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요일 Aug 11. 2017

오후 네 시,
카르타헤나에서 춤을.

카르타헤나, 스페인 - 생의 치열함에 관하여

 그 날 작은 항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치 이 한 곡을 위해 태어났다는 듯 행복해 보였고, 그들로 인해 항구 앞 작은 광장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무대가 됐지. 하루를, 여행을 그리고 내 삶을 바꾼 그 장면을 만난 건 떠나왔기에 허락된 일종의 특권이 아니었을까.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으세요?


 포털 사이트에 제 이름을 검색하니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열일곱 명이나 있더라고요. 그중엔 매일같이 TV에서 볼 수 있는 유명 연예인, 성공한 사업가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같은 이름의 친구와 한 반이 된 적도 있었어요. 다행히 성이 달라 선생님이 덜 고생하셨지만. 이만큼 흔한 이름을 갖고 있는 저도 가끔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해요. 잃어버렸던 형제 혹은 도플갱어를 만난 것 같은, 뭐 그런 대단한 기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지 이름 석 자 같은 것만으로도 그와 나 사이에 아주 가는 실 하나 정도는 늘어져 있는 느낌이랄까요. 일단 상대를 부를 때부터 꼭 저를 부르는 것 같아 이상해지잖아요. “안녕하세요, 성주 씨.”

 동명이인과 함께하는 동안 저는 주로 상대의 눈치를 보거나 이리저리 살피고 머리를 굴려 이름 외의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해요. 식성이나 음악 취향, 혈액형 또는 별자리까지. 그게 아니면 사용하는 휴대폰 기종이라도 살펴보곤 하죠. 재미있는 것은 건너편에 앉은 그도 같은 수고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요. 어쨌든 그들과는 어렵지 않게 가까워지곤 하니 이것 역시 인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Puerto Cartagena, Spain

 지중해와 북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꼭 같은 이름의 도시가 한 쌍 있어요. 항구 도시라는 것 역시 두 도시의 공통점이죠. 콜롬비아 북부의 카르타헤나Cartagena는 새하얀 백사장 플라야블랑카(Playablanca)로 유명한, 남미 최고의 휴양지 중 한 곳입니다. 저는 우연히 읽은 여행 관련 칼럼을 통해 이 도시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요. 작가는 이 도시를 ‘카리브해의 보석’이라는 수식어로 표현했답니다. 아아,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요?

 반면에 지중해와 맞닿은 스페인의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Cartagena는 아직 많은 이들에게 미지에 가까운 곳이에요. 하지만 인구 21만의 이 작은 도시가 실은 카르타헤나라는 이름의 주인입니다.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고요. 허나 지금은 ‘카리브해의 보석’이 훨씬 더 유명해졌으니 재미있죠?


 스페인 카르타헤나는 20여 곳의 그림 같은 해변에서 일 년 내내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평화로운 지중해 연안 도시지만, 사실 기원전 230년 카르타고 시대부터 시작해 로마, 서고트, 아랍 그리고 스페인까지 수차례 주인이 바뀐 기구한 운명을 겪은 땅이었어요. 과거 이베리아 반도의 거점으로 번성했던 시절의 흔적인, 로마 콜로세움을 쏙 빼닮은 모양새의 로마 극장(Roman Theatre),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볼 수 있는 스페인 내전 박물관(Civil War museum)을 둘러보면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죠. 물론 카르타헤나행 배에 오르며 제가 한 것이라곤 시베리아 대륙의 어디쯤 혹은 남반구의 작은 섬 중 하나에 서울 혹은 쎄울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전부였지만 말이에요.


 쓸데없는 말이 길었죠?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바로 그곳, 카르타헤나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Cartagena, Spain

 배가 카르타헤나 항에 도착한 건 일요일 아침이었어요. 따가운 오월 햇살을 창 밖으로 뻗은 손바닥으로 확인한 터라 얇은 셔츠 한 장 차림으로 항구를 나섰습니다. 모처럼 잠을 푹 잔 덕에 기분이 상쾌했어요. 항구를 벗어나자 이내 이 도시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시청 건물과 작은 광장이 나타날 정도로 바다와 서로 맞닿아있는 것도, 건물들이 높지 않아서 제법 멀리 달아났다 싶었는데도 돌아보면 항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만큼. 묘한 설렘에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걸었답니다. 한 눈에도 이 도시의 랜드마크임을 알 수 있는 시 의회 건물 앞에 닿았을 때, 변덕스러운 해안가 날씨가 그제야 마지못한 듯 쪽빛 속살을 내보이며 환영 인사를 대신했어요. 그 모습이 제 끝없는 구애 끝에 한쪽 어깨 옷자락을 살짝 내려준 것처럼 야릇하게 보였달까요, 한동안 광장 입구 어귀에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얇은 포플린 셔츠 깃이 지중해 봄바람을 맞아 쉴 새 없이 바스락거렸고, 잠시 후 햇살에 시큰해진 눈을 감으며 생각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처음 봄이라는 이름이 지어지던 날도 하늘이, 바람과 공기가 아마 이랬을 것이라고.


Calle Mayor, Cartagena

 붉게 상기된 봄 날씨 아래 도시 곳곳에는 축제가 한창이었어요.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나는 뜨내기에게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언제까지인지도 알 수 없는, 그래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축제가. 넓고 좁은 골목들은 춤과 노래로 서로 이어졌고 낡고 군데군데가 떨어져 나간, 더러는 반쯤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들 사이로 고기 굽는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죠. 그 자욱한 배일 뒤의 장면들로 저는 그날 오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번화가인 칼레 시장(Calle Mayor)을 따라 걷던 길은 가게 밖으로 삐져나온 테이블, 술통으로 만든 간이 바Bar에 앉거나 기댄 사람들로 가득해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어요. 술 향은 또 어찌나 아찔했던지, 하마터면 다음 목적지를 포기하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뻔했다니까요.


 화려한 색의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를 한껏 돋웠습니다. 그중 여인 그리고 여자 아이들이 입은 드레스가 단연 눈에 띄었는데, 허리를 잘록하게 조이고 골반부터 무릎 위까지 타이트하게 감싼, 흡사 인어 같은 실루엣이 대단히 여성스러웠어요. 반대로 어깨에는 풍성한 프릴 장식을 달아 한껏 멋을 냈는데, 작은 움직임에도 찰랑이는 프릴 장식 덕에 그저 걷고 달리기만 해도 제법 그럴듯한 춤이 되더군요. 생각만 해도 어깨가 들썩여지지 않아요? 이곳의 축제 그리고 사람들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드레스였습니다.


 그렇게 색과 소리, 향기에 이끌린 걸음이 산 프란치스코 광장(Plaza de San Francisco)에 닿았습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노파의 주름처럼 잘게 갈라진 어머어마한 크기의 후박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자태를 보아하니 수백 살은 너끈히 돼 보였어요.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두 시, 저는 7 유로짜리 고기 파이와 탄산음료를 들고 커다란 스피커들 사이에 놓인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자리를 잡았어요. 후박나무 앞에 세워진 간이 무대 위에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꼬마 숙녀 무리의 공연이 한창이었답니다. 깡충깡충 뛰는 아이들의 걸음에 맞춰 제가 박수를 치고, 후박나무 잎이 흔들리며 햇살이 반짝임과 숨기를 반복하는 동안 저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지중해 봄바람을 맞으며 낮잠에 취해 있었어요. 이틀 전, 바르셀로나의 타파스 레스토랑에서 만난 노인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배에 돌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중해의 태양을 믿지 말게그랬다간 저녁 약속 시간을 놓치기 일쑤니까.”



Palacio Consistorial de Cartagena

 그 만남을 여행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카르타헤나에 머문 시간은 고작해야 한나절 남짓, 지중해의 오월 해가 한창인 시간에 저는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배로 돌아가야 했으니까요. 낮잠이 덜 깨 길을 잃었던지,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산 프란치스코 광장에서 나와 한동안 항구 반대 방향으로 더 걸었어요. 그냥 좀 더 머물고 싶었나 봐요, 이 축제 속에. 하지만 얼마 후 스페인 광장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어요. 어느새 음악 소리도, 사람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거든요. 이러다 정말 저녁 약속 시간을 놓칠 것만 같았어요.


 스마트폰 화면 속 지도를 보며 항구 방향으로 재촉하던 걸음이 조금 잦아든 건 저 멀리 시 의회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부터에요. 이 광장은 항구와 바로 맞닿아 있으니까. ‘이제 다 왔다, 다행히 저녁 약속에 늦지 않았구나.’

 늦은 오후의 시청 광장은 아침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어요. 광장의 삼사 분의 일쯤을 차지한 노천카페의 테이블은 파라솔 아래서 따가운 봄햇살을 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어디쯤 세워 놓았는지 모를 스피커에서 경쾌한 타악기 리듬이 흘러나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어요. 맞아요, 흡사 공연 시작 전의 설렘.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항구 앞 작은 광장은 지구에서 손꼽히는 야외무대가 됐죠.


Plaza Ayuntamiento, Cartagena

 관능적인 실루엣의 드레스에 머리에 꽃 장식을 단 부인들의 춤이 시작됐어요. 처음엔 그녀들끼리 손을 맞잡고 박자를 타는 듯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긋한 노신사들이 그녀들의 손에 이끌려 나왔죠. 서너 쌍의 커플은 몇 차례 숨을 고르더니 이내 우아한 몸짓으로 노천카페의 테이블 사이를 구석구석 휘저었어요. 아주 능숙한 춤사위였죠. 관객석에서는 박수와 환호가 흘러나왔어요. 그 순간 제가 시 의회 건물, 그러니까 칼레 시장 쪽 골목 입구에 서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몰라요. 그 황홀한 장면을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있었으니까. 의심의 여지없이 그 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한 신사와 부인의 맞잡은 손이 리듬에 맞춰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곧 저와 닿을 만큼 가까워졌어요. 다행히 신사가 부드럽게 방향을 틀어 두 사람은 곧 제 프레임 안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제 카메라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은 순간 제가 느꼈던 감정을 기억해요. 사진에 비친 감정은 어쩌면 오후의 행복 정도였겠지만, 뷰 파인더를 통해 내가 본 것은 그 너머의 치열함이었어요. 행복을 향한 치열함.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잊지 못할 한 곡 춤을 위한 것인지도 몰라.’


 저는 늘 적당히 사는 사람이었어요. 


 열 살 때였던가, ‘이제 반장 그만하고 평범한 말썽꾸러기가 되고 싶다.’는 독백을 했을 정도니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매일 떠드는 사람 이름을 칠판 오른쪽 모서리에 적어야 하는 것이 그땐 너무 싫었거든요. 그 소원을 용케 신이 들으셨던지 중학교에 진학한 후로 저는 반장은커녕 남 앞에 서는 것도 두려운 유난스러운 사춘기를 맞았어요. 성적 역시 반에서 중간쯤에 머물렀고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이 평범한 학창 시절이 계속됐어요. 점수에 맞춰 적당한 대학, 과로 진학했고 밀린 레포트를 베끼고 벼락치기로 시험을 준비하며 캠퍼스 생활을 했어요. 졸업 후에는 또래의 청춘처럼 제법 오랜 기간 집에서 부모님의 한숨 소리를 외면하는 백수 생활을 했고, 그러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회사의 면접에 응시해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저는 그저 욕먹지 않을 정도로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특별히 잘하고 싶은 욕심도, 그렇다고 뒤쳐질 생각도 없는. 애초부터 저는 적당히 사는 사람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들을 보며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한다.’는 문장을 떠올렸을 때, 무언가 어색한 표현처럼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에요. ‘치열하게’ 또는 ‘최선을 다해’라는 말은 제게 생각만으로 어딘가 호흡이 곤란해지는 말이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그런 말들은 늘 권유보다 강요에 가까웠고, 대상은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내게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고, 회사일 내 일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에게도 최선을 다해 행복해 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저 역시 행복을 열렬히 열망하지 않은 사람이었고요. 카르타헤나행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을 피해 잠시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손짓과 표정, 함께 있는 그 공간 그리고 날씨가 일러줬어요. 제가 비행기와 배를 갈아타고 이 항구 도시에 닿아 환호하고 손뼉 칠 수 있는 것은, 이 한 곡 춤을 열망한 그들 못지않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기 있는 모두 뜨겁게 행복을 꿈꿨고, 그 보답으로 이 오후를 선물 받은 것이라고. 이후 몇 곡의 노래, 그리고 춤이 이어지는 동안 저는 사진 찍는 것을 멈추고 야외무대의 관객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 환호했습니다. 그렇게 크게 목소리를 내서 환호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Plaza Ayuntamiento, Cartagena

 


 이메일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졌다.

 대학원에 재학 중인 그는 잡지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나를 알게 됐고, 삶의 갈림길 앞에서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했을 때, ‘여행’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서. 그는 여행을 하는 것 못지않게 다른 이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분명 그 시기의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살고 있는 그에게 늦은 답장을 적으며 나는 오랜만에 다시 그 항구를, 광장과 골목을 떠올렸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어요?”


“저도 열심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쉽게 길이 보이지 않네요.”

“하지만 이 길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제게 메일을 보낸 귀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르타헤나,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반나절 남짓이었지만 나는 그 날의 장면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행복해 보지 않겠냐는 문장을 복기하며 다시 힘을 얻는다. 지칠 때 마음으로나마 달려가 춤 한 곡 출 곳이 있다는 것, 이 정도면 그런대로 치열하고 또 행복한 생 아닐까.




 내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아니면 아직 보잘것없는 여행자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그는 다시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답장이 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대의 그 뜨거운 고민이 내게 더 큰 힘이 되었다고, 고맙다고. 그가 지금쯤 꿈을 이뤄 어디선가 치열하게 사랑하고 있길 바란다. 그 대상이 낯선 도시든 아니면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이든 간에.

Calle Mayor, Cartagena


이전 03화 버킷리스트와 여행 호르몬의 상관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