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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27. 2017

나는 결국 또 도망쳐버렸다.

제주, 내 마음속 다락방

 섬은 늘 가만히 나를 품어주었다. 바다를 건너온 이에게 깃든 사연이, 나 같으면 궁금할 것도 같은데 섬은 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안아주었다. 내가 이만됐다 하면, 그제야 마주 보고 내게 싱긋 웃어주었다. 돌아가는 내게 재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만약 섬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평생 그곳을 찾지 않았을 거라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핑계도 참 다양한데 반복되는 야근에 지쳐,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화가 나서, 때로는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이유로 탈출을 꿈꾸기도 합니다. 너무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잠시나마 ‘일상 로그아웃’이 간절한 순간도 있죠. 비록 대부분 상상으로 끝이 나지만, 일탈을 꿈꾸는 동안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곤 하니 충분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난 제가 용기 있다고 말하지만, 저는 반복되는 일상의 사투에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저보다 더 강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한결같이 흔들리고 있는 청춘들이 모인 강연에서,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은 여행을 용기의 다른 말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종종 편도 항공권을 끊고 제주도로 날아가는 ‘현실 도피’를 저는 제 가장 비겁하고 좋지 않은 버릇으로 꼽습니다. 그래서 제주로 도망칠 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뿐인 이기심을, 그리고 한 짐 짊어진 후회와 응어리들을 들킬 것만 같아서. 


 갓 서른이 된 삼월의 밤, 다음날 아침 티켓을 예매한 뒤 곧장 김포 공항으로 향하는 저는 지쳐 있었습니다. 이십 대를 함께 보낸 선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긴 불면증은 삼십 대가 되어서도 떠나지 않았고, 때문에 새로 입사한 회사 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며 신혼여행을 제주로 다녀오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신 어머니를 잠시 떠올린 것을 빼면, 그 날 제 머릿속엔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어요. 그리고 바다를 넘는 것이 나를 억누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른 살 겁쟁이를 가장 먼저 품어준 곳은 오후의 한림항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주와의 첫 번째 인연이 근사한 관광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마터면 아무 위로도 얻지 못한, 그저 그런 관광지로만 남았을 테니까요.

 오후의 한림항은 썰물 후의 해변처럼 낡은 배와 건물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간간히 그물을 정리하는 어부들이 보였지만 그들이 새 봄 햇살을 가리거나 갈매기 소리를 덮을 수 없었으니 혼자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길게 뻗은 부둣가를 걷다가 파란색 간판이 삐뚜룸하게 걸린 낡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멋지게 낡은 ‘부두 상회’에서 어렸을 적 다락방에 올라가는 폭 짧은 나무 계단이 떠오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두 가게가 붙은 허름한 모습이 그때 살던 우리 집과 비슷했던 것 같다,라고 유추해 볼 뿐입니다. 습하고 훈훈한 공기도 다락방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데 한몫했겠고요.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전파사와 작은 양복점이 나란히 있는 낡은 건물이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우리 집입니다. 그보다 전에는 그 양복점 자리가 우리 집이었다고 합니다. 옆집으로 이사를 한 후에도 재래식 공용 화장실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네 가족이 단칸방 신세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갓 서른이 된 아버지와 이십 대 중반의 어머니께는 큰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동생과 제가 함께 쓰게 된 방에는 제 허리춤만큼 높은 위치에 겉을 벽지로 바른 문이 하나 있었는데, 기억 속 저는 이미 그것이 다락방으로 연결된 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손잡이 위치가 제 키보다 높은 탓에 문을 열 때마다 손가락을 문틈에 넣고 씨름을 해야 했지만요.

 그 시절 온 동네 이름난 삐돌이였던 저는 서운한 일이 있거나 엄마에게 혼이 날 때면 어김없이 씩씩대며 계단을 타고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철 지난 겨울 이불을 덮고 낮은 천장을 보며 잠시 세상과 거리를 뒀던, 제 ‘현실 도피 버릇’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다른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귀는 엄마의 도마 소리나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동요, 그리고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향해 쫑긋 세워져 있었던 것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고요.

 다락방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꽁했던 기분이 풀린 후 다락방을 내려오면 어김없이 TV 앞에 차려져 있었던 갓 지은 밥상이었습니다. 물론 밥 냄새를 참지 못한 제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 것이었겠지만 말이죠.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옆 동네로 인사를 가니 처음으로 제 방이 생겼습니다. 침대도 갖게 됐고요. 하지만 저는 그 방이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사춘기가 찾아온 뒤로는 방에 있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저를 가만히 품어줬던 다락방의 부재가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나만의 다락방을 잃은 저는, 어머니의 말로 ‘지겹도록 미운 사춘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십 수년쯤 지나 한림항에서 저는 오랜만에 마음속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문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했던 위로였기에 그 항구의 이름 하나 남은 것만으로 충분한 여행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잊고자 할 땐 늘 파랑이 떠올라.'

 그것은 한림항에서 본 하늘의 색이기도 하고, 월정리 해변의 2층 카페에서 본 바다의 색이기도 합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불꽃을 날리며 올려다본 하늘은 검은색보다 파란색에 가까웠습니다.

 첫 제주행 이후 저는 미움과 후회, 실망 같은 것들이 턱까지 차올라 버틸 수 없게 될 때마다 제주를 찾아 그것들을 쏟아버리곤 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잊어야 할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이렇게 도망쳐 온 나 자신에 대한 경멸까지도 바다에 던지고 돌아서면 놀랍도록 후련해졌습니다. 고맙게도 섬은 캐묻거나 보채지 않고 그저 가만히 품어 주었고, 돌아오면 늘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제 여행의 시작이었던 모스크바 여행보다 몇 년이나 앞선 일이었으니 어쩌면 저는 여행의 기적 아니 떠남으로 얻는 것들에 대해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주를 찾을 때면 늘 지쳐 있었던 제게 이 섬은 사람들이 말하는 낭만은 없었습니다. 잠시 간의 현실 도피가 주는 위안을 빼면 그저 짊어지고 온 것들을 쏟아내기 바빴거든요. 하지만 그때부터 변함없이 가장 지치고 힘들 때 이 섬을 찾는 것을 보면 그 위로가 꽤나 크고 달콤했던 것 같습니다.


 중문 해변을 달리는 말의 발굽에 의해 공중으로 세차게 뿌려지는 모래들은 꼭 그 시절 부서진 제 마음 같았습니다. 그 모래가 날아와 뺨을 할퀴는 것처럼 따가움이 느껴졌으니까요. 하지만 햇살을 받아 알알이 반짝이는 모래알의, 바위와 자갈이 낼 수 없는 빛에 위안을 얻게 되더군요. 사표를 내고 처음 그때처럼 제주로 달려갔을 때 저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습니다만, 차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한달음에 용눈이 오름에 오르고 그 위에서 아무것도 아닌 땅과 바다 위의 굴곡들을 보며 한 꺼풀 용기를 챙겨 입었습니다. 이별 후엔 수월봉의 노을 앞에서 글씨 없는 엽서를 삼 년 후 ‘괜찮아졌을 나'에게 보냈습니다. 얼마나 깊게 새겼던지 사진만 보아도 그 날의 탄식과 축축한 들숨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섬에서의 위안은 그렇게 빛과 바람, 향기로 날아왔습니다. 등에서 배어 나오는 땀과 숨에서 피어오르는 입김으로 닿았습니다. 어떤 것들은 박하사탕처럼 닿자마자 상쾌하게 퍼지는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은 잘 숙성된 와인처럼 그날 밤 혹은 다녀온 후에야 달콤한 끝 맛이 느껴지곤 했어요.


 낭만은 아니지만 설렘.

 제가 가진 제주 조각들에는 하나같이 이런 꼬리표가 붙어 있습니다.


 흰쌀밥과 노란 감자채 볶음의 향과 온기에 이끌려 못 이긴 척 다락방을 내려왔던 소년은 이제 밀린 원고와 독촉 전화에 쫓겨, 그게 아니면 공감 능력이 지나친 나머지 나보다 더 걱정에 사로잡힌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섬에서 일상으로 내려옵니다. 어릴 적 밥상의 향이 고소하고 달콤했다면, 그들과의 대화에는 어쩐지 쌉싸름하고 시큼한 향과 맛만 가득합니다. 아마 이런 게 어른들의 입맛인 거겠죠.


 저는 제주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많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생이 의기소침해졌을 때 나무 계단 밟고 오르듯 찾아 가슴속 응어리를 쏟아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철 지난 이불과 이제는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 색 바랜 플라스틱 바가지, 캐릭터 모양의 이쑤시개 꽂이와 휴지걸이 등 재미있는 것들을 늘어놓고 인형극을 했던 다락방에서의 기억처럼, 그렇게 한 조각씩 위로를 찾을 수 있는 보물섬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이 떠오를 만큼 미워하고 후회하며 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올봄 제주에 다녀왔을 때, 공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월정리 해변을 찾았습니다. 몇 년 새 몰라보게 화려해진 풍경과 카페마다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락방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운한 맘에 저도 모르게 샐쭉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어느새 광장이 되어 버린 이 다락방을 이제 그만 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 류시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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