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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an 04. 2019

오월 어느 날,
지중해 어딘가에서 보냅니다.

'어쩌면_할 지도', 책 속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


어쩌면 지금 _할지도 모를 당신에게
'어쩌면_할 지도'의 뒷얘기를 해 보려 합니다.

브런치 생애일주 매거진을 통해 나눴던 여행 이야기가 ‘어쩌면 _할 지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퇴사 후 헛헛한 일상을 반복하다 우연히 무언가에 이끌려 떠난 한 번의 여행이 계기가 되어 이 년여 간 낯선 도시들을 탐하며 느낀 감정들, 그곳에서 얻은 소중한 울림들을 정리하는 동안 새삼 ‘떠남’이라는 행위가 갖는 놀라운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320쪽의 책 한 권으로 ‘어쩌면 _할 지도’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모든 이의 여행이 그렇듯, 제 여행 역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간 브런치를 통해 책에 나오지 않은 뒷얘기, 아쉽게도 담지 못한 장면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배경이 된 특별한 장소들과 지나 보니 웃음 나오지만 당시엔 진땀 났던 사건들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를 찾게 될 이를 위한 작은 팁도 더할 예정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여행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1. 어쩌면 지금 가장 빛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당신에게.

“정말 근사한 배야. 그렇지 않소? 분명 멋진 여행이 될 거야.”

독일에서 왔다는 남자는 내게 출신 도시와 배의 첫인상 등을 물었다. 큰 키에 마른 체격, 푹 꺼진 볼과 높은 코의 대비에서 풍기는 예민한 인상과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이 배에 아시아인은 흔치 않아서 말이지. 더군다나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라면.”

“안 그래도 종일 시선이 따가웠어요.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왔어요.”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그의 일행을 묻는 내 말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혼자 승선했다네. 일주일 동안 홀로 여행할 예정이야.”

그는 지난해 말 이 배의 객실을 예약했다고 했다. 오십여 년의 시간을 함께 걸어온 그와 그의 부인에게 주는 선물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여행으로. 정확한 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래전 그녀가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며 그는 잠시 추억에 잠겼다.

하지만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못했던 그녀는 결국 몇 달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문득 이번 항해가 올해 첫 항해 일정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그녀와 함께 그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내게 남겨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아직 혼자 머물 객실이 익숙지 않아 배 안을 좀 더 둘러보고 간다고 말한 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둘 다 이 항해의 일원이니 다시 마주칠 때가 있겠지만 미리 인사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 여행이 자네에게 잊지 못할 순간들로 채워지길 바라네.”

한 번을 산다는 것은 하루를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그의 한마디에서 나는 일생(一生) 못지않은 일생(日生)의 무게를 보았다. 그것이 배 위에서 맞은 아침을, 그리고 다가오는 하루를 빛나게 했다.

- ‘어쩌면_할 지도’ 본문 중.


도입부 인사글을 쓰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쩌면 _할 지도’의 이야기는 어디쯤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지중해 위에서 시작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배의 객실에 딸린 작은 발코니에서요.

매일 밤 지중해를 가로질러 새로운 도시로 향하는 배는 마치 바다 위 호텔처럼 거대하고 동시에 화려했습니다. 얼굴만 한 소고기 스테이크를 매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 각종 술이 즐비한 펍은 물론이고 근사한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된 갤러리와 조명과 소음으로 혼을 빼놓는 카지노, 사우나와 마사지를 즐길 수 있는 스파 시설이 모두 배 안에 구비돼 있었습니다.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5층 메인 홀, 수영장과 대형 스크린이 있는 최상층 갑판 위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죠. 하지만 첫날 객실에 들어선 직후부터 항해가 끝날 때까지 배 안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두, 세 사람 겨우 설 수 있는 작은 객실 발코니였습니다. 원할 때면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가 지중해 풍경을 민낯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매력이 대단했거든요.


배는 정말 근사했고, 항해는 꿈만 같았죠.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발코니로 나가 부스스한 머리와 잠옷 차림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도시에서 하루를 보낸 뒤 배가 다음 도시로 출발하면 발코니에 있는 의자에 앉아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그날의 여정을 기록하며 하루를 마무리했고요. 파도로 배가 흔들린 밤엔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착각할 만큼 새까만 바다를 귀로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주일간 제게 그 날 들었던 파도 소리만 한 음악은 없었어요.


지중해 위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은 일곱 번의 아침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 항해가 다른 여행보다 특별했던 것은 비단 땅 속 바다(地中海)라는 배경, 실로 놀라웠던 선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르셀로나부터 로마까지, 매일 아침 새로운 도시를 만나 짧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또 이별하는 과정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살아가는 것과 제법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확히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없는 데다 이따금씩 파도에 휘청이며 느끼는 불안감도 30대의 제 상황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도시에서 얻을 울림들로 그동안 몰랐던, 알았으나 외면했던 제 안의 세계를 조금씩 밝혀 나가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중 하루, 오롯이 24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내게 된 날 여느 때처럼 발코니에서 아침을 보내다 문득 제 이야기를 적어 보기로 했습니다. 지은이도 독자도 저 하나뿐이었지만 언젠가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환영 파티가 한창이던 첫날밤 갑판 위에서 만난 노신사의 이야기로 새삼 돌아보게 된 ‘하루의 의미’가 첫 번째였습니다.


잊지 못할 항해의 날들을 매일 시작하고 또 마무리했던 객실 발코니. 그곳이 주는 특별한 설렘과 묘한 안락함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천천히 사라졌겠죠. 요즘도 종종 그 좁은 공간에서 보았던 지중해의 여명과 웅장한 파도 소리, 접시 밖으로 흩어진 빵 부스러기며 커피 얼룩들이 그립습니다. 제가 이야기 속 노신사의 나이쯤 되면 다시 그렇게 항해하는 날이 올까요? 그때도 객실에 발코니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그만한 크기로요. 그럼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보다 더 깊고 농익은 것이 될 것만 같아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이야기를 시작한 그 날 아침이 문득 몹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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