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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Aug 18. 2017

도시와 나 사이의 시차

모스크바, 러시아 - 평소와 다르게 흘렀던 시간

 빠르다 못해 속절없는 시간이 흐른다. 잠시 소란스레 머물다 떠나는 사람뿐인 공간은 주인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남기거나 떨어뜨린 흔적들이 패인 벽과 기둥 틈에 배여 악취를 풍기고, 바닥엔 떨어져 나간 조각들이 어지럽게 뒹군다. 들고 나는 것이 이리도 의미 없을까 싶다. 하지만 훗날 돌아보았을 때 나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모두가 아름다웠다고. 그 공간은 내가 생각하는 생과 무척이나 닮은 곳이었다.


 흑백 화면에 파란색 백라이트뿐인 구닥다리 아이팟에서는 역시나 철 지난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이제 한 번 충전으로 겨우 두어 시간밖에 음악을 들을 수 없는 터라 이 시간을 위해 종일 품고만 있었다. 스마트폰에 그보다 많은 노래들이 있지만 왠지 음악은 이걸로 들어야 제 맛이 난다며 매일 같이 챙기는 내게 친구는 과연 너 다운 고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왼쪽부터 절반쯤 까맣게 멍이 들어 제목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화면 아래 동그란 휠을 오른쪽으로 문지르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듯 소리가 커졌다. 반대편 플랫폼으로 낡은 녹색 열차가 들어오며 ‘끼긱, 끼긱’하고 내는 날카로운 음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느긋한 트램을 타고서 달리면 

옆 자리의 꼬마 아이도

좁은 골목길의 모습도 꼭 그림 같아


- 시차, 에피톤 프로젝트


 그날도 나는 모스크바 스몰렌스카야(Смоленская) 역의 승강장 중간쯤에 있는 석재 벤치에 앉아 있었다. 녹색 울 코트가 흠뻑 젖을 만큼 폭설을 맞은 날이라 역 근처 폴 베이커리에서 홍차와 마카롱으로 몸을 녹일까도 생각했지만, 초콜릿 케이크를 포장해 곧장 호텔로 갈 모습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혼자 있기엔 너무 크고 쓸쓸한 호텔 룸보단 차라리 좀 소란스러워도 그 속에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이 공간을 선택했다. 운 좋게 어제와 같은 자리가 비어 있기도 했다. 딱딱한 대리석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반대편 승강장을 바라보는 동안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내 앞을 쉴 새 없이 스쳐 지났다. 꽤나 지친 하루였는지 머릿속엔 과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다운 풍경이다, 라는 생각뿐이었다.


 글쎄, 오늘도 아마 음악이 멈출 때까지 있다가 돌아가겠지?

 이상하게 편한 곳이야, 이 퀴퀴한 냄새만 빼면 말이지.


 1935년 소콜니체스카야 선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80년이다. 아버지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의 연세를 가늠해보니 대략 그 정도의 세월인 것 같다. 하루 700만 명에 이르는 이용객 수,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 양식의 역사(驛舍)에 대한 이야기로 모스크바 지하철 미뜨로(Метро)는 여행 전부터 나를 들뜨게 했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훑어본 러시아 관련 책의 저자는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미뜨로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도 살아 숨 쉬는 모스크바의 예술’

 그도 그럴 것이 단돈 40 루블에 입장 가능한 이 거대한 지하 세상은 마치 각 전시실이 열차로 연결된 거대한 미술관을 연상시킬 만큼 호화로웠다. 구소련 시대 스탈린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리석과 샹들리에 그리고 조각상으로 한껏 치장한 역사 내부는 그저 붉은 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과 노보데비치 수도원(Новодевичий монастырь), 트레티야코프 미술관(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Третьяковская Галерея) 사이를 잇는 정거장으로 이야기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르바트 거리를 채운 한파를 피해 처음 아르바트스카야(Арбатская) 역에 들어섰을 때, 승강장 안에 고인 한 줌 남짓의 훈훈함에 감격하고 뒤이어 스몰렌스카야 역에 도착해 그 고풍스러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사실이다. 이후 파르크 쿨투리(Парк Культуры) 역과 폴랸카(Полянка), 키옙스카야(Ки́евская) 그리고 파르티잔스카야(Партизанская)역으로 하루하루 그 반경이 넓어지면서 미뜨로 역 안을 둘러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됐다. 하지만 그것이 매일 습관처럼 지하 역사의 승강장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종이나 모니터 속 이야기와 달리 그 공간은 마냥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깊은 지하에 만들어진 역사 내부에는 대부분 퀴퀴한 냄새가 났고, 화려한 장식들도 세월의 흔적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하긴, 80여 년 전부터 달린 이 지하철이 멈춘 날은 2차 세계 대전 중 폭파 준비 지시가 내렸던 단 하루뿐이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소음에 한번, 활짝 열린 창문에 또 한 번 놀란다. 옆 사람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소음이야 그렇다 쳐도 동굴에 사는 쥐라도 창문 안으로 굴러 떨어지면 어쩌나 싶다. 에스컬레이터는 또 어찌나 긴지, 오르내리는 데 노래 한 곡을 모두 들어도 부족한 역이 있을 정도였다. 그럴 때면 마치 지상과 지하의 다른 세상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지루함을 잊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들은 이 계단이 좀 더 길게 이어지길 바라겠지만.


 사실 내가 흠뻑 빠진 모스크바 지하철역의 진짜 매력은 그 멋진 공간을 배경으로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시간에 있었다. 역 안은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으로 늘 북적였고, 들고 나기를 숨 가쁘게 반복하는 낡은 열차는 또 다른 사람들을 쏟아내고 훔치기를 반복했다. 더러는 일 분이 채 되기도 전에 다음 열차가 오는데도, 그마저도 놓칠까 전력질주를 하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그 혼재(混在)가 내가 훑기 벅찰 정도여서, 이 지하 세상은 마치 1.2배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승강장 한쪽에 앉아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에 서린, 서로 다른 시간들을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어제는 엄마 손을 놓고 환승 계단 쪽으로 총총걸음을 걷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시절 내 짧은 여행을 떠올렸다. 겨우 일곱 살이나 됐었나, 이모에게 전해주라며 엄마가 챙겨준 분홍색 보자기를 꼭 안고 26-1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내게 창 너머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다른 세상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내 세상은 고작 수유에서 동대문 운동장까지였으니까. 고속터미널 상가에 있는 이모에게 보자기 꾸러미를 건네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이제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부르기로 다짐했었다. 요즘도 가끔 성수대교를 건너 서울숲을 지나칠 때 그 날이 생각나 웃곤 한다. 그것이 아마도 내 첫 번째 여행이었던 것 같다고.

 오늘은 건너편 승강장, 몸을 기울여 마주 보는 방향으로 앉은 연인의 실루엣에선 내 가장 애틋한 하루로 잠시 돌아갔다. 내 스무 번째 여름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녀는 저녁 일곱 시에 헤어지면 일곱 시 삼십 분부터 그립다는 말을 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보고 싶단 말 한마디에 지하철 역을 한걸음으로, 아홉 정거장을 가쁜 숨으로 달려 충무로 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착한 그녀의 미소는 내가 처음 맞는 또 다른 계절이었다. 막차가 올 때까지 나눈 대화는 이제 하나도 떠올릴 수 없지만, 승강장 벽면의 석재 의자가 스몰렌스카야 역의 대리석 의자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가히 또 다른 종류의 시간 여행이라 할 만큼 가슴 벅찬 경험이 매일 나를 그곳에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시간 짜리 구닥다리 아이팟은 그 시작과 끝을 알리는 모래시계 같은 존재였다. 하루는 열다섯, 또 하루는 스물두 살을 살고 어떤 날엔 불과 몇 달 전의 응어리를 다시 질겅질겅 씹으며 보내다 숙소로 돌아가면 고작 여섯 시간인 서울과 나 사이의 시차가 길게는 수십 년처럼 느껴진 날도 허다했다.


 아무래도 내 시계는 고장 난 것 같아.


 특별히 그 대상은 없었지만 한동안 내 불평은 끊일 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보다 늘 조금씩 느리고 가끔씩 한참 동안 멈춰있는 것이 도무지 제멋대로라 내가 이렇게 뭐든 더디고 뒤쳐지는 것 같다고. 이십 대엔 동기들보다 늦은 취업의 변명을, 서른이 넘어선 좀처럼 보이지 않는 성과와 아직 남 이야기 같은 결혼의 핑계를 그렇게 댔다.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말도 대답도 늦은 것도 모두 그 시계를 처음 내게 채워준 그 누군가를 탓했다. 지나고 나니 그땐 내게 그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매년 나이를 먹고 익어가는데 내 시간은 그러지 못하다고 자책하던 날 있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떠난 스물넷의 어느 날에 하릴없이 머무르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눈물 훔친 날 뒤늦게 스물일곱이 된 초겨울의 어느 날처럼. 그렇게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 어느새 세상의 시간에 비해 제법 뒤쳐졌다고 느꼈을 때,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은 내게만 다르게 흐르는 줄 알았던 시간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첫 공간이었다. 다른 간격, 더러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늘이지만 고장 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많은 도시를 다녔지만 그 어디에도 그만큼 극적인 공간은 내게 없었다.



지금쯤 그대가 몇 시를 살던지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

누구라도 다른 거니까, 큰 걱정 말고.


 - 시차, 에피톤 프로젝트


 이촌역을 출발한 4호선 열차가 동굴을 빠져나오니 내부가 순간 환해졌다. 이윽고 열차가 동작대교에 들어서자 창문과 의자, 손잡이가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이는 늦여름 노을이 꼭 그림인 것만 같다. 곁눈질을 하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 어찌할 줄 모를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분명 그 도시에서처럼 덜컥 이번 역에 내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결국 나는 저녁 약속을 조금 미루고 이 시간을 좀 더 붙잡아 두기로 했다. 언젠가 2017년 여름날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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