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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15. 2017

희미해진 첫 여권 도장

오사카, 일본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질문


 모든 시작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헤르만 헤세



“첫 여행지가 어디였어요?”


 새롭게 알게 된 이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음식을 향한 걸로 보아 아마도 지나가는 말로 물은 것이겠지만 잠시간 저는 입 안에 있는 음식을 씹는 것도 멈추고 그 답을 생각해야 했어요. 마침 지난 몇 년간의 여행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같은 질문을 받았거든요. 하나는 타인에게서 받은, 또 하나는 제게서 출발한 것이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질문 앞에 놓이니 꼭 답을 해야겠다, 아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쎄요, 모스크바가 처음이었던가…”

“아아, 그전에 있었어요. 여행이라기엔 뭣하고, 그냥 관광?”


 사실 저는 늘 이런 질문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첫사랑의 기억은 아직 아픔이 가시지 않았을 수 있으니까, 첫 면접이나 첫 출근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내가 너무 긴장될 테고 첫눈에 관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은 요즘엔 그리 많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첫 경험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첫 여행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제게 답해준 이들의 첫 여행 이야기들은 설렘과 기대로 시작해 기적, 발견, 감동 등 긍정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그뿐 아닙니다. 기억 속 깊은 곳에 있던 옛 여행에 푹 빠진 그들의 표정은 종종 이야기의 배경인 로마나 파리의 풍경보다 더 근사해 보였습니다. 눈을 크게 크고 두 손을 모았다가 금세 고개를 왼쪽으로 떨어뜨리며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팔을 양쪽으로 쭉 뻗어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품에 안은 듯 행복해하는 모습들은 저를 설레게 합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의 계절이 빠르게 흐르기도 하죠. 어느새 그렁그렁해진 눈을 마주 보고 있으면 이만큼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기 쉬운 질문도 드물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첫 여행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하면서도 내심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 역시 8년 전 여행 이야기를 한동안 늘어놓았죠. 점잔 떨던 손까지 쭉쭉 뻗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아마 그녀는 무심코 질문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토, 2009

 일전에 털어놓았듯, 저는 여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학 시절 배낭여행을 떠난 친구들이 부러웠던 적도, 바다 너머 세상에 호기심을 가진 적도 없었죠. 모르는 길뿐인 데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것은 제게 낭비고 동시에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세 살 많은 저를 남동생처럼 살뜰하게 챙겼던 연인의 손이 아니었으면 제 첫 여행은 아마 한참 뒤로 미뤄졌거나 어쩌면 아직껏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천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내내 손바닥만 한 창으로 구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죠. ‘아차, 내가 이 재미를 모르고 살 뻔했다니.’


 머리 위와 등 뒤로는 따가운 6월 햇살이, 눈 앞과 발아래는 오사카와 교토, 고베가 있었습니다. 이제 여행 좀 다닌다 하는 사람들은 여행으로 쳐주지도 않는 가까운 도시, 일정은 여행보다는 관광에 가까웠지만 그땐 길에 서 있는 우체통이며 편의점에 가득 채워진 음료수 통까지 놀라운 것 투성이라 머리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어요. 아무리 간절한 표정으로 말해봐야 한 토막도 전해지지 않는 언어의 차이도, 말도 안 되게 좁은 호텔방까지도 놀라운 발견이었고요. 오사카 성 아래서 바라본 초여름 풍경은 말 그대로 푸르렀고, 가이유칸 수족관의 고래 상어는 저를 스무 살쯤 어리게 만들었었죠. 발아래가 훤히 보인 커다란 대관람차에서는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내내 철봉을 양 손으로 꼭 쥐고 있었어요. 교토 기온(祇園) 거리에 은근하게 깔린 듣기 좋은 소음, 고베 항구 야경과 참 잘 어울렸던 바닷바람의 짠내도 방금 불어온 듯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흔하디 흔한 순서라지만 그럼에도 제겐 썩 멋지게 남은 첫 여행, 그래서 그 후 매년 꼭 한 번씩 오사카에 다녀왔습니다. 가을과 봄으로 바뀐 계절, 낙엽과 벚꽃으로 바뀐 배경으로 두고 첫 여행의 장소들을 거푸집 삼아 같은 식당과 카페,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스모스퀘어 역 앞의 바닷가에선 그때 그 벤치를 찾아 한참을 헤매기도 했고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찾을 뿐이지만 나만의 단골 라멘집이 생겼고 떠나는 마음은 여름 방학에 외가에 가는 것처럼 편해지더군요. 도톤보리에 도착하자마자 배추로 시원하게 맛을 낸 오이시(おいしい) 라멘 국물부터 들이켜면, 거짓말 좀 보태 마치 고향 집밥을 받아 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도시를 여행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다른 여행보다는 편히 갈 수 있는 다른 세상 하나가 생긴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여행가가 될 팔자는 아닌가 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미처 다 하지 못한 첫 번째 여행 이야기들이 사방에서 연신 솟아올랐습니다. 매일 저녁 할인 판매하는 도시락을 사기 위해 들렀던 미나미 모리마치 역 건너편의 슈퍼마켓과 여닫이 문 너머로 작은 정원이 있었던 산넨자카(三年坂)의 어느 소바 식당, 고베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꼬마 숙녀들의 미소가 그것입니다. 굳이 그곳이 아니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지난 시간을 몹시 그립게 만들더군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때 사진들을 찾아봐야겠다.’

그날 연남동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평소보다 두 배는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길에도 추억은 끊이지 않아서, 호텔 방 안에 열쇠를 놓고 문을 닫아버려 카운터에서 쭈뼛쭈뼛 상황을 설명했던 해프닝이 생각났을 땐 혼자 빙긋 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오사카, 2009

 하지만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추억 발굴은 실패했습니다. 책장 가장 아래 있는 서랍에서 예전 사진들을 보관해 둔 CD 보관함을 꺼냈지만 지난 여행 사진들이 도통 보이지 않더군요. 그날 새벽빛이 밝아올 때까지 백 장이 넘는 CD와 DVD를 한 장 한 장 확인하며 몇 년간의 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 여행 사진들을 한 데 모았습니다. 남아있는 것보다는 사라진 것이 더 많은 더미를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든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중 첫 여행 사진들에 대한 상실감이 유독 컸습니다. 중간중간 이가 빠지고 어떤 날짜는 통째로 사라진 첫 여행의 기록들 앞에서 이후 삼사 년의 미련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요.


 언제든 팔을 뻗으면 깊은 곳에 틀림없이 있을 거라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고, 그 사이 사라져 버린 것조차 알지 못했죠. 그 밤 제가 느낀 헛헛함은 허전한 기억 속 첫 번째 칸을 하릴없이 더듬은 탓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어느샌가 ‘처음’에 무뎌져 있던 저를 향한 서운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009년 6월의 장면들을 보며 제 첫 번째 여행을 떠올리던 것이 이내 제 생의 수많은 ‘첫 장면’들로 이어졌습니다. 가물가물하지만, 언젠가 사람의 기억이 반드시 시간의 역순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후로 이렇게 기억 속 가장 첫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던 제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다들 그렇겠지만, 제게도 처음은 특별한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오사카, 2010

 품 속에 있는 온갖 처음 그리고 시작들을 늘어놓다 보니 전혀 다른 몇몇 추억이 짝을 지어 보였습니다. 마치 제 위치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세네 귀퉁이가 끼워 맞춰지는 직쏘 퍼즐의 조각처럼요. 다신 오사카 아니 일본에 오지 않을 것처럼 부산스레 돌아다닌 첫 여행은 자고 일어나면 내 사람이라는 것이 거짓말이 될까 밤잠을 설친 첫사랑과 비슷한 온도로 끓고 있었고, 첫 면접을 마치고 문을 나서며 들었던 알 수 없는 감정과 서점에서 첫 번째 책을 발견한 순간의 이유 모를 한숨 같은 색을 띠었습니다. 김대리가 서른 살이 되던 날에는 그해 첫눈이 내렸습니다. 어쩌면 모든 처음은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들로 이뤄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 [관형사 처음의.


 사전에서 ‘첫’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그 자체로 하나의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단어와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재미있게도 몇몇 관용어는 합성어로 인정받아 붙여 쓴다고 하네요. 이를테면 첫사랑, 첫눈, 첫인상, 첫날밤, 첫아이 같은 단어들 말이죠. 하나같이 특별한 기억들이 깃들어 있을 법한 단어들입니다.


첫 사랑보다는 첫사랑,

첫 걸음 말고 첫걸음,

첫 눈이 아니라 첫눈.


 이렇게 불러보니 ‘첫’이란 말에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이나 기억에 ‘첫’이란 글자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그 향이 몇 배는 짙어지거든요. 마치 아주 강한 조미료처럼 소중한 것을 더욱 애틋하게, 아픈 것은 더 쓰라리게 만듭니다. 중간에 흡, 호흡을 넣거나 후, 하고 한숨을 담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이 한 글자가 무한히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만큼 짧고도 강렬한 힘을 가진 단어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생에 처음이 아닌 것이 어딨겠어요. 2017년 9월 15일 오늘도 난생처음 맞는 날이자 다시 오지 않는 유일한 하루인데. 우리 기억 속의 ‘첫’이란 표식은 어쩌면 그 수많은 처음들 중에서 잊고 싶지 않은 것 사이에 끼워두고, 외면하고 싶은 것에 걸어두는 꼬리표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새 여행의 시작점에서 몇 번씩 되뇌는 소설가의 말처럼 모든 시작 그리고 처음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마력이 그 순간에 깃들어 후에 그것을 떠올릴 때면 언제든 다시 발휘된다는 것도요. 그래야 다시 처음처럼 여행하고 사랑할 수 있을테니.


오사카, 2011

 첫 여행의 조각들을 맞추고 빈 부분을 추억하다 결국 삼 년만에 다시 인천-간사이 항공권을 예약해버렸습니다. 오사카와 교토, 고베도 아른거렸지만 그보단 수평이며 초점이 엉망이고 대체 뭘 담은 것인지 모를 사진 속에 여전히 바래지 않고 남아있는 그 시절의 떨림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거창한 목표나 인생의 전환점을 마주할 거란 기대 없이, 그저 호기심 하나로 충분했던 첫 여행. 한번 더 그렇게 떠나고 싶어 졌습니다.


 여권 가장 앞장을 보니 이제 제법 희미해진 첫 번째 도장이 눈에 띕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 이걸 핑계삼아 제가 좋아하는 질문을 한번 더 던져 봅니다.


여러분의 첫 여행지는 어디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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