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그 풍경들은 석별 길에 흐드러진 봄 같았다
어제 결국 한 숨도 못 잤어
아냐, 사실 여기 와선 줄곧 그래
'결국, 이럴 줄 알았지.'
호텔 앞에 펼쳐진, 죽은 듯 잠잠해 유난히 낯선 풍경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어느새 혼잣말이 익숙해졌다. 감탄이기도 탄식이기도 했다. 이 붉은 새벽녘을 놓치지 않은 나에게 보내는, 채 뜨지 못한 한쪽 눈에게 건네는.
붉게 물든 새벽길이 단풍 잠긴 개울 같아 첫걸음 담그기가 유독 조심스러웠다. 지난밤,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던 이 길은 이제 알고 싶은 것들만 남아 한결 후련하게 나를 맞는다. '후-' 역시 지루한 티타임보단 이 찬 공기 쪽이 내게 어울려 라며 이 아침을 위해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던 것을 꺼낸다. 목적지 없는 걸음, 그리움 없는 산책. 아직 잠든 이 길에 제격이다.
여행은 기꺼이 목적지를 잃을 수 있어 좋다. 자랑할 것 없는 이 하루가 평생 꺼내 열어 볼 보석함이 되는 묘한 탐방이 쉬 지루할 리 없다. 어쩌면 나는 한없이 특별한 그 땅에서 최선을 다해 평범하려 했던 것 같다. 그것이 가장 소중해질 것을 알기에. 마침 기다렸던 듯 지면으로부터 오르는 푸른 아침 색이 꼭 내가 있던 곳과 같아 반가웠다.
돌이켜 보면 누구도 내게 길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지름길 가듯 오래지 않아 닿았다. 모든 것이 처음인 땅, 마치 아직 아무도 사랑한 적 없는 듯 이 완벽한 무지(無知)를 만끽하려던 꿈은 휘저어졌지만 그 끝이 이곳이었던 것만은 행운이다. 찌르듯 높은 첨탑에 이끌리듯 걸어간 길, 이윽고 그 아슬아슬한 실루엣이 걷힌 후에야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곳이다. 이 광장의 하루가 이제 막 시작됐다. 지극히 평범한 이 하루가 내겐 떠나기 전 마지막 하루이다.
소년 시절부터 나는 종종 가장 기쁜 순간 앞에서 머뭇 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때는 이유 없이 움츠러들어 뺨이 떨리기도 했다. 특별한 것을 묘하게 경계하던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십 수년을 꿈꾸던 그 풍경 앞에서 오랜만에 그 시절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꿈같은 풍경을 맞이할 준비를 조금만 더 할 수 있도록 물러나고 물러나는.
하지만 이내 이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제법 넓은 이 광장이 곧 비좁고 답답해질 것이다. 그땐 그대로 또 감탄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공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달아오르지 않은 이 무대에서 나는 잠시 주인공이 되어 홀로 춤을 추듯 걸었다. 족히 이십여 년이나 계속됐던 내 주저함의 끝이다.
그 광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던던 것은 이 여행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랑 중의 하나이다. 누가 내게 프라하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밤이라고 하겠지만, 내 여행이 언제 가장 반짝였냐며 속삭인다면 그리고 그가 내게 매우 중요한 이라면 조용히 해가 뜨기 전의 이 고요함이었다고 할 것이다.
텅 빈 구시가 광장을 걷는 내내 나는 프라하에서 맞이한 첫 아침의 기적 같은 풍경을, 잠에서 깨 꿈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 그 풍경 속에 당장 파고들고 싶다던 기도를 떠올렸다. 그렇게 그 두 아침이, 여행 전체가 팽팽하게 이어진다. 해나 인간이 나눈 시간과는 상관없이. 몇 번의 밤이 지났지만 그 아침이 내게 과거가 아닌 것처럼.
그 자체로 작은 도시 같았던 이 광장을 배경으로 그 망상은 주인공과 관객들로 이 광장이 가득할 때까지 계속됐다. 덧없이 하지만 더 없이 즐겁게, 잠시 멈췄던 산책을 이어간다. 골목마다 환영이자 작별의 눈인사다.
땡- 땡-
그렇게 잠보다 달콤한 생각들에 빠져있던 나를 또 한 번 깨운 것은 오전 열 시를 알리는 천문 시계탑의 종소리. 이제야 이 광장이 빈자리 없이 여행자들로 가득한 것을 알았다. 아쉽지만 리허설이 끝나고 이제 내 자리, 관객석으로 돌아갈 차례다. 한바탕 거센 춤이었는지 혹은 아쉬움 때문인지 몰라도 뒷걸음이 쉽지 않았다.
매시각 쇠로 만든 닭이 울고 조각상이 종을 울리는 구시가 광장의 세리머니. 몇 시간 전 풍경이 거짓말인 듯 광장은 그 순간을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시계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닌데 이들도 나도 이 짧은 순간을 위해 많게는 하루를 꼬박 날아와 한마음으로 오전 열한 시가 된 것을 환호한다. 새삼 내가 이 여행에서 느낀 한없이 특별한 감정들을 돌아보며 소란 속에서 여행을 정리한다. 그것들이 곧 열두 시가 되는 것처럼 평범하고 당연하지만, 생각하면 무척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겠냐며.
그렇게 곧 해가 질 늦은 오후까지 그 작은 여행이 계속됐다.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 무척 긴 하루, 머문 곳은 광장 한 곳뿐이었지만 도시 전체를 여행한 것 못지않은 감정들을 새길 수 있던 곳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좀처럼 떠날 수 없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할 방법을 이미 안다는 듯 여유로웠다. 과연 낭만 혹은 기적이라 부른 이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다웠다. 그래서 나는 이 광장을 그 자체로 이미 작은 프라하라 부른다.
무대와 관객석을 오가며 계속된 공연은 시계탑의 종소리로 한 시간마다 끝나고 새로 시작했고, 햇살과 구름에 암전과 연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무뎌지지 않던 그 감동들, 역시나 쉽게 놓을 수 없던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마지막 물음을 끝으로.
언젠가 오늘처럼 우연히 네게 닿을 수 있을까, 다시.
누구도 내게 이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행의 마지막에서 이 광장에 우연히 닿았다. 아마 이것이 이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꼭 들어야 했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