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대상 없는 그리움에 대해
아마 내가 이 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마지막 장을 맺을 즈음이면 완전히 잊힐 당신의 흔적을 어디라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긴,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그 계절을, 풍성한 머리칼을 잊을 리가 있겠냐만은.
"난 네가 Sure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좋아.”
내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내뱉은 기도 비슷한 혼잣말에 당신이 '물론'이라고 답하자 속마음을 들킨 듯 놀란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어. 매서운 밤공기에 볼이 빨갛게 얼어있던 것이 다행이었지. 당신을 태운 택시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내가 했던 말은 잠들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아침이 밝자마자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어. 그 목소리와 억양이 자꾸만 듣고 싶어 진다면서. 모든 것이 낯선 도시에서 얻은 첫 번째 그리움이었어.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나와 맞닿아있던 시간은 늦은 아침 햇살에 잠시 눈 찡긋할 정도의 찰나였지만, 그 잔향이 사라졌을 때 시간은 어느새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고. 나는 그렇게 그 짧은 연을 돌아보곤 해. 때때로 조금 가까웠던 적도 있었겠지만 늘 육천 칠백 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펼쳐졌던 두 세상, 그 사실이 눈 앞의 당신을 종종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존재로 보이게 했어. 내 큰 두 손으로도 다 움켜쥘 수 없을 만큼 풍성한 고동색 머리칼 역시 내겐 현실보단 환상에 가까웠달까. 당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꼭 만개한 안개꽃 다발 같아 좋았어. 그 꽃 뭉치가 걸음에, 바람에 살랑일 때면 잠시나마 겨울을 완전히 잊곤 했으니까. 함께 있는 동안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것이, 내가 말을 하고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
그 날 이후 한동안 당신이 내게 ‘물론’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었지만, 매일 저녁 시간을 비워둔 것으로 답은 충분했어. 우리는 여섯 시에 만나 아홉 시, 길게는 열 시까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어. 근사한 러시아 전통 음식점에 간 적은 없지만 평범한 베이커리와 이탈리안 식당 혹은 한식당에서 다분히 일상의 시간을 보낸 것이 돌이켜보니 다행이었던 것 같아. 낯선 음식에 대한 소개나 감상보다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그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지만, 색깔과 향, 차와 음식, 그림 그리고 음악의 제목으로 닿아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했어. 그 겨울 가장 추웠다던 수요일엔 둘만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지. 함께 샤데이의 노래를 듣고, 말린 토마토와 함께 와인을 마셨어. 창밖의 야경 대신 창에 비친 당신의 표정을 바라본, 그런 밤이었어. 그때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큰 건축물이었던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선,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방에 온 손님을 대하듯 캠퍼스 구석구석을 소개한 당신을 기억해. 발아래와 휴대폰 속 사진을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키며 연신 환호성을 질렀고, 교정이 가장 근사하게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을 땐 발을 동동 굴렀던 것도. 당신은 오늘이 여름이 아닌 것을 무척 아쉬워했어.
"태양 없는 계절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야.”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어. 그저 그 작은 손으로 머리칼을 모두 움켜쥘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어. 하루 사분의 삼이 밤이었던 겨울 도시에서 늘 날씨를 원망했던 나는 어느새 모스크바 강변 스카이라인에 손가락을 뻗어 늑장 부리는 해를 끌어내리려 했어. 그리움이 하루를 빛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 같아.
이틀 만에 전화를 건 내게 ‘물론’이라 답한 것은 여행이 끝나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겠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준 할머니와 자주 왔던 곳, 당신은 작은 카페를 그렇게 소개한 뒤 그녀와 함께했던 열여섯 번의 봄 이야기를 늘어놓았어. 아홉 살 아이의 해맑은 웃음과 열다섯 소녀의 수줍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고, 나는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였어. 사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그것이 마지막임을 아는 것이 때론 제법 큰 축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름 모를 연주곡의 페이드 아웃에 맞춰 이야기가 서서히 흩어진 후, 당신이 말했지. “여행을 떠나고 싶어.” 다음 곡이 시작되기까지 마치 이 도시의 겨울처럼 긴 적막이 흐르고, 나는 어디냐는 물음 대신 그저 함께하겠노라 답했어. 당신은 차를 세네 모금 연거푸 마신 후 싱긋 웃었어. 마지막 장면이었어.
“다른 세상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가 가장 먼저 다짐한 건 무엇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었어. 다시 내 세상을 사는 동안 종종 마음속에 묵직한 감정이 좌, 우로 데구루루 구르며 나를 휘청이게 했지만 그것이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어. 그렇게 텅 빈 그리움이라는 병을 얻었고 낯선 세상을 탐하는 버릇이 생겼어. 계절은 약속한 대로 흘렀고, 금방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이 됐어.
대부분의 시간을 까맣게 잊고 지냈지만,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 목소리가 이따금 떠오른 적이 있어. 아니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때가. 타이베이로 향하는 중화항공 비행기에서 잠시 펜을 빌릴 수 있겠냐며 손을 내민 노부인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지난 세 번의 계절은 무용지물이 됐어. 비행기가 송산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뜨개질을 하던 그녀의 옆얼굴을 몇 번이고 돌아본 건 내가 한 때 그토록 그리던 시간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야. 그 후로도 나는 봄의 광장과 여름의 해변, 가을의 도시에서 종종 안개꽃 다발을 닮은 뒷모습을 발견했어. 족히 여행의 수만큼 반복됐지만 다행히 한 번도 그 풍경 속으로 다가가거나 말을 거는 일은 없었어. 그저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둘러보며 가슴 내려앉는 한숨을 내쉴 뿐. 당신이 말했던 세상이 혹시 이곳이었을까 싶어서. 어느새 나도 그 세상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그리워하고 있었나 봐.
사람들이 종종 내게 물어. 왜 떠나냐고, 떠나려 하느냐고. 그럴 때면 나는 내가 가진 다양한 그리움에 대한 동문서답을 늘어놓곤 해. 계절과 도시, 저녁 약속, 비행기 속 소음, 나도 모르게 내뱉는 말과 몹시도 좋아했던 억양이 나를 가만히 서 있지 못하게 했다고. 이제 세상에 없는, 어쩌면 애초부터 없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내 여행의 이유라고. 모든 것이 낯선 세상을 찾아, 어쩌면 그동안 너를 몹시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이 대상 없는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미 너무 많이 지난 이야기, 계절은 잊히고 우리의 세상은 소멸됐지만
혹시나 기적이 일어나 그때로 돌아간다면 하나만 더 묻고 싶어.
당신은 무엇이 그리도 그리워서 여행을 기다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