, 2015

만약 다시 한 번 그곳을 찾게 된다면 또 이 성을 찾게 될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다면 가장 먼저 이 곳으로 향해 이제는 퍽 익숙해진 풍경 앞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여행이지 이건?'이라 속삭일 것이다. 그래야 그 날 우리의 웃음과 감탄이 그 캔버스 위에서 더 선명한 색을 띨 테니까.



"바람 같던 그 연주를 잊지 못할 거야"

카렐교, 2015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음악 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멀어지지만 종종 그때의 환호성도 끼어든다. 늘 사람을 피해 여행하던 나는 그 다리, 그 도시 가장 소란한 516m의 섬에서 가장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유독 두 사람의 대화가 많았던 그곳, 소란함 속에서도 마주 보며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닿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며. 마음에 방향을 더해야 진심이 된다는 생각을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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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짧고 평범한 오후에 펼쳐진 족히 수만 장의 장면들 중 베스트 씬은 단연 사람이 만든 것들이다. 둘만의 것이 곧 모두의 것이 되었던 기적 같은 장면, 기꺼이 내밀어 나누던 손바닥에 새겨진 의미 있는 언어들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진'기계를 원망하게 한 아름다운 선율까지. 그 장면들을 보며 떠올렸다. 사랑은 종종 또렷한 형태를 띤다.



"그 축제의 조각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해"

구시가 광장, 2015

그곳에서 든 생각은 내내 단 하나뿐이었다. 날씨와 시간이 모이고 사람으로 인해 시작된 이 거대한 축제에 내가 한 조각이 될 수 있어 무척 기쁘다고. 십 수년을 기다린 이 축제를 앞두고 잠이 오지 않아 해가 뜨기 전 자리를 채우고 나 하나쯤 빠져도 모를 때까지 남아있었다. 광장이 손바닥만큼 작아 보일 때까지 소란을 음악 삼아 걸었다. 독무가 군무가 되고, 독백은 곧 합창이 되었다. 이틀째 입은 셔츠가 턱시도가 된 듯 으쓱했던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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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가득 모인 사람들은 행복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뒷모습으로 지은 표정들이 하나하나 눈 부실 듯 환해 눈을 찡긋하면서도 깜빡이는 시간이 아쉬워 차라리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제 도시보다 이 광장의 이름을 먼저 부르며 고대한다. 축제가 다시 시작될 날을. 맘 속에 또 하나의 여행지가 생겼다.

언젠가 뚜벅뚜벅 걸어와 나란히 서서 사진 한 장 찍고 유유히 떠나는 백발의 노인. 귀에 이어폰을 꽂고 카메라 한 대 든 모양새가 나와 닮아 씩 하고 웃었다. 이게 언젠가의 내 모습일 것 같아서. 그때 쑥스럽더라도 붙잡아 물을 걸 그랬다. 당신의 첫 여행은 언제였냐고.



"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모든 처음에 깃들었던 기적들이야"

프라하의 밤, 2015

어느 여행이 그렇지 않겠냐만 그곳의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아침부터 낮, 저녁에서 밤으로 네 번의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골목을 건너며 몇 번의 계절을 지나기도 했다. 그리고 잘게 쪼갠 여행의 매 시작에는 그 노력에 과분한 기적이 슬쩍 내려앉았다. 덕분에 같은 장소에서 다른 여행을 하기도 했고 가만히 앉아 머문 하루에 녹초가 되기도 했다.


그토록 꿈꿨던 첫 여행,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첫 길, 낭만에서 핀 소중한 인연. 시작은 많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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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 전의 나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서로 아는 이와 나누는, 스치듯 가벼운 인사가 한동안 너무 큰 불행 같아서 피하곤 했다. 마침내 찾아온 그곳에서 나를 위로한 것은 내내 차고 넘쳤던 '새것'들이었다. 너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쭉 뻗어 옆 사람을 바라봤던. 그리고 그 장면들엔 항상 길 위의 이름 모를 벗들이 있었다. 어느새 내 프레임 안에 당신이 들어와 주기를 내심 기다렸다.


결국 내가 그토록 찬양한 이 도시의 낭만은, 마주치고 스치며 어쩌다 눈인사 건넨 낯선이 들에 게 나뉘어 있었다. 어쩌면 이 도시의 나이보다 위대한 것은 찾아온 이들이 저마다 품고 와 한 겹 한 겹 채운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거 알아요? 난 당신들의 여유가 정말 좋았어요

존 레논의 벽으로 가던 길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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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부러웠어요. 몇 번은 원망하기도 했어요. 왜 당신들은 이 땅에서 태어났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는지. 당신들이 내게 표정으로 손짓으로 보인 그 여유로움이 이 도시의 날씨며 시간, 풍경 때문이라 믿었거든요. 내가 있는 곳보다 특별하다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나도 그럭저럭 비슷한 미소를 흉내 낼 수 있었거든요. 나는 이내 으쓱해졌고 그 후론 이 곳에 있는 것이 좋기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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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때쯤 되었을까, 어느새 당신들을 따라 웃는 나를 발견하게 됐어요. 그동안 이 낯선 거리들을 걸을 때 자주 두리번거리며 꽤나 긴장했었는데 말이에요. 입꼬리가 저리도록 한 번 씩 웃고 나니 쉬워졌어요. 혼자 나누는 대화도 전보다 유쾌해졌고, 화제가 떨어지면 종종 당신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는 여행을 멈추고 당신들과 함께 머물 수 있었어요. 비록 그러려던 것이 아닌 것을 알지만, 당신들은 분명 내게 그래 줬어요.

Sbohem (안녕),


빛나던 봄이여, 뜨거웠던 여행이여.

고마워요, 그 봄을 가장 반짝이는 것들로 채워 줘서.





그렇게 여행도 낭만도 그 봄에 고스란히 남겨 두고 돌아왔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빛나던 2015년 봄, 프라하.



2016. 2.4 -
두 번째 프라하 여행을 떠납니다,
이번에는 당신의 선물도 챙겨 올 수 있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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