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요일 Oct 20. 2017

언젠가, 우리, 다시, 이곳에.

로마(ROMA), 약속의 무게

 한바탕 소나기가 지난 후 곳곳에서 고대 제국의 형적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안개와 우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건물들이 하나씩 머리를 들어 제 모습을 갖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중앙에서, 나는 과거 감히 ‘영원’을 이야기하던 제국의 위상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로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고개를 위로 끝까지 젖힌 시선을 산타녜셰 인 아고네 성당(Sant'Agnese in Agone)이 가득 채웠고, 고압적인 위세에 압도된 다리는 미세하게 후들거렸다. 고소공포증은 없지만 이렇게 높은 곳을 올려다볼 때 종종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시끄러운 잔칫집에 먹을 것 없네.’라던 조금 전까지의 실망감 따윈 단숨에 훌훌 벗어 발 끝으로 차내고 골목과 광장을 아이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한 것이.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서 시작해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을 지나 나보나 광장에서 가속도가 붙은 걸음이 판테온(Pantheon) 그리고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까지 막힘 없이 이어졌다. 오 분 혹은 십 분에 하나씩 학창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유적지들이 ‘발견되는’ 바람에 도무지 중간에 멈출 방도가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고 할까. 그나마 작은 골목마다 즐비한 근사한 ‘이태리 남성복’ 매장의 쇼윈도가 잠시 시선을 붙잡긴 했지만, 발까지 묶어두진 못했다. 후에 한 이야기지만 로마는 내게 세계 최고의 테마 파크였다. 그 수를 다 셀 수 없는 유적지와 고풍스러운 거리 위로 펼쳐지는 풍경, 끼니때마다 반복되는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젤라토. 그리고 평소 내 워너비였던 이태리 양장점까지. 나는 유명 관광지는 되도록 피하자는 주의지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도시’로 로마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소매치기는 빼고.


 그 날의 하이라이트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였다. 내게 로마 곳곳을 소개할 생각에 종일 들떠있던 그녀는 오후와 저녁의 경계에 있는 오후 다섯 시 내 앞에 트레비 분수를 끌어다 놓았다. 하루 중 가장 오묘한 빛이 떨어지는 시각, 그 빛을 흠뻑 머금은 로마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분수는 꼭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신비로운 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래,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자 거대한 분수가 펼쳐진 그 순간의 벅찬 한숨에는 끌어다 놓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리고 두 말할 것 없이 그 대상은 거기 고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날 트레비 분수의 풍경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은 인터넷 우스개에서 딴 ‘유명 관광지의 이상과 현실.jpg’였다. 분수 꼭대기에 한참 동안 매여 있던 시선이 땅으로 떨어지자 엄청난 인파가 시야를 빈 틈 없이 채웠다. 도무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뒤이어 한참 전부터 들렸을 소음이 한 발 늦게 정신을 쏙 빼놓았다. '이래서 내가 오월엔 서울 대공원을 안 가는데.’ 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씩 당겨 보며 내가 이 혼란에 되도록 빨리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스마트폰을 든 한쪽 손을 위로 쭉 뻗어 셀피(Selfie)를 찍거나 양 손을 앞으로 뻗어 서로를 찍는 모습이 이젠 세계 어디서나 너무 익숙한 풍경이다. 몇몇 사람들은 분수를 등지고 앉아 무언가를 뒤로 던지고 곧바로 뒤를 돌아보는데, 그 모습을 보니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른손에 든 동전을 왼쪽 어깨 뒤로 던지면 무언가가 이뤄진다고 했던가. 



‘동전을 던지는 횟수가 중요해’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고, 두 번 던지면 평생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세 번 던지면 그 인연과 이별을 할 수 있다나. 그건 분명 나 같은 심술쟁이가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사람들의 소망 대신 한 푼 두 푼 던져진 동전이 지난 한 해만 17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수입으로도 세계 최고의 분수가 아닐까 싶다.


 이제 막 두 번째 동전을 던진 여인이 연인에게 다가가 키스를 했다. 아마도 '찾았다, 내 평생의 인연!'이라는 깜찍한 애정 표현이었겠지. 그들에게 두 번째 동전은 소망이 아니라 약속이었을 것이다. 사실 둘은 종종 그 경계가 애매할 때가 있지 않던가.


 이전에도 이런 ‘약속의 성지’들을 본 적이 있다. 프라하 카렐교 입구의 철제 펜스에는 연인들의 이름이 적힌 자물쇠가, 싱가포르 Faber 산에는 행복을 기원하는 종(Bell of Happiness)가 가득 걸려있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버스를 타고 남산 N 타워만 올라가도 색색의 자물쇠가 서울의 정상을 점령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소설가 페데리코 모치아의 <난 널 원해>(2006) 속 연인이 파리 센 강의 퐁 데 자르(Pont des arts)에 자물쇠를 건 장면을 따라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니 의외로 그 역사는 길지 않다.

 또 하나는 실제로 내가 한 약속으로,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에서 했던 말이다. ‘이 성당이 완공되는 해에 꼭 함께 오자.’ 그땐 무언가 특별한 기분에 사로잡혀한 것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나와 토씨 하나까지 같은 약속을 한 이가 퐁 데 자르와 남산의 자물쇠를 합친 수의 수천 배는 될 것이다.


 퐁 데 자르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사랑의 다리를 상징하는 자물쇠가 하나하나 늘어 마침내 다리 안전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파리 시(市)는 다리의 모든 자물쇠를 철거하고 더 이상 자물쇠를 달 수 없도록 했다. 연인의 다리에서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아쉬운 소식이지만 벌겋게 녹슨 남산의 고철덩이를 보면 내심 부럽기도 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약속의 성지’에서 그 약속의 흔적들은 주기적으로 버려지고 비워지며, 지워진다. 우리 모두가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혹은 그녀와 다시 추억의 장소를 찾았을 때,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은 셈이다. 아니 그보다, 그 약속이 지켜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바르셀로나에서의 내 약속 역시 성당이 완공될 2026년까지 남은 날 수를 셀 필요가 없어졌으니.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늘 해왔던 서약을 좀 더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 그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계에는 점점 더 이런 약속의 성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도서 <거짓말 알아채기>에서 저자 파멜라 메이어는 인간이 매일 많게는 약 이백 번 가까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루에 하는 약속의 수는 몇 번이나 될까? 오늘만 해도 아침 기상 알람으로 시작해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테르미니(Termini) 열차 시각과 호텔 체크인, 낮동안 둘러봐야 할 장소들의 리스트 등 다양한 형태의 약속들을 세우고 지키며 -더러는 찢어가며- 보내고 있다. 그 외에도 이곳에 지켜야 하는 ‘룰’ 역시 오래된 약속의 형태일 것이다. 이곳의 규칙 중 어떤 것은 서울의 그것과 같지만 이곳에만 있는 것들도 있다. 하나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나는 두 번 줄을 서야 했다. 첫 번째로 카운터에서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 그다음으로 카운터에서 받은 ‘교환권’을 들고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받기 위해. 매번 커피 바(Bar)와 아이스크림 진열대 앞에서 사람들과 어깨 싸움을 해야 했으니 개인적으로는 무척 고달픈 규칙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를 수밖에. 짧게는 오늘 하루, 길게는 이 여행 전체가 무수한 약속들의 반복이니 어쩌면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무심코 약속을 하는 것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몇 걸음 더 뒤로 가 삶 전체를 보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 -기쁨, 성취, 슬픔, 갈등, 무기력 등-의 대부분이 크고 작은 약속과 관련돼 있다.


사람들의 서약은 빵껍질이다.
- 셰익스피어


 인터넷과 SNS는 사람들이 더 많은 수의 약속을 보다 넓은 범위로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화와 메시지, 이메일로 수시로 약속을 확인한다. 그래서일까, 약속의 무게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가격은 저렴해지고 있다. 마치 대량 생산되는 공산품처럼. 이제 우리의 약속은 스마트폰 리마인더 앱이 더 잘 기억하고 있다. 일전에 소개팅 상대에게 2주 후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에게 물으니 그 날까지 재차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란다. 다른 친구는 얼마 전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는 의미로 삼 개월의 시간을 갖자고 말을 했단다. 내겐 이 현대식 언어를 해석할 능력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보다 더 얇고 가벼워진 요즘 사람들의 약속은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 트레비 분수 정 중앙에서 턱시도와 드레스 차림으로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이 말도 못 하게 대단해 보인다. 저들은 언젠가 이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진 적이 있을까? 다가가 질문을 하는 대신 결국 나도 분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동전을 등 뒤로 던졌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에서 셀린과 제시는 ‘6개월 후에 비엔나에서 다시 만나자’는 당찬 약속을 하며 헤어진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과 몇 번의 키스를 통해 관객들은 그 약속이 이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9년 후 발표된 <비포 선셋>(2004)에서 밝혀진 그 날의 결과는 기대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2001)의 쥰세이와 아오이, <노트북>(2004)의 노아와 앨리는 결국 그 약속을 지켰다지만 그 중간 과정은 내겐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오히려 <립반 윙클의 신부>(2016) 속 나나미와 마시로의 지키지 못한 ‘함께 죽을 수 있어요’라는 약속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제삼자로서 관객들은 주인공 혹은 주인공에게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꼭 쥐고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의 결과에 따라 이야기가 끝난다. 관객들의 긴장도 함께 풀어진다. 하나의 약속이 그 이야기 전체의 존재 이유이자 극과 객을 연결하는 끈인 셈이다.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든 그렇지 않든 모두 이야기가 되는 것을 보면, 약속이 지켜지는 것 자체는 이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일 년 후 다시 로마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트레비 분수를 찾았다. 아마 지난해 동전을 던지면서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겠지. 앞을 보니 첫 번째는 이뤄졌고, 옆을 보니 두 번째는 그렇지 못했다. 

 그날보다 차분한 마음으로 로마 거리를 혼자 걸으며  만약 내 인생에 관객이 있다면 어떤 약속을 손에 꼭 쥐고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를 상상해 본다. 분명 로마에 다시 돌아오거나 새로운 인연을 위해 다시 두 번의 동전을 던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지켜 보이고, 아니 적어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데. ‘얘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한심한 주인공이야.’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이전 13화 비가 그치는 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