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카렐교. 여태 난 그 위.

누구나의 프라하, 모든 이의 추억과 이어진 다리.

by 금요일
이제야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입을 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서였어



그 여행을, 기억을 털어보면 꿈같지 않았던 장면을 손가락 몇 개를 굽혀 꼽는 것이 빠르다. 지루했던 시간을 한 데 모아 노래 한 곡에 흘려보내는 것이 훨씬 쉽다. 하지만 이름만으로 언제든 다시 떨림을 주는 대상은 그곳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얘기를 꺼내는 데에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나만 아는 곳이 아닌데, 비밀스러운 로맨스도 없었는데. 아마 이 곳에서 마주친 기적 같은 장면들의 힘 때문었을까?


사실 네 모습을 또렷이 본 건 단 하루뿐이었는데.



오백 십육 미터 곱하기 육백 십삼 년



'그런 사랑 따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아'.


한 번은 이 다리의 끝에서 사랑하는 당신과 블타바 강 너머에 있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곧 600년 전 이 다리가 놓이던 날 516m를 단숨에 달려 건너는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잇는다는 것의 거대한 의미가 새삼 등골에 와 스친다. 소름 끼치도록 간절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오늘도 이 다리는 변함없이 땅과 땅, 나와 너, 품과 품 사이에 있다. 무뚝뚝한 검은 다리 위로 수많은 감정들이 흐르고 있다. 카렐교, 이 다리로 프라하는 나뉘고 이어진다.



누군가에겐 당신이 섬이다


이 다리에서 사람들은 건너는 것을 잊는다. 멈추기를 반복한 걸음에 하루가 다 가기도 한다. 이 다리는 어느새 굳고 다져져 피날레 없는 연주가 흐르고 라스트 씬 없는 극이 이어지는 블타바 강의 섬이 되었다. 종일 놀이터가 되고 공연장며 갤러리, 테라스가 되었다. 그 날 나도 그들처럼 건너기를 포기했다. 이 섬에 예정 없이 하루쯤 머물러도 충분히 풍요롭겠다 생각했다. 게다가 이 기회가 오늘뿐이라면 더욱.


SJ157881.jpg
SJ158177.jpg
SJ157876.jpg

그곳에서 나는 사랑이 갓 태어나고 소담스레 영글어 마침내 그 내음 진동하는 장면들과 마주했다. 영화 같은 프러포즈에서 이제 막 태어난 사랑엔 꼭 생명 하나가 태어난 듯한 감격이 있었고, 그 사랑이 맞잡고 감싸 쥔 손에서 늙은 사랑의 주름이 패였다. 당연하게도 사랑도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랑엔 전에 없던 품위가 있었다. 육백 년 간 눌러 담은 이 거대한 돌다리의 멋도 그 향취를 가리기엔 역부족이다.


SJ157746.jpg
P4252107.jpg

그리고 그 사랑은 넘친 것들을 쏟아 내듯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낭만을 나누었다. 손 끝에 올린 것들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같은 표정을 지어 건네니 꼭 하나처럼 보인다. 마치 이 다리에 닿기 위해 이 도시를 건너온 것 같은 사람들의 손바닥 위엔 좋은 것들이 가득했고 더러는 그 끝에서 또 하나의 사랑이 탄생하기도 했다.


SJ157760.jpg

때마침 그 섬을 가득 채운 여러 언어의 속삭임이 그 높낮이며 세기가 묘하게 들어맞아 노래처럼 들렸다. 실룩대며 걷는 움직임이며 고갯짓이 춤을 추는 듯 리드미컬했다. 생각해 보니 속삭임과 노래, 걸음과 춤은 꽤 많이 닮았다. 곧 벅찬 한숨으로 그 합창을 거들고, 종종걸음으로 군무에 화답했다.


나도 그 낭만의 일부가 된 것 같았던, 하나같이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시작에서 시작으로


그 길은 태어나서 가장 천천히 걸은 500미터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끝은 야속하리만치 금세 닿는다. 어쩌면 스스로 다가와 닿는 것도 같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다시 시작이다. 저 멀리 내가 염원한 그 도시가 보인다. 그 속에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그 풍경은 걸음마다 발 끝에 차이고 양 어깨를 스친다.


SJ157728.jpg
SJ157871.jpg
SJ157911.jpg
SJ157712.jpg

죽을 때까지 이런저런 순간들을 후회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내게 이 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새로 시작하기 좋은 곳이었다. 양쪽 어디에서 시작해도 그 길 위에 품위가 있기에, 그것이 재미있어서 끝에서 끝으로, 시작에서 또 시작으로 나는 몇 번을 건너고 또 돌아왔다. 시작점을 완전히 잊을 때까지.



첫 번째 그리고 유일한 관객


떠나던 순간부터 단 둘이 마주할 새벽을 기다렸고 곧 떠날 사람처럼 잠 못 이룬 내 새벽녘 걸음이 다시 이 다리에 닿았다. 잰걸음으로 잠든 골목길을 달려오며 다짐했던 대로 난 이 다리 끝에서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오른쪽 팔꿈치를 난간에 기댔다. 이내 다리는 한참 동안을 반주 없이 부르고 맨발로 추었다. 나는 가만히 음미했다. 이대로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오직 나를 위해 흐르는 낭만을.



하나뿐인 관객을 위한 공연은 너무 짧았다. 밤은 황급히 떠났고 여명으로 도시는 벗어둔 색을 다시 차려입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다시 처음부터 이 작은 프라하를 채우며 하루가 시작되지만 나는 이제야 어제 하루를 끝냈다. '일단 조금 쉬어야겠다'는 혼잣말로 숙소로 향했다. 이 걸음에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이 아침이 너무 야속했던 것 같다.


SJ158079.jpg
SJ158089.jpg


요즘도 나는 종종 그 날의 나와 대화를 한다. 네가 반한 프라하는 어떤 모습이었냐고. 그는 오늘 이 다리 위에서 감격적인 프러포즈에 반해 카메라를 옆구리에 끼워 넣고 박수를 쳤고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삼십 년쯤 반려자와 함께 오고 싶은 곳이 생겼으며 아직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지만 언젠가 따라 부르고픈 노래가 생겼다는 무용담을 장황히 늘어놓는다. 건너고 싶지 않은, 머물고 싶은 다리를 상상해 보았느냐고 되묻는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대답에 웃고 만다.



난간 한 칸 한 칸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건네며 나오는 길, 또 다른 관객이 남긴 발자국을 보며 안도인지 원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다. 그래, 아무래도 나 혼자 갖기엔 이 도시는 너무 매혹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