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요일 Aug 25. 2017

고작 노래 두 곡 어치 여행

오키나와, 일본 - 주인 없는 그리움에 대해

 텅 빈 백사장 방향으로 손을 뻗어 허공에 네 형상을 그리며 나는 알았다. 나를 지탱하는 가장 넓고 오래된 감정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그것이 설령 타고 남은 재뿐이었던 날에도, 나는 그저 그 재 한 줌 움켜쥐고 네 이름만 끔뻑끔뻑 부를 뿐이었다. 그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자, 동시에 가장 가혹한 비극이었다.



 어떤 여행은 돌아온 후에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유난히 잔향이 긴 향수처럼 은은하게 주위를 맴돌고 이따금씩 손목을 들어 킁킁거리게 만든다. 체코 프라하의 한적한 골목 노비 스벳(Nový Svět)을 걸었던 것은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이지만, 여전히 나는 그 골목에서 주워온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풀어보고 있다. 고독이 있었고 인연이 생겼다. 그 시절 내 고민들과 몇 발짝 너머 내 모습에 대한 상상이 그득했다. 숙제처럼 나는 오늘도 그 시절 내 질문에 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여행은 찰나의 순간 가히 찬란하리만치 빛을 밝혔다가 이내 소멸해 버린다. 번쩍 하고 눈을 잠시 멀게 했다가, 정신을 차리면 새까만 암흑인 것이 마치 가을밤 불꽃놀이 같다. 아침부터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기다려 하늘 가득 퍼지는 클라이맥스를 보며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오늘 하루가 존재한 것만 같다고 귓속말을 했던 그 언젠가처럼. 미련이 많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붙잡아 두는 편이지만, 오키나와 미라부(新原) 해변에서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증발해 버렸다. 고작 노래 두 곡 어치의 짧은 시간 동안 머물다 떠난, 내 생애 가장 짧은 여행이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내가 꽤 오래전부터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단다. 여행 이야기에 시큰둥하던 시절에도 그 섬의 이름만 나오면 눈이 반짝였다는 말에 내 모습이 훤히 보여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묻는 그의 질문에 ‘원래 가고 싶어 했어.’라고 답했다니 막연한 그리움,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후에 다시 떠올려도 입 안에 뱅글뱅글 도는 정감 있는 이름도, 휴가로 섬을 다녀온 이들이 덧붙인 수식어도 내가 습관처럼 그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가고 싶어 했으니 가고 싶노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말할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머지않으니 다녀오라 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다. 여행은 늘 남의 이야기였던 내가 이후 종종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되어 들고 나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 섬만은 늘 비껴가거나 주변만 맴맴 돌았으니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도, 시간의 문제도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겉도는 동안 열망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아마 그리워만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거겠지, 그만큼은 남겨두고 싶었겠지.

 그 시절 나는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후쿠오카를 출발해 오키나와 나하(那覇)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국내선 티켓을 만지작거리던 이른 아침까지도 나는 설렘보단 덜컥 내려앉은 가슴 한구석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이럴 때마다 나 자신을 조롱하곤 한다. 이만한 겁쟁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라고.


 나는 아직 널 만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리움의 이유를 몰랐기에, 아니 이미 잊혔거나 혹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기에 비행기가 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닳고 닳은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간절히 붙잡고 싶었던 그녀를 만나러 가던 길을 떠올렸다. 그날 나는 오전 내내 고른 옷을 입고, 되도록 땀이 나지 않도록 걸으며 꼭 해야 할 말을 되뇄었다. 기억 속 내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비행기가 오키나와 나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머지않은 나하 시내에 짐을 풀고 나서 한 일은 이 섬을 향한 내 그리움의 이유를 찾는 일이었다. 하루는 떠들썩한 국제 거리에서, 또 하루는 이름 모를 숲과 골목에서 메아리의 시작 지점을 찾았다. 다른 도시에서 본 적 없는 이색적인 문화와 한여름처럼 뜨거운 오월 햇살이 여행하기엔 더없이 좋았지만, 이틀 내내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온갖 감정들 사이를 헤맸다. 그것이 밤낮으로 인파가 몰린 국제 거리와 시장, 초행길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첫 번째 밤, 오직 사람이 만든 조명에 의지해 맥주를 마시며 비행기 안에서 한 생각을 마저 이어보았다. 석 달간의 내 그리움과 달리 온기라곤 느낄 수 없었던 그녀, 지극히 평범하게 이별했던 우리를. 나는 무엇을 자꾸 그리워만 했던 걸까. 다음 날 밤도 나는 취했고, 평소와는 다르게 불투명한 창문까지 꼭 걸어 잠근채 일찍 잠에 들었다. 틈새로 비치는 조명 빛, 들리는 시끌벅적 소음들이 싫었다.



 다음날, 변덕스러운 섬 날씨가 한차례 소나기를 세차게 퍼붓고 난 후 날이 바뀐 듯 화창하게 갰다. 섬에서의 마지막 오후였다. 해안 도로를 달리던 차창 왼쪽으로 새파란 캔버스 같은 하늘과 붓으로 찍어 눌러 그린듯한 구름이 펼쳐진 것을 발견한 후엔 차를 돌려 한동안 홀린 듯 그 방향으로만 향했다.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던 그 풍경에 다만 한 두 발짝이나마 다가갔다 싶었던 것은 섬 남쪽 작은 해안가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웠을 때였다. 거친 돌벽과 깨진 틈으로 잡초가 무성히 자란 모양새가 마당에서 남해가 훤히 보이던 고모집 앞을 생각나게 했다.


 스러져가는 건물 잔해와 족히 십 미터는 넘을듯한 커다란 바위가 반쯤 가린 해변의 실루엣은 활짝 열어젖힌 것보다 몇 배는 더 매혹적이었다. 안달이 난 나는 처음엔 한 발 한 발 모래를 차며 걷다 결국 발을 굴렀다. 베일이 모두 걷힌 후 눈 앞에 텅 빈 해변이 펼쳐졌을 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열어 벅찬 숨을 들이마셨다. 이름 그대로의 파란색 하늘, 투명에 가까운 바다, 내 쪽으로 가까울수록 그 색이 옅어지는 백사장과 구름이 꼭 그림만 같아서.

 더 다가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해변을 바라보던 내게 그 색이며 감정들이 무질서하게 안으로 파고들던 순간, 나는 터져 나올뻔한 비명을 꾹 참았다. 텅 빈 백사장 위에 아스라이 펼쳐진 장면에 내가 찾던 그리움의 대상이, 한 때 간절했던 당신과 나의 모습이 있었다. 오랫동안 꿈꿨던 여행이 그제야 긴 준비를 끝내고 시작됐다.



“너와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불쑥 DVD를 내미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도 ‘어떤 영화길래.’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날 저녁 식사 후 플레이어에 DVD를 넣고 인트로 화면을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감상문 숙제를 앞둔 학생 같은 심정이었지만, 이후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에마에 쓰여 있는 기원문이 진심이라면 저를 당신의 아내로 받아주시겠어요?”

- 카후를 기다리며, 2009


 자신의 이름을 사치(幸)라고 했던 그녀는 얼마 후 거짓말처럼 주인공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와 함께 섬에 머물렀고, 사람들은 그녀를 행운(幸)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곧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이다. 각자의 아픔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순수한 둘의 마음이 섬마을의 풍경과 곧잘 어울린 영화였다. 가슴을 죄고 풀기를 반복하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주인공이 함께 걷던 해변과 바다, 하늘의 색에 푹 빠져 있었다.


“만약에 우리가 함께 섬에 살면 어떨까?”

다음날, 그녀에게 한 내 답은 이랬다.

“네가 해변에서 내 머리를 잘라준다면 나는 평생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어.”

 입술을 실룩대는 것은 기분이 좋을 때 그녀가 하던 버릇인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생각대로 내가 반응한 것에 기뻤던지 그날 그녀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차가 식을 때까지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늘어놓았다. 인상적인 장면과 대사 그리고 그 영화의 배경인 섬의 이름까지. 그녀는 언젠가 우리가 함께하게 된다면, 그 배경은 꼭 그 섬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재잘거림을 보는 것이 마냥 좋았던 나는 모든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 역시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말까, 라며 농담을 덧붙였다. 이 섬을 향한 내 그리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제 주인을 잃고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애틋함이 그 해변을 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떠올랐다.


 오키나와행 비행기를 탄 아침부터 이어진 답답함과 조바심, 먹먹한 감정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자 나는 되도록 빨리 시내로 돌아가 이 섬을 좀 더 둘러보고 싶어 졌다. 여전히 절정의 빛을 발하는 해변 위 장면을 뒤로하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낮은 소리를 섬 대신 이름 하나를 불렀다. 한동안 그 철자 하나만 떠올려도 몸통이 요동치고 속이 울렁거려 떠올리지 못했던 당신, 이제야 조금 편안히 한 자씩 떠듬떠듬 불러보는 사람의 이름. 그래, 너도 그렇게 거짓말처럼 내게 나타났었지,라고.


 해변에 머문 짧은 시간, 잠시 내게 닿았다 곧 날아간 감정들. 그것이 그 여행의 전부였다. 



 어떤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가 하면,
어떤 그리움은 주인을 잃고 애틋함만 재처럼 남아 오랫동안 괴롭히기도 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던 네 이름을 어느 틈엔가 잃고
대신 섬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워했던 시간이 그랬듯이.

 “당신의 이름이 들어갈 공간은 비워 뒀어요. 빈칸은 다음에 그 사람과 함께 와서 채우세요.”


 목걸이를 조심스레 내 손바닥 위에 올리며 그가 말했다. 나하 시 국제 거리 안쪽, 스물네 걸음만큼의 길이라 24보 도로라 이름 붙여진 작은 골목에 있는 공예점을 둘러보던 중 맘에 쏙 들어 구입한 것이다. 그는 네 개와 다섯 개의 사각형이 연달아 교차하는 이 문양에는 인연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섬사람들의 맘씨가 담겨있다고 했다. 목걸이를 뒤집어 보니 오늘 날짜 그리고 그녀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름 하나가 꼭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남아 있다. 


 ‘이제 이 섬에 다 놓아두고, 나는 이것만 가져갈게.’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노란 포장지를 손에 쥔 채 건넨 작별인사.

 수많은 내 그리움 중 한 권이 그렇게 마무리됐다.


Okinawa, Japan
이전 05화 도시와 나 사이의 시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