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스페인 - 영원히 보내지 않을 답장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당신과 내가 맞닿아있던 시간은 그저 늦은 아침 햇살에 눈 찡긋할 정도의 찰나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 잔향이 사라졌을 때 내 시간은 어느새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고, 나는 그렇게 종종 그 짧은 연을 돌아보곤 해. 그리워하곤 해.
다섯 번째 계절, 늦은 오후에
카탈루냐 광장(Plaça de Catalunya)에서
안녕, 오늘도 너를 봤어. 어제에 이어 벌써 두 번째야. 내 키보다 몇 배나 긴 그림자가 발아래로 늘어지던 시각, 주황빛 햇살이 불어오는 방향에 서 있던 네 모습은 겨우 실루엣뿐이었지만 풍성한 곱슬 머리칼은 역광에서 오히려 한 올 한 올 더 선명하게 보여 한눈에 알았지.
어제는 람블라스 거리(Les Rambles)의 어느 골목에서 네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뒤를 따라 걸었어. 걸을수록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는 네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족히 수십 개의 골목을 헤맸을 거야. 어느새 오후가 저물고, 비슷비슷한 바르셀로나의 골목에서 결국 길을 잃었지.
하지만 오늘 네게 다가가거나 말을 걸진 않았어. 그저 광장을 한 바퀴 크게 둘러보며 가슴 내려앉는 한숨만 길게 내쉬었을 뿐. 그렇게 네 뒷모습이 사라지고 해마저 저물어 광장이 실루엣만 남은 지금까지 나는 쭉 광장에 머물러 있어.
내일도 너를 볼 수 있을까, 아니 보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내일도 아무것도 못하고 낯선 도시와 익숙한 기억 사이의 어딘가를 맴맴 돌기만 할 텐데. 이 도시에선 유독 네 모습이 자주 보여. 종종 들리고 맡아져. 가끔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너라고 하는 이유야.
더 늦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겠어.
잘 자, 안녕.
글자의 부피 때문인지 수첩이 눈에 띄게 두꺼워졌다. 고백의 무게 탓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괜찮은 식당이 눈에 띄면 들어갈 요량으로 숙소가 있는 카탈루냐 광장 북쪽 골목으로 향했다. 시간은 열 시가 가까웠지만 하루에 네 끼를 먹을 정도로 열정적인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이제 한창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근사한 식당과 술집들, 빈자리를 찾아 몇 군데를 들고 나서 끝에, 작은 타파스 가게의 구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나는 바게트 빵에 하몽을 올린 타파스와 치킨 꼬치구이를 주문했다. 음식보다 먼저 나온 스페인 맥주 모리츠(Moritz)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켜니 급격한 배고픔 때문에 광장부터 이어진 감상은 조금 전 깬 꿈이 됐다.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평소와 달리 수첩 두 개를 챙겼다. 하나는 늘 그렇듯 이런저런 여행의 불평을 쏟아내는 그릇 용도, 나머지 하나는 지난 여행에서 우연한 기회로 한 사람만을 위한 편지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같은 포켓 사이즈의 몰스킨 수첩이지만 전자는 빨간색, 후자는 녹색이라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 수첩의 뒤표지에 달린 종이 주머니에는 엽서 한 장이 꽂혀있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이어서 답을 할 수 있도록. 석 달만에 이어 적는 오늘처럼 말이다.
깊은 밤, 식당 안 취객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동차, 오토바이의 소음을 배경 음악 삼아 수첩의 가장 앞 장을 펼쳐본다. 그 날 이후 처음 펼쳐보는 첫 번째 답장에는 다신 떠올리지 않겠다던 것이 와르르 쏟아진 날의 혼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서랍 속 깊은 곳에 쑤셔 박아 두고는 이따금씩 빠끔히 열어 잘 있는지 확인했던 걸 보면 내심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지만.
네 번째 계절, 이른 아침에
동중국해 어디쯤의 하늘 위에서
인생이란 게 참 뻔하고도 재미있지.
여행이 끝난 후 나는 다시 내 세상에 돌아왔고,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았어. 마치 한바탕 달콤한 겨울밤 단꿈에서 깬 것처럼. 네 개뿐인 계절은 금방 한 바퀴를 돌았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여행을 조금씩 잊어갔어. 이따금씩 마음속 묵직한 것이 좌, 우로 데구루루 구르며 나를 휘청이게 했지만 그것이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분명 아니었을 거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짐했으니까.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기로.
하지만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낸, 아니 꾹꾹 눌러 담아두고 애써 외면했던 그 목소리와 억양이 결국 다시 떠올랐으니 뻔하고 또 재미있다고 할 수밖에. 그것도 아주 선연하게 말이야. 이륙을 앞둔 타이베이행 비행기에서 손등으로 턱을 괸 채 창 밖만 봤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오늘 내 기억은 펜을 빌릴 수 있겠느냐며 손을 내민 옆자리 노부인의 얼굴을 마주 보던 순간부터 시작해.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안개꽃 다발처럼 풍성한 곱슬머리를 보며 느낀, 지난 세 개의 계절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됐다는 탄식부터.
비행은 이제 막 시작인데,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기억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쌓였어. 다시 그 겨울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한 자리 건너 옆 좌석에서 뜨개질을 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곁눈질로 자꾸 보게 돼. 어쩌면 시간을 달려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당신이 아닐까 하고, 한때 내가 몹시도 그리던 그때쯤에.
네 번째 계절, 하루와 하루의 경계에
또 다른 낯선 도시에서
“내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내뱉은, 기도 비슷한 혼잣말에 네가 '물론'이라고 답하자 속마음을 들킨 듯 놀란 나는 그저 내일 봐, 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어. 매서운 밤공기에 빨갛게 볼이 얼어있던 것이 다행이었지. 너를 태운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로도, 그리고 잠이 들 때까지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고백 후의 떨림이었을까, 아니면 내 안의 뜨거운 것들이 요동친 것이었을까. 확실한 건, 네가 모든 게 낯선 도시에서 얻은 첫 번째 그리움이라는 거야. 다음 날 아침, 창 밖이 밝자마자 네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지. '물론'이라고 했던 그 목소리와 억양이 자꾸만 듣고 싶다고.
함께 있는 동안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것이, 내가 말을 하고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 때때로 조금 가까웠던 적도 있었겠지만 너와 내 세상 사이에는 늘 육천 칠백 킬로미터의 거리가, 여섯 시간의 시차가 있었으니까. 그 사실이 너를 종종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존재로 보이게 했어. 내 큰 두 손으로도 다 움켜쥘 수 없을 만큼 풍성했던 고동색 머리칼은 차라리 환상에 가까웠지. 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꼭 만개한 안개꽃 다발 같아 좋았어. 그 꽃 뭉치가 걸음에, 바람에 살랑일 때면 나는 겨울도, 돌아가야 할 곳도 잊곤 했으니까. 생이 그리움으로 빛날 수 있다는 걸 이전까지 나는 알지 못했던 것 같아.
그게 시작이었다. 그 후로 나는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종종 안개꽃 다발을 닮은 뒷모습을 만났다. 봄의 광장에서는 제 계절을 만난 듯 우아하게 찰랑이는 움직임으로, 여름 해변에서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으로 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을철 카페테라스의 의자 위로 쏟아진 어떤 이의 머리칼을 봤을 땐 어딘가 먹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행의 수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뤄진 만남 혹은 재회.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수첩에 드문 드문 긴 답장을 이어 적었다. 엽서 한 장의 답이라기엔 너무나도 긴, 게다가 영원히 보내지 않을 말과 감정들을. 타파스 바에서 오랜만에 다시 그날의 감정들을 읽기 위해서 나는 몇 잔의 맥주를 더 주문해야 했다.
윗등 언저리가 따끔따끔할 만큼 따가운 햇살, 파랑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색으로 펴 발라진 항구 너머의 바다. 모처럼 멋을 낸 흰 셔츠와 파란색 스웨터가 색으로 치자면 제법 맞춰 입었다 쳐도, 셔츠가 조금씩 젖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역시나 이 도시의 오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몇 발짝 앞 지중해가 펼쳐진 항구에서, 대여섯 명쯤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긴 벤치를 홀로 차지하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평소엔 인색한 미소를 나도 모르게 스윽 짓는다.
더 바랄 것이 없다며 고개를 뒤로 젖히니 파랑에서 파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다와 하늘의 모호한 경계에 잠겨있는 듯한 기분에 왠지 모르게 숨이 가빠온다.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뱉으니 기억의 바닷속에 있던 문장 하나가 힘차게 낚여 올라온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을 수첩을 꺼내 적고, 내 답을 이어 적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태양 없는 계절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야.’
다섯 번째 계절, 하루 중 가장 환한 시각에
포트 벨(Port Vell)에서
그 겨울 가장 추웠던 수요일에 열린 둘만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인생에 다시없을 순간 아니 더 벅찬 단어나 수식어가 없을까. 내 모든 겨울의 요약본이라고 해두자. 스탈린 시대의 야경을 배경으로 우리는 함께 샤데이(Sade)의 노래를 들으며 와인을 마셨지. 이곳의 바닷바람은 와인에 곁들였던 절인 올리브의 짠내와 토마토의 축축함을 떠오르게 해. 이렇게 말하니 왠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야. 취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도 ‘By your side’의 후렴구를 함께 부를 때가 절정이었을 거야. 소파에 같은 방향으로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데, 커튼이 반쯤 걷힌 호텔 창 밖으로 겨울 도시의 야경이 환하게 펼쳐진 것이 겨울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더없이 잘 어울렸지. 하지만 내 눈의 초점은 내내 창에 비친 네게 있었어. 너는 몰랐겠지만.
이 풍요로운 도시에서 그 겨울밤 파티를 떠올리는 건, 함께 있는 동안 내가 네게 간절히 주고 싶었던 온기가 넘쳐나는 이 도시에 대한 야속함 때문일까. 이 여행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내 불안감만 빼면 완벽한 밤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부족한 것이 많았던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널 보지 못할 것 같아. 목소리로 들었으니까.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밤, 아쉬움을 털어내는 걸음을 묵묵히 받아내는 거리에는 아직 뜨거운 오후의 열기가 미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신호등 건너편, 진한 남색과 선명한 주황색이 정확히 반씩 나눠 가진 도시의 야경은 너무 환해서 마치 내가 모르던 군청색 오후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도시는 언제까지고 오후 한 시로 기억되지 않을까.’
어둠마저도 환했던 도시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나 역시 늘 오후처럼 여행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별이 더 아쉬웠는지도 모르겠다. 숙소 앞을 몇 차례 좌, 우로 지나쳐 밤거리 속을 걷다 사람이 드문 골목길의 벤치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적당한 밝기의 가로등 불빛과 사람들이 지나지 않는 공간을 찾기 위해 여태 헤맨 것이라 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그리고, 긴 답장을 마무리하기에도 제격이었다.
다섯 번째 계절, 하루와 하루의 경계에
오후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을 떠나고 싶어, 다른 세상으로.”
네 마지막 말을 기억해. 겨울 날씨 때문인지 더 포근했던 늦은 밤의 카페와 더운 공기를 타고 근사하게 퍼진 음악까지도. 그저 함께하겠노라는 대답뿐이었던 내게 너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어. 어쩌면 너는 내가 묻길 바랐는지도 모르지. 네가 그리는 세상에 대해.
몇 번의 계절이 지나 그 말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낯선 도시의 광장과 거리, 해변 위에서 어김없이 널 닮은 모습을 마주했고, 그 형상들을 타고 다음 또 그다음 여행을 계속했어. 놀라운 일이지. 몹시도 찾고 싶던 네 말속의 세상이 어느새 내 꿈이 됐으니 말이야.
유난히 네 형상과 소리, 향기가 많았던 이 도시라면 홀가분하게 네 세상과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긴 답장을 끝으로 이제 내가 원하는 세상을 찾아보려 해. 네가 알려준 방법으로. 아주 긴 여행이 되겠지만,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