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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an 13. 2017

도시를 받아 적는 버릇

두 번째, 다시 보지 않을 메모들을 남기는 이유

식당과 찻집에서 수첩을 꺼낸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적는다. 숙소에서 오늘을 새긴다. 책장 사이에 낙엽을 끼우는 것만큼 신나는 일들이다. 하지만 다녀와서 돌아간 후 다시 들춰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저 도시와 수첩을 번갈아 보며 도시를 받아 적는다, 여행의 조각을 끼워 넣는다.


프랑스 남부 소도시, 유독 인적이 드문 골목길 중간쯤의 카페에 들어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손님이라곤 나 하나뿐이지만 ‘쉬익 쉬익’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곧 커피 주인이 들른다는 뜻이겠지. 라바짜 로고가 새겨진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받아 들기 무섭게 비우고 난 후, 카페 내부의 사진을 바쁘게 몇 장 찍었다. ‘자, 이제 남은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다.’ 재킷 주머니 속 수첩과 펜을 꺼내 펼쳐 놓았다. 어느새 습관이 된,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여행의 기술 혹은 철칙. 별 것 아니지만 내가 가진 기술이라면 낯선 도시에서 가능한 한 가방을 들거나 매지 않는 것이다. 내내 마음 한편이 불안했던 겨울 도시 여행에서 되도록 낯선 자 티를 내지 않으려던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얻게 됐다. 어깨를 짓누르고 종종 흘러내리는 가방에서 해방되니 하루가 그만큼 가벼워지고 마음을 사로잡는 찰나에 망설임 없이 달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여행이 반복될수록 짐은 단촐해졌고 사진기도 점점 더 작은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단 하나, 여행 수첩만은 늘 같은 크기와 두께로 작아지는 집 평수에도 꼿꼿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포켓 사이즈의 몰스킨 수첩인데, 다 채우지도 못하면서 매 여행마다 새것으로 구매한다. 다만 색깔은 도시를 떠올리며 어울린다 싶은 것으로 매번 바뀐다. 러시아는 빨간색, 호주는 녹색이었다. 여행 중에는 주로 수첩이 들어갈 만큼 큰 주머니가 있는 재킷이나 코트를 챙겨 입는다. 외투를 입을 수 없는 무더위엔 결국 작은 가방 하나를 들쳐 매는데, 그 날은 종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대곤 한다. 유독 더위를 타는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셈이다. 코트를 두 벌이나 겹쳐 입어야 했던 모스크바에선 두 배나 많아진 주머니 수에 어디에 수첩을 넣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사실 나는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다. 처음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익숙해져야 한다며 눈 앞 풍경에 시들해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걷는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그걸 핑계로 또 몇 시간 걷는다. 가까운 거리는 되도록 걷고, 먼 거리는 서둘러 걷는다. 저녁쯤 되면 통증이 한 번에 몰려오는 고행(苦行) 같은 여행이지만 이게 묘하게 보람 있다. 조금이나마 경비가 절약되기도 하고. 아, 시차 관계없이 밤에 잠도 무척 잘 온다. 그런 내가 식당이며 카페 혹은 숙소에 앉아 한가로이 수첩에 메모 따위나 적는 시간을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으로 꼽는 것은 확실히 역설 혹은 모순 아닐까. 하지만 종종 이 짧은 몇 글자 적기 위해 하루를 여행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건 내가 즐기는 버릇이 됐다. 그래서 유명한 다리의 난간, 너른 광장 한 켠의 낮은 계단, 버스를 떠올리면 늘 그곳에서 무언가 열심히 적는 내 모습이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갤러리 못지않게 근사한 지하철 역사 안에서 더 적을 것이 없을 때까지 끄적이고 나서야 일어났었다. 숙소에서는 주로 초콜릿 푸딩과 맥주를 놓고 그 날의 기분들을 짧게 적는데, 술이 올라서인지 반말과 존댓말, 문어체와 구어체가 섞인다.


2015년, 모스크바로 출발하며


소중한 시간을 채우는 일이니 무척 중요한 것들을 써야지 싶으면서도, 정작 수첩을 채우는 것은 특별함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아침엔 오늘 할 것, 밤엔 오늘 한 것을 간단히 적고 식당에서는 음식에 대한 평가를, 카페에선 현재 날씨와 기분을 짧게 기록해 둔다. 갤러리에서 그림 대신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본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와 빨리 서울에 돌아가 단골 일본 라멘집에서 교자에 나마 비루 한 잔 들이켜고 싶다는 불평도 빠짐없이 담긴다. 더 이상 생각나는 것이 없을 땐 그저 여행이 닷새 남았다, 나흘, 사흘, 이틀 남았다.. 이제 여행이 끝났다며 매일 잉크를 낭비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행에서 돌아와 그 메모들을 다시 열어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배낭을 정리하다 수첩을 발견하면 그저 책장의 이전 수첩들 사이에 수집품처럼 끼워 넣는다. 알록달록 일렬로 놓인 모양이 보기 좋다면서. 그대로 다음 여행을 떠나고, 곧 해가 바뀐다. 그렇게 별 이야기 없는 작은 책들이 내 여행 수만큼 늘었다. 나는 그것들을 내 가장 큰 재산으로 소개한다.


대만 고양이 마을 허우통에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은 희미하고, 그럼에도 앞으로 한동안 다시 열어보지 않을 것이면서도 낯선 도시에서 메모를 적는 데 갈수록 빠져드는 이유는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에 있다. 노천카페나 광장 바닥에 앉아 눈 밖의 풍경 하나하나를 수첩에 옮겨 적다 보면 상당수는 먹지를 댄 듯 이미 가슴에도 새겨져 따로 들춰 볼 필요가 없을 만큼 선명해지고 포토샵으로는 살려낼 수 없는 수식어와 감탄사, 탄식이 아낌없이 가미된다. 사진을 찍는 것과는 또 다른 기록의 방식이다. 그렇게 열중하다 보면 종종 손에 힘이 빠진 듯 삐친 획들이 생기는데, 이른바 도시와 상관없는 내 이야기들이다. 프라하의 아침에는 이 도시를 꿈꾸게 한 친구의 엽서 한 장이 있었고, 광장에서 본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적은 것은 한 때 사랑했던 그녀의 안개 꽃다발 같은 머리칼이다. 12월 홍콩의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며 적은 메모는 글씨며 어투까지 모두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처음 풍경을 눈과 뷰 파인더로 볼 때는 떠올릴 수 없던 것들이지만, 결국엔 그것이 그날 하루 그리고 여행의 제목이 되곤 한다. 알 수 없는 말들을 배경으로 익숙한 글자를 적는 것이 마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와 의사소통에 성공하는 것처럼 통쾌하다거나, 혼자뿐인 여행에 지금 기분과 투정들을 시시콜콜 털어놓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메모는 어찌 보면 여행을 도시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고, 나는 이 실수 혹은 우연을 기다리며 계속 무언가를 적어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적막한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는 내가 낯선 도시들에 들어서고 잠시나마 머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다행히 아직 질리거나 흥미를 잃지 않는 비결을 털어놓게 했다. 그리고 아직 오래지 않은 버릇에 대한 이 이야기 역시 작은 수첩에 빼곡히 담겼다. 남은 하루도 많게는 너댓 번, 나는 이렇게 도시를 읽고, 하나하나 받아 적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들춰 볼 날이 오겠지, 다 털어놓을 때가 있겠지, 라는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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