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Praha), 체코 - 그 시절 내게 꼭 필요했던 위로
“그거 알아? 오직 널 만나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어”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도, 그럴싸한 잔소리를 내게 건네는 것도 참았어. 언젠가 이 순간을 떠올릴 때,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이나 덜 여문 나의 감정 같은 것이 찌끼처럼 가라앉아 있을까 봐. 그저 아낌없이 감격하기로 했지, 마침내 이 여행을 이뤄낸 것을.
열여덟과 열아홉 사이의 겨울 방학,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고 삼이 됐음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학인데도 늦잠을 잘 수 없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매일 늦은 오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생활이 소년에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주말에도 이런저런 특강에 끌려야 했으니까. 소년은 난생처음 인생이 실은 고달픈 것이며, 하기 싫은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렇게 하릴없는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 빌라 입구 우편함에서 발견한 엽서 한 장은 소년에게 모처럼 일어난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익숙한 이름과 글씨가 몇 주 전, 지휘자이신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떠난 친구의 것임을 소년은 금방 알아보았다. 이 얇은 엽서 한 장이 바다를 몇 개나 건너 서울에 있는 우리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다니, 유럽이 나라 혹은 도시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소년에게는 그야말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교회 중등부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그녀는 소년에게 곧 사춘기였다. 무엇이 그리 잘 통했는지 둘은 금방 가까워졌고 이내 서로를 ‘베스트 프렌드’로 부르는 사이가 됐다. 이 년쯤 지나자, 그 호칭은 ‘스페셜 프렌드’로 바뀌었다. 사실 그녀는 아직 사랑을 모르던 소년의 첫 연정戀情이었다. 특별한 친구라는 호칭은 당시 얼굴 가득 돋아난 여드름만큼 수줍음 많던 소년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애정 표현이었다.
소년은 그녀를 통해 청춘을 배웠다. 삐삐 음성 사서함 속 목소리를 통해 설렘이란 감정을 발견했고, 넘치는 말들을 사십 글자로 제한된 PCS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 안에 눌러 담으며 작문 실력을 키웠다. 가끔 손글씨로 적은 쪽지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네기도 했는데, 주머니에 쪽지가 있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 몰래 슬쩍 던져놓고 올 계획을 짜느라 예배는 늘 뒷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년은 그녀에게 끝까지 가장 좋거나 혹은 특별한 ‘친구’에 머물렀고, 열아홉 되던 해 그녀가 그보다 한 살 많은 교회 선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친구로 남는 것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엽서가 도착했던 시기는 소년이 일기장에 그녀 이름을 오늘 날씨처럼 꼬박꼬박 적던 때였다.
빌라 입구에 선 채로 소년은 엽서 속 글자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왼쪽면을 빼곡히 채운 문장들은 서울과 다른 그곳의 시간과 날씨, 그녀의 다음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날 소년은 이전까지 믿지 않았던 시차라는 것이 실제로 있음을, 심지어 지구 어딘가에는 춥지 않은 겨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치 다른 세상의 것만 같던 이야기에 한껏 커진 눈이 이윽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을 때, 소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 보고 싶어도 울지 마.”
소년은 종일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엔 문장째로 되새기더니 나중에는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고, 마침내는 획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따라 그리기에 이르렀다. 소년에게는 그 엽서에 담긴 모든 것이 특별했다. 뒷 장에 인쇄된 사진 속 풍경까지도. 그날 밤, 소년은 일기장에 엽서가 출발한 도시의 이름을 적었다.
프라하, 체코.
꿈이 시작된 날이었다.
열네 번의 겨울이 지났다. 약속처럼 겨울 후에는 봄이 왔지만 그해 사월은 조금 달랐다. 계절이 그 정점을 향해 치닫던 순간 나는 페트린Petřín 언덕 위에서 아직 실루엣뿐인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 시간의 비행 후 맞는 첫 번째 아침, 한국과의 시차를 생각하면 24시간을 꼬박 뜬눈으로 보냈지만 창으로 스며든 한 줌 빛에 주저 없이 옷가지를 챙겨 호텔을 나선 덕분이다. 호텔 입구 어귀에 세워진 멋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제 빛을 반쯤 펼친 라일락 향에 이끌려 이 언덕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분명 이 순간을 오랫동안 두고두고 떠올릴 것이라고. 상쾌한 새벽 공기가, 발끝으로 땅을 누를 때마다 조금씩 붉어지는 여명이 숨을 차게 하더니 기어코 반쯤 뛰듯 걷게 만들었다. 탁, 타닥, 탁. 발자국 하나하나가 마음에 찍혔다.
프라하에서 맞은 첫 번째 아침, 두 시간 삼십 분 가량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봄의 기적이었다. 마치 나를 위한 특별석처럼 텅 비어있던 언덕 위에 서서, 조금씩 밝아지는 도시의 풍경을 보며 내가 느낀 기분을 후에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잠에서 깨서 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어’.
베일이 걷힌 후 붉은 여명에 물든 환한 도시가 이전까지 내 세상에 있던 어떤 장면보다 아름다웠던 탓에, 나는 끊임없이 내 상상력의 한계를 탓하며 그 변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해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이 솟은 성보다 높이 오르고, 도시를 물들였던 붉은빛을 모두 거둔 여덟 시 무렵까지 나는 내내 무언가에 제압당해 있었다. 툭하면 누군가 그리워하던 버릇도, 거창한 다짐 거리를 찾던 습관도 그 아침엔 없었다. 그저 내가 오롯이 이 순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커다란 감격 앞에서 내가 감정을 잠시 잃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전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끼고 아꼈던, 아마도 더 이상 다른 여행을 할 수 없을까 봐 끝까지 미뤘던 내 버킷 리스트의 첫 번째 칸이 채워진 날, 꿈속에서나 있던 도시가 엽서 속 장면 대신 이 아침의 붉은 떨림으로 새롭게 기록된 그 순간 나는 눈부신 여명을 핑계로 잠시 눈을 감고 내 사춘기 시절을 채운 그녀를 떠올렸다. 이윽고 소년이 말했다. 고맙다고, 네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아침이 내게 있었겠냐고.
잠시 후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배가 무척 고프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덕에 올라왔을 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호텔에 돌아와 견과류와 말린 자두를 잔뜩 올린 요거트, 그리고 페이스트리를 먹었다. 첫 번째 프라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번의 아침이 준 감격에 취한 탓인지 혹 식사 때마다 마신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 끊임없이 나를 각성시켰는지 몰라도 프라하에 머문 닷새 동안 나는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을 잠들지 못하고 밤낮으로 도시 곳곳을 헤맸다. 처음엔 혹시 깨어나면 거짓말처럼 서울에 있는 내 방 침대 위일까 봐 걱정했던 것이 셋째 날 즈음부터는 쌓인 피로에 잠들면 혹 다음날 오후까지 일어나지 못할까 겁을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날 아침, 호텔 화장실 거울 속 내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나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 크기의 도시라면 걸음으로 빠짐없이 훑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 있었다. 열한 시에 펍에서 쫓겨나 방에서 혼자 초콜릿 푸딩에 맥주를 마시다가도 해가 뜨기 전 어김없이 방을 나섰고 종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골목들을 탐했다. 가죽 스니커즈가 흠뻑 젖어 걸을 때마다 철벅거렸지만 어쩐지 우산을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고 낡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트램을 타며 다니는 동안 인생 사진은커녕 내 사진 하나 남지 않았지만 내겐 그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처음엔 시차 탓이라고 생각했던, 잠 못 이룬 내 여행.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그 현상에 ‘여행 호르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십사 년간 열망했던 그 아침의 성취가 찾아준, 내게 있는 특별한 호르몬의 발견이라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족히 그 여행만큼 긴 잠에 빠져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여행 호르몬이 나를 버티게 했다고 설명할 수밖에.
사실 나는, 그 작은 성공마저 간절했어요.
무엇에든 좀처럼 감동하지 않던 내게 그 아침과 여행이 그토록 눈물겨웠던 이유를 또 하나 찾자면, 그 시절 내게 간절했던 것의 발견이라고 하겠다. 서른둘, 사표를 내고 난 후에야 사람들의 ‘무작정’이라는 단어는 수식어에 불과하며 나처럼 정말로 대책 없이 사표부터 던지는 이는 드물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긴 터널의 삼분의 일 지점쯤에 서있는 것처럼 다급해졌다. 돌아가자니 이미 제법 와버렸고, 앞은 한없이 까마득했다. 그렇게 김대리의 삶을 포기한 후 두어 달쯤 지났을 때, 한동안 거들떠보지 않았던 해묵은 내 버킷 리스트가 떠올랐다. 하나같이 ‘그때쯤이면 뭔가 되어 있겠지’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삼십 대의 나’에게 미뤄놓았던 숙제들이었다.
일주일에 이틀은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고 하루는 탭댄스를 췄다. 몇 달이 지나니 해마다 열리는 단체전이지만 내 글씨가 한 자리를 차지했고, 이듬해엔 대학로 소극장에서 선생님과 함께 짧은 탭댄스 공연을 했다. 그렇게 한 줄씩 지워 나간 끝자락에서 마침내 용기가 났다. 가장 위에 적어뒀지만 마지막까지 미뤄둔 여행 아니 그 도시의 이름에 대해.
그날 새벽, 언덕에 오를 때까지도 나는 무엇이든 근사하게 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내게 아침은 떠나온 용기, 시간 혹은 작은 노력만으로도 가슴 벅찬 감동을 안을 수 있음을 일러줬다. 작은 것이나마 성공이 간절했던 내게 그 아침은 도시가 밝아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 날 이후 몇 번의 아침이 더 있었지만, 그 아침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카렐교Karlův most와 블타바Vltava 강에서,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과 프라하 화약탑Prašná brána 전망대 위에서 그리고 수많은 골목을 거닐며 내가 만난 장면들 역시 순간순간 반짝이며 빛났을지언정 그 여명만큼 나를 감격시키지는 못했다. 그건 일 년 후 다시 프라하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성취로서의 여행, 그것은 그 시절 내게 꼭 필요한 위로였다. 해묵은 내 버킷 리스트는 그 작은 성공을 시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고, 도시와 시간은 성취감과 함께 내게 있는 특별한 호르몬의 존재를 일깨웠다. 그리고 여행 호르몬은 시차 없는 하루를, 오감으로 도시와 교감하는 기회를 선물했다. 일종의 보물 찾기였던 셈이다.
물론 그 대상이 꼭 여행일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독서나 노래에서, 아니면 가죽에 바느질을 하던 중 혹은 멋진 이성과 연애를 하며 뜨거운 호르몬을 발견했다면, 지금 그것에 푹 빠져 있었을 테니까. 독백을 하던 중 행복을 느꼈다면 오늘도 방에서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요즘 나는 나무 깎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선배와 요리 레시피 생각에 들뜬 친구, 매달 밴드 공연을 이어가는 후배에게서 누구나 자신만의 호르몬 분비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동시에 영화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1999)의 배경인 부다페스트Budapest를 몹시도 열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