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라하, 구시가 광장

돌이켜보면 그 풍경들은 석별 길에 흐드러진 봄 같았다

by 금요일
어제 결국 한 숨도 못 잤어
아냐, 사실 여기 와선 줄곧 그래


AM 5:34, 프라하

'결국, 이럴 줄 알았지.'


호텔 앞에 펼쳐진, 죽은 듯 잠잠해 유난히 낯선 풍경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어느새 혼잣말이 익숙해졌다. 감탄이기도 탄식이기도 했다. 이 붉은 새벽녘을 놓치지 않은 나에게 보내는, 채 뜨지 못한 한쪽 눈에게 건네는.


붉게 물든 새벽길이 단풍 잠긴 개울 같아 첫걸음 담그기가 유독 조심스러웠다. 지난밤,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던 이 길은 이제 알고 싶은 것들만 남아 한결 후련하게 나를 맞는다. '후-' 역시 지루한 티타임보단 이 찬 공기 쪽이 내게 어울려 라며 이 아침을 위해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던 것을 꺼낸다. 목적지 없는 걸음, 그리움 없는 산책. 아직 잠든 이 길에 제격이다.


여행은 기꺼이 목적지를 잃을 수 있어 좋다. 자랑할 것 없는 이 하루가 평생 꺼내 열어 볼 보석함이 되는 묘한 탐방이 쉬 지루할 리 없다. 어쩌면 나는 한없이 특별한 그 땅에서 최선을 다해 평범하려 했던 것 같다. 그것이 가장 소중해질 것을 알기에. 마침 기다렸던 듯 지면으로부터 오르는 푸른 아침 색이 꼭 내가 있던 곳과 같아 반가웠다.


구시가 광장, 틴 성당

돌이켜 보면 누구도 내게 길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지름길 가듯 오래지 않아 닿았다. 모든 것이 처음인 땅, 마치 아직 아무도 사랑한 적 없는 듯 이 완벽한 무지(無知)를 만끽하려던 꿈은 휘저어졌지만 그 끝이 이곳이었던 것만은 행운이다. 찌르듯 높은 첨탑에 이끌리듯 걸어간 길, 이윽고 그 아슬아슬한 실루엣이 걷힌 후에야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곳이다. 이 광장의 하루가 이제 막 시작됐다. 지극히 평범한 이 하루가 내겐 떠나기 전 마지막 하루이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 구시가 광장

소년 시절부터 나는 종종 가장 기쁜 순간 앞에서 머뭇 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때는 이유 없이 움츠러들어 뺨이 떨리기도 했다. 특별한 것을 묘하게 경계하던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십 수년을 꿈꾸던 그 풍경 앞에서 오랜만에 그 시절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꿈같은 풍경을 맞이할 준비를 조금만 더 할 수 있도록 물러나고 물러나는.


하지만 이내 이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제법 넓은 이 광장이 곧 비좁고 답답해질 것이다. 그땐 그대로 또 감탄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공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달아오르지 않은 이 무대에서 나는 잠시 주인공이 되어 홀로 춤을 추듯 걸었다. 족히 이십여 년이나 계속됐던 내 주저함의 끝이다.

그 광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던던 것은 이 여행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랑 중의 하나이다. 누가 내게 프라하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밤이라고 하겠지만, 내 여행이 언제 가장 반짝였냐며 속삭인다면 그리고 그가 내게 매우 중요한 이라면 조용히 해가 뜨기 전의 이 고요함이었다고 할 것이다.


텅 빈 구시가 광장을 걷는 내내 나는 프라하에서 맞이한 첫 아침의 기적 같은 풍경을, 잠에서 깨 꿈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 그 풍경 속에 당장 파고들고 싶다던 기도를 떠올렸다. 그렇게 그 두 아침이, 여행 전체가 팽팽하게 이어진다. 해나 인간이 나눈 시간과는 상관없이. 몇 번의 밤이 지났지만 그 아침이 내게 과거가 아닌 것처럼.


그 자체로 작은 도시 같았던 이 광장을 배경으로 그 망상은 주인공과 관객들로 이 광장이 가득할 때까지 계속됐다. 덧없이 하지만 더 없이 즐겁게, 잠시 멈췄던 산책을 이어간다. 골목마다 환영이자 작별의 눈인사다.


프라하 천문 시계탑
땡- 땡-


그렇게 잠보다 달콤한 생각들에 빠져있던 나를 또 한 번 깨운 것은 오전 열 시를 알리는 천문 시계탑의 종소리. 이제야 이 광장이 빈자리 없이 여행자들로 가득한 것을 알았다. 아쉽지만 리허설이 끝나고 이제 내 자리, 관객석으로 돌아갈 차례다. 한바탕 거센 춤이었는지 혹은 아쉬움 때문인지 몰라도 뒷걸음이 쉽지 않았다.

매시각 쇠로 만든 닭이 울고 조각상이 종을 울리는 구시가 광장의 세리머니. 몇 시간 전 풍경이 거짓말인 듯 광장은 그 순간을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시계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닌데 이들도 나도 이 짧은 순간을 위해 많게는 하루를 꼬박 날아와 한마음으로 오전 열한 시가 된 것을 환호한다. 새삼 내가 이 여행에서 느낀 한없이 특별한 감정들을 돌아보며 소란 속에서 여행을 정리한다. 그것들이 곧 열두 시가 되는 것처럼 평범하고 당연하지만, 생각하면 무척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겠냐며.

그렇게 곧 해가 질 늦은 오후까지 그 작은 여행이 계속됐다.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 무척 긴 하루, 머문 곳은 광장 한 곳뿐이었지만 도시 전체를 여행한 것 못지않은 감정들을 새길 수 있던 곳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좀처럼 떠날 수 없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할 방법을 이미 안다는 듯 여유로웠다. 과연 낭만 혹은 기적이라 부른 이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다웠다. 그래서 나는 이 광장을 그 자체로 이미 작은 프라하라 부른다.

무대와 관객석을 오가며 계속된 공연은 시계탑의 종소리로 한 시간마다 끝나고 새로 시작했고, 햇살과 구름에 암전과 연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무뎌지지 않던 그 감동들, 역시나 쉽게 놓을 수 없던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마지막 물음을 끝으로.


언젠가 오늘처럼 우연히 네게 닿을 수 있을까, 다시.



누구도 내게 이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행의 마지막에서 이 광장에 우연히 닿았다. 아마 이것이 이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꼭 들어야 했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안녕, 프라하. 이제 여행이 끝났어.


구시가 광장, 시계탑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