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 러시아 모스크바.
그것은 낯선 도시가 내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다. 동시에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일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두 번인 겨울.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기대하지 않던 그 기적이 딱 한 번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그곳은 하루의 시작이 유독 늦었다. 열 시가 다 돼서야 밝아진 호텔 창 밖 풍경. 시차 탓에 눈을 뜬 지는 이미 두어 시간쯤 됐지만, 늘 이렇게 가만히 누워 해가 뜨기를 기다리거나 창가에 앉아 전날 먹다 남은 빵과 토마토 따위를 먹는다. 그 날은 길게 뻗은 아침 햇살이 침대 머리맡까지 비집고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나설 채비를 했다. 그림 같은 글자들과 소음 같은 말소리에 조금은 익숙해진, 아니 적어도 겁은 먹지 않게 된 여행 셋째 날이자, 그 해 첫 번째 수요일이었다. 내 키만큼 긴 호텔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는 동안 눈은 벽에 걸린 TV를 향해 있었다. 글자며 소리 하나 알 수 없는 아침 뉴스 말미에 화면을 채운 아라비아 숫자가 반가웠다. 하지만 곧바로 그 숫자는 놀라움이 됐다. ‘- 25 ºC’ 그 날 나는 모양새를 포기하고 서울에서 가져온 코트를 두 벌 겹쳐 입었다.
그 겨울 가장 매서웠던 1월 7일, 러시아에서 나는 그 해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한국의 그레고리력과 다른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였기에 가능했던 행운이다. 모스크비치들은 연말부터 성탄절이 있는 주까지 길게는 보름가량 홀리데이 시즌을 보낸다고 한다. 도시는 이미 12월부터 밤낮으로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란다. 한국에서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보낸 내가 러시아에서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은 것은 어찌 보면 편법인 셈이지만,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 반칙은 아니었다고 하자.
나는 그 날 하루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보냈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에 다름 아닌 그 축제 한복판에 있었으니 지구에서도 손꼽히는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꿈에 그리던 성 바실리 대성당을 만났고, 일 년 중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굼 백화점을 감상했다. 붉은 광장에선 그 이름만큼 붉은 조명 아래 종일 성대한 성탄 파티가 열렸다. 인형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거대한 오르골 같던 회전목마, 케이크 장식을 연상시키는 성탄 트리와 상점들이 광장을 가득 채웠고 그 사이를 산타와 순록 복장의 사람들이 활보했다. 넓은 광장 한복판을 차지한 대형 스케이트장에는 겨울을 잊은 아이들의 날 지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차라리 다른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환상에 취해 나는 밤이 깊을 때까지 몇 번이고 광장 사이를, 주변을 돌았다. ‘이 축제가 끝나기는 할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며.
눈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축제의 감동을 양껏 담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으로 내가 한 것은 광장 한편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 읽는 것이었다. 모서리가 해지고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그래서 제목마저 희미한 소년 시절의 성탄절 일기장이었다. 50 루블짜리 레몬-진저 티 한 모금이 타임머신 역할을 했다. 머리맡에 놓인 선물에 입을 막고 소리를 지르던 아침, 하지만 함께 있던 카드 속 익숙한 글씨 때문에 세상에 산타는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린 일곱 살 성탄절 일기가 그 시작이었다. ‘새벽송’이란 제목이 붙은 장엔 몇 장 너머엔 새벽까지 친구들과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를 걸었던 사춘기 시절 이야기가 있었다. 첫사랑과 함께 보낸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엔 거짓말처럼 눈이 내렸다. 새벽 네 시 신촌역 앞 놀이터가 배경으로 그만이었다. 그 후로 일기는 조금씩 뜸해졌고 가까운 것일수록 오히려 더 희미했다. 명동 골목 가득한 인파 속에서 옴짝달싹 못한 답답한 토요일 오후, 야근 후 동네 작은 맥주집에서 혼자 보낸 텅 빈 12월 24일 밤 같은 단편들이 남은 것의 전부였다. 언제부턴가 크리스마스는 내게 외면하고 싶은 날이 되어 있었다.
그 새 차갑게 식은 레몬-진저 티를 한 모금 더 머금고 마지막으로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축제의 광장, 붉은 조명 아래에는 나만의 산타를 기다리는 소년과 소녀가 해맑게 미소를 지었고, 겨울을 잊은 청춘들이 뜀박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광장 한복판에는 뜨거운 숨을 나누는 연인이, 성 바실리 대성당 앞에는 함께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이방인으로만 보였던 이들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빌려 ‘마치 동화 속 장면을 빌려온 듯한’ 광장을 배경으로 만든 기적이었다. 그날 밤 모스크바 골든 링 호텔의 내 공간에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말린 토마토와 빵 그리고 적당한 가격의 와인이 탁자를 채우고 창 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흥을 돋웠다. 나는 TV 속 가수의 입을 떠듬떠듬 따라 움직이며 축제를 노래했다. 내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였다.
1월 7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광장에는 그 날처럼 축제가 열릴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적을 만들 것이다. 두 해가 지나 그 날의 사진을 꺼내 보며, 어쩌면 이 여행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준비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두 번째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그것이 낯선 도시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