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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주 Sep 08. 2017

사랑의 형태 그리고 낭만의 농도

프라하, 체코 - 사랑 후에 남는 것들

 반복된 밀물과 썰물에 획들은 하나하나 씻겨 내리고, 지나간 소나기에 점들마저 흩어져 버렸을 거라고, 위태로이 선 나무 작대기가 가리킨 한때 당신이 다녀간 지점 주변을 배회해 봐야 주워 담은 조각들로 흘러간 문장이 온전히 맞춰질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새벽 여명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바람처럼 마음속으로 불어왔을 때 나는 그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덮이고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철, 컥.

 잔잔한 새벽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아 조심 또 조심했지만 내 키보다 큰 철문을 닫는 소리가 기어코 낮고 묵직한 파동을 일으키며 빈 골목 위로 퍼져 나간다. 샐쭉해진 기분에 나는 참았던 숨을 후우우 하고 보란 듯 크게 내쉬었다. 찬 공기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부예진 시야가 그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이미 붉은 물이 제법 든 하늘을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밤사이 부쩍 길어진 것 같은 요세포프(Josefov) 거리에서 걸음을 재촉하며 연신 긴 입김을 내뱉었다. 여명의 색을 조금이라도 옅게 하려고.

 체흐 다리(Čechův most) 중간쯤 지났을까, 빨간색 트램 한 대가 ‘빠아아앙-’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새벽과 어울리지 않는 아침 인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트램은 저만치 가버리고 텅 빈 다리, 하지만 한동안 나는 그 공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 너머 온통 붉게 물든 세상, 어느새 블타바 강 표면까지 내려앉은 아침에서. 아직 등 뒤로 파란 어둠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생소한 종류의 흥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아침과 밤 사이의 섬 혹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달까. 벅차오른 숨은 신호등을 건너 레트나 공원(Letenská pláň)까지 이어진 긴 계단을 오르며 점점 더 가빠졌다.

 일 년 전, 슬로바키아 출신으로 자신을 소개한 그녀에게 나는 이름보다 먼저 이 도시 속 사랑하는 공간들에 대해 물었다. 무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시끄러운 펍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귓속말로 몇몇 지명들을 일러주다가,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눈치챘는지 탁자에 놓인 종이 귀퉁이를 찢어 쪽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블랙베리의 작은 화면과 종이를 번갈아보며 글씨를 옮겨 적던 그녀의 모습에 눌러 놓았던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왔던지 다음날 가방과 주머니 어디에서도 메모는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첫 번째 줄에 있던 공원의 이름 하나만은 깊게 새겨져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종종 떠오르곤 했다. 이곳 전망대에서 노을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설명도 어렴풋이. 


 가쁜 숨을 고르며 산책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무성한 나무가 가렸던 시야에 붉은빛이 와락 하고 쏟아졌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꺼풀 너머가 여전히 환해 결국 손을 들어 가려야 할 만큼 충만한 빛이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했지만 나는 확신했다. 분명 이곳이 그녀가 말한 그 전망대일 것이라고. 잠시 후 눈을 뜬 나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타는 듯 붉은빛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노을은 아니었지만 붉은 여명 아래로 삐죽삐죽 솟은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어느새 카렐교 근처 블타바 강까지 물들인 색이 그보다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온 내가 기특하기까지 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제 막 시작된 아침 위 그들의 형태가 도시의 어느 건축물보다 크게 서 있었다. 차가운 이월 날씨에 주변으로 연신 흰 김이 피어올랐지만, 두터운 모자와 외투 차림으로 난간에 걸터앉은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였다. 아침이 밝기 전, 어쩌면 지난밤부터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침을 반기기보단 새벽이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아침이 그들의 대화 그리고 하루의 끝일 수도 있으니까.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작된 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좀처럼 끝나지 않았지만 아침이 점점 더 밝아 이윽고 여명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였을 때, 나는 감탄 대신 조금 전부터 등에 전해지는 떨림에 대한 답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낯설지만 분명 처음은 아닌 떨림. 그것은 곧 어떤 장면으로 이어졌다.


 오월의 첫 번째 휴일이었다. 익숙한 공원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걷는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혼자 산책하던 길을 함께 걸으니 새삼 봄이 온 것이 반가웠다. 외곽 산책로 중간쯤에 있는 벤치가 그 날 산책의 종착점이었다. 내가 이 공원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 중간중간 이가 빠진 나무 벤치를 소개한 내 문구였다.


 “사람이 없어서 한두 번 앉아 쉬었는데, 나중엔 습관처럼 이 근처만 오면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오더라고요.”

 내가 먼저 벤치 끝자락에 앉고, 그녀가 내 왼쪽에 앉았다. 곧 내 반대 방향으로 몸을 살짝 튼 그녀가 이미 오른편으로 기울여 앉은 내게 등을 기댔다. 그녀는 나와 이렇게 등을 맞대고 앉아있는 것을 좋아했다. 등에 전해지는 온기와 감은 눈꺼풀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나는 그 해 처음으로 오후가 눈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그날은 봄소풍을 나온 가족들과 연인들이 연신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가 꽤나 크기도 했지만, 함께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 아니었다. 등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공감한 후로는 말수가 부쩍 더 줄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숨을 크게 쉬는 것으로 대화를 대신하고, 이따금씩 경망스레 몸을 뒤척인 뒤 함께 웃곤 했다.


“아빠가 되어주고 싶어요. 오빠도, 삼촌도 될 수 있어요.

가장 가까운 연인으로, 둘도 없이 친한 친구로 곁에 있을게요.

내가 다 할게요. 그러니 나한테 기대요.”


 긴 정적을 깨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뱉어버린 건 따갑던 오후 해가 식고 떠들썩하던 산책로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때였다. 늦은 오후부터 등을 맞대고 있었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어쩌면 굳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을 때가 되기까지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사랑에 상처를 받아 마음속에 길고 어두운 터널이 생겼다는 그녀의 고백을 듣던 날부터 쭉. 다만 좀 더 세련된 문장, 능숙한 억양으로 말하고 싶은 욕심에 차일피일 미룬 것이 이렇게 주르륵 흘러내릴 줄은 몰랐다. 문장은 뒤죽박죽이었고 목소리는 바르르 떨렸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후회하는 내 한숨의 울림이 그녀의 등에 부딪혀 고스란히 내게 다시 전해졌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맞닿은 등의 떨림으로, 전보다 따뜻해진 등의 온기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달래는 대신 좀 더 낮게 그리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내가 몸을 돌리면, 그녀가 내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으니까. 그 후로 한참 동안 등을 맞댄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 나의 마지막 장면이다.


 프라하에서의 시간은 늘 그런 식이었다. 광장과 다리 위 골목에서 불쑥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주제는 하나같이 사랑에 대한 것이었고, 내가 상상하던 사랑을 눈 앞에 펼쳐 보이며 내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장씩 선명하게 보이는 사랑의 형태 앞에서 나는 방관자가 되어 그저 감탄하고, 사람들과 함께 환호하는 데 만족하고 싶었다. 카렐교 위에서 한 남성이 무릎을 꿇어 여인에게 청혼했던 순간,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내 몫의 빛까지 받아 더 반짝이길 바랐다. 잠시지만 내 세상의 주인공을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여지없이 하루에 몇 번은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맞닥뜨렸다. 눈 앞의 장면에서 지난 몇 번의 내 사랑이 가장 빛났던 장면들이 기어이 비집고 올라올 때마다 나는 내가 믿는 사랑에 대해, 기다리는 사랑에 대해 털어놓아야 했다. 레트나 공원 전망대는 내가 했던 가장 잔인한 약속을 물었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털어놓았다.


 “저기 나, 방금 이상한 장면을 본 것 같아”

 나메스티 리퍼블리키(Náměstí Republiky) 역 계단 입구에서 연인을 발견한 여인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그에게 와락 안겼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 장면을 본 나는 스무 살의 여름을 떠올렸다. 생애 단 한 번이었지만, 내게 다가오는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이 흑과 백으로만 보인 적이 있었다. 무채색 세상 위에서 마치 날갯짓하듯 움직였던 감색 상의와 노란색 치마. 나는 내가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로 그날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무척이나 근사한 첫사랑이었다고.


 “나는 우리 사이에 이만큼의 시차가 있는 것이 좋아”

 광장과 전망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꼭 잡은 노부부의 두 손은 시간에 대해 내게 물었다. 나보다 여섯 시간 느린 세상에서 사는 그녀에게 나는 우리에게 이만큼의 시간이 있는 것이 좋다고 한 적이 있다. 굿나잇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에 아침 인사를 건네면, 마치 내가 몇 발짝 앞서 하루를 걸으며 당신을 살피는 것 같아 으쓱해진다고. 아쉽게도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젠가 꼭 다시 그곳에 가서 네게 청혼하고 싶어”

 먼저 다녀온 이의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가 있는 프라하 성 지구 전망대에서 나는 지키지 못한 약속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함께 도시를 내려다보는 연인의 뒷모습만 아니었어도 평생 어디 감춰 둘 참이었다. 사실 지나간 사랑에 어긴 약속이 어디 한둘일까, 어쩌면 내 이름조차도 거짓이 되는 게 이별인데. 하지만 하나뿐인 연인과 가장 친한 친구를 동시에 잃게 만든 내 약속은 오랫동안 두고 온 짐이 되어 마음을 괴롭혔다. 그 후로 나는 사랑을 약속하는 데 조심스러워졌다.


 도시는 끊임없이 물었고, 나는 지치지 않고 답했다. 어떤 것은 고백이었고 또 어떤 것은 변명이었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는가 하면 허황된 망상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중 아프거나 슬픈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이별은 아픈 말과 모진 행동들뿐이었지만 모래가 씻겨 내려간 접시 위에 사금 가루가 한 두 알 남아 반짝이듯 프라하에서 떠올린 기억들은 그 깊이와 기간에 관계없이 사랑이 가장 빛났던 순간뿐이었다. 그 후로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지만, 그토록 사랑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은 없었다. 그래서 식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 도시에 낭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나는 사랑을 보았어요. 당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

 몇 줌 되지 않은 내 사랑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고 난 후, 당분간 갈 수 없는 곳이 된 도시. 하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프라하행 티켓을 내밀며 당신과 나의 첫 번째 여행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내가 사랑에 빠진 도시는 많았지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게 만든 도시는 아직까지 프라하가 유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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