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요일 Oct 13. 2017

비가 그치는 소리

- 지브롤터(Gibraltar), 여러 종류의 간격

#1. 고립


‘파운드(£)를 챙겨야 한다고?’

‘그래도 영국령이니 벙어리 신세는 면하겠네.’


 철썩대는 파도 소리에 맞춰 침대는 앞, 뒤로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반쯤 감긴 눈이 작은 안내 책자에서 책상 위 지갑, 미색 벽지를 바른 천장에 한 번씩 머물렀다 다시 돌아온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밤의 해변에서 근사한 해먹에 누워 잠을 청하는 기분일 거야, 라는 속삭임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낯선 도시로 떠나는 일을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내 세상에 없던 존재로 다가가 살피고 부대끼며 가까워졌다가, 때가 되면 헤어지는 과정이 닮았다고. 첫인상이 제법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그리고 온갖 감각들이 풍부해지는 것도 둘의 중요한 공통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은 대부분 그 끝을 미리 정해둔다는 것 정도?

 여행과 만남의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 종류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준비가 여행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준다는 입장이다. 내 경우엔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으며 상대를 미리 상상해 보는 것을 즐긴다. 대서양과 지중해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 지브롤터(Gibraltar)는 그런 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었다.

 여의도의 2/3에 불과한 작은 크기에 인구는 약 3만 명, 스페인 남쪽 끝에 위치한 이 작은 반도는 재미있게도 대서양 너머 영국의 영토이다. 170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영국군이 차지한 뒤 몇 번의 영토 분쟁을 겪었지만 현재까지 굳건하게 지켜내고 있단다. 영토 분쟁이 심했던 시절엔 아예 긴 장벽을 세웠는데, 지금은 스페인 국경 쪽에 길게 뻗은 지브롤터 공항 활주로와 작은 국경 출입국관리소로 자연스럽게 두 도시, 국가 사이에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령이니 언어는 물론 영어, 화폐는 영국 파운드 스털링(£, GBP)과 지브롤터 파운드(£, GIP)를 함께 사용한다. 시민들 역시 자신들을 영국인이라 생각하며 스페인 반환을 압도적으로 반대한다고 한다.


‘묘하게 고립된 곳이네.’


 땅으로는 스페인과 이어져 있지만 언어와 문화로 분리된 섬 아닌 섬. 나는 언젠가 보았던 영화 속,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세상 속에 사는 이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배가 지브롤터 항구에 닿았을 때, 하늘을 가득 메운 잿빛 구름이 마치 커다란 장벽처럼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



#2. 겁쟁이


 커다란 문이 한참 전부터 내 앞을 막고 서 있다.

 내 키보다 훌쩍 높은 문은 초콜릿 조각처럼 네모 반듯하게 멋을 냈지만 창백한 색 때문인지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게다가 주변에서 이 문에 대한 어떤 설명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고 네 귀퉁이를 한쪽씩 살피며 문과 신경전을 벌였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경첩 방향을 보아하니 이쪽에서 여는 방법은 당기는 것뿐인데 손잡이 자리가 비어있고, 그 자리에 자물쇠만 굳게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문이지만 열 수 없는 문인 셈이다. 나중엔 건물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뒷문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당장 눈 앞의 문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캐논 레인(Cannon Ln) 복판에 서 있었다.


 나는 겁쟁이였다.

 아니, 여전히 겁이 많다. 남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니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를 가장 겁쟁이로 만드는 존재는 꼭 닫힌 문이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랄까, 정적을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니면 그 뒤로 이어질지 모르는 실패에 대한 걱정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내 낮은 자존감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머뭇거리고, 종종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나와 세상의 틈은 점점 더 벌어졌다. 면접에 대한 두려움은 긴 백수 생활로 이어졌고, 사람들과의 단절은 불면의 밤을 낳았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제대로 마음을 고백해 본 기억도 내겐 거의 없다.


 내겐 벽과 문 사이의 틈을 재는 버릇이 있었다.

 여행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가장 급한 것이 배가 고파 식당이나 카페를 찾을 때인데, 그때 생긴 버릇이 상점의 문이 열린 틈을 비교하는 것이다. 90도, 많게는 180도까지 활짝 열어젖힌 곳이 있는가 하면, 창에 몸이 닿을 듯 다가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영업 중인지 모를 정도로 문이 닫힌 곳도 있다. 내겐 그것이 이곳이 얼마나 편한 장소인지를 표현하는 주인의 언어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벽과 문 사이의 틈을 통해 내가 갈 곳을 정하곤 했다.


 그런데, 미지(未知)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훤히 보이던, 빼꼼 열린 틈으로 살피든 간에 그것이 미지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의 환영 혹은 냉소 역시 문과 벽 사이의 틈 하곤 별반 상관이 없었다. 처음 반쯤 열린 문 앞에서도 서성이던 나는 점점 더 좁은 틈에 손을 밀어 넣을 수 있게 됐다. 굳게 닫힌 문도 어느 정도의 틈이 생길 때까지만 당기니 그 뒤론 별 힘 들이지 않고 열 수 있었다.


 핑계였다.

 내가 그 문을 열 수 없었던 것은 손잡이가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아직 선뜻 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었을 뿐. 그래도 문 틈새로 손가락을 밀어 넣을 상상이나마 했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물론 캐논 레인에 있는 미지의 문을 여는 실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건너편 골목의 허름한 카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며 나한테 작은 칭찬을 했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용감해지고 있다.


#3. 눈물


‘We are closed due to strong winds. (강풍으로 인해 운행하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멎었지만, 오히려 더 심해진 강풍 탓에 지브롤터 바위산 정상 어퍼 록(Upper Rock)으로  가는 케이블카 탑승장은 결국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사람들은 항의를 했지만 소용없는 일. 미처 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들 뒤로 택시 기사들이 붕어 밥 뿌린 곳에 붕어 모여들 듯 어슬렁대며 다가왔다.


“이봐, 택시로 바위산 중간까지 갈 수 있어!”

“얼만데?”

“어퍼 록만 갈 거야? 20파운드 어때?”

“나 유로밖에 없는데 괜찮아?”

“물론이지!”


그렇게 굳이 셈 해보지 않아도 호되게 비싼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20여 분간 덜컹거리며 바위산을 오른 끝에 중턱의 작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 삼삼오오 모여 깔깔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려서 원숭이 보고 와, 지브롤터에서 가장 유명한 녀석이니까!


 택시에서 내려 총총걸음으로 다가가니 주변에 아무 관심 없는 무료한 표정의 원숭이 한 마리가 위태로이 난간에 앉아 지중해의 낭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저쪽 무리를 보니 심술이 난 원숭이가 긴 머리 청년의 어깨에 걸터앉아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때까지 지브롤터 바위산을 점령한 주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내게는 그야말로 동공이 활짝 열릴 만큼 놀라운 경험일 수밖에.


 지브롤터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바르바리마카크(Macaca sylvanus)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 대륙 태생인데 바다 건너 지브롤터에 용케 자리를 잡고 지금은 제법 큰 부락을 이루며 살아간다고. 영국 사람들과 아프리카 원숭이가 함께 사는 스페인 끝자락의 도시라니!

 비교적 야생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마카크 원숭이를 대할 때 지켜야 할 규칙이 몇 가지 있다. 절대로 먹이를 줘선 안되며 -하지만 관광객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원숭이 출몰 구역’ 표지판이 있는 길에선 운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 보기보다 성격이 괴팍해서 가까이 가거나 만지는 사람에게 주먹질로 대응할 때가 있단다. 하지만 전망대 풍경을 보고 있으니 두 번째를 제외하고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동물에 다가가는 데 거리낌이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경고는 동물보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유효할 때가 더 많지 않을까? 나 역시 마카크 원숭이에겐 선뜻 손을 내밀었지만 주변에 그만큼 다가갈 수 있는 이가 있느냐 물으면 한참을 망설일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며 수없이 들은 조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전부터 거리를 두는 데 익숙했다. 너무 오래된 것이라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을 정도로. 친한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내가 그은 경계 앞에서 까치발을 세워 상대를 대했던 것 같다.

 그 선을 넘어온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너 명이 있었는데, 공통점이라면 다들 연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선을 넘어 내 영역으로 불쑥 들어온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펑펑 울어버렸다. 울음이 터진 이유는 모두 달랐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복받쳐 오른 적이 있었는가 하면, 이제 그만 떠나도 되겠다는 안도감에 오열한 적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유는 다르지만 나도 마카크 원숭이처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 울어버릴 테니까!’ 아아, 나는 다시 사랑을 할 수 없겠지?


 마카크 원숭이의 재롱을 뒤로하고 다시 택시에 몸을 넣었을 때, 거센 폭우가 쏟아지며 차 지붕을 세차게 때렸다. 나는 결국 어퍼 락 정상을 포기하고 메인 스트리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4. 비가 그치는 소리


비가 그치는 소리는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파도소리였다, 바람소리였다 한다.
새소리로, 기차와 버스 지나가는 소리로도 들린다.
그래서 눈을 감고 들으면 알 수 있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그 명확함이 좋아서 비를 기다린다.
언젠가 들려올 비가 그치는 소리를 위해.

- 싱가포르 아시아 최남단 전망대에서의 메모


 항구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한번 케이스메이츠 광장(Casemates Square)을 지나야 했다. 비를 맞으며 지나친 아침의 광장은 그저 지브롤터 안으로 입성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았지만 두 번째로 광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있었다. 섬을 에워싸던 구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리에 곱게 펴 발라진 지중해빛 하늘, 그 아래로 오랜만에 제 색을 선명하게 뽐내는 바위산과 광장의 건물들. 햇살은 또 얼마나 따끔했는지 셔츠 깃 사이로 금세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어쩌면 그새 계절 하나가 바뀐 것은 아닐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도 광장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엔 정확히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경계가 모호해서 짚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시외버스 시간표나 수강 신청은 그 간격이 분명하지만, 자신이 몇 시 몇 분에 사랑에 빠졌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한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탄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는 반면, 언제 어른이 됐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분명 그 경계가 있을 것이라 믿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것들을 캐치하기 위해 아직까지도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비록 내가 어제 새벽 몇 시부터 눈이 부었고, 몇 달 전부터 배가 나왔으며 그보다 전에 몇 살 때부터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됐는지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늘 ‘어느샌가 그쳐 있었던’ 비가 그치는 때에 대한 내 나름의 기준은 그래서 특별한 첫 번째 소득이다.


 발 빠른 테이블과 의자들이 구석부터 차례차례 비집고 앉은 광장은 달걀노른자만큼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남은 지브롤터 파운드를 털어 코스타 커피에서 차 한잔을 주문했다. 광장이 잘 보이는 야외 테이블, 그리고 와이파이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인구 삼만의 도시답지 않게 북적이는 광장의 인파와 소음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내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제부터 계절의 경계를 매번 표시해 두기로. 이를테면 오늘부터 여름, 어제부터 가을, 이렇게.


 며칠 만에 와이 파이에 연결된 아이폰이 어머니의 카톡 메시지 수십 개를 쉬지 않고 쏟아냈다. 깜짝 놀라 전화를 거는 와중에도 엄마에게 며칠몇 시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냐고 묻는 상상을 했던 걸 보니 하나는 알 것 같다. 아직 나는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5. 수평선


 저녁 여섯 시 삼십 분,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항구를 떠났다. 나는 다른 때와 달리 선상에 나가 섬이 멀어지는 것을 쭉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기도 했고, 좀 더 특별했던 것 같기도 했다. 조금씩 작아지는 섬 주변으로 모여든, 바위산을 닮은 크고 작은 구름들이 멋진 장면을 연출하며 내 작별인사에 화답했다.


‘작가님은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불안감은 없으세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고립’을 경험한 적이 있다. 말로는 이상을 향하고 있지만 몸은 현실에 묶여 있는 것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달까. 내 또래 사람들에 비해 나는 뒤쳐진 것이 많으니까. 아닌 척했지만 그때 나는 분명 불안했고, 고독했다.

 지브롤터를 상상하며 ‘고립’이란 단어를 떠올린 것도 비슷한 이유였던 것 같다. 공간과 거리에 대한 생각이었고, 언어와 문화를 통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내 멋대로 붙인 딱지와 달리 가까이 다가간 도시는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투박하지만 우아한 억양의 영국식 영어와 곳곳에 즐비한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 음식점, 빨간색 전화 부스와 버스를 보며, 스페인 구석에 어색하게 붙은 섬 아닌 섬으로 여겼던 내 연민 비슷한 감정이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한 사진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바다는 가까이서 보면 파도로 수없이 거친 선을 만들지만, 멀리서 보면 누구에게나 평평한 수평선(水平線)이야. 근데 그게 인생과 너무 닮았단 말이지.’ 


 어쩌면 사람과 광장, 골목으로 촘촘히 연결된 도시를 내가 지레짐작으로 고립된 섬사람처럼 여겼던 것도, 그리고 그보다 앞서 나를 외톨이로 치부했던 것도 모두 내 선입견, 그리고 바라보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의 중간쯤에서, 갑판 너머 쭉 뻗은 대서양의 매끈한 수평선을 보니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내 생을 이루는 것들과 거리를 조절하는 법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